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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시] 길 위의 할머니
작성일
2022.01.18

시-가작

길 위의 할머니

유 영 재 [호주]


이사벨 할머니의 입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시골 출신이야 도시는 각박한데 이곳은 살만해. 소녀 적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한테
선 골동품상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가 났다. 그녀의 몸에는 낙엽과 먼지가 쌓여있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 머리엔 골동품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에
신이 났는지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과거는 몸속에 스며있어. 우리가 걸어온 이야기가
세포 하나하나에 들어있지. 할머니는 세포에 들어있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 놓 았다.

나는 할머니의 헝클어진 붉은빛 갈색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할머니와 나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만났던 것 같다. 처음 본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몇 번의 인연으론 어림도 없지. 손자를 대하듯 봄
볕 같은 온기로 바라보는 눈길은 멀찌감치 스쳐 지나간 인연으론 가당치도 않아.
우리는 엄마로 누나로 여동생으로 싹을 몇 번은 같이 틔운 것 같아.

끊임없이 반복되는 할머니 이야기는 복사기로 찍어낸 활자체 같았다.

앵두나무에 송충이가 있었어. 등에 도둑 가시가 달려있었지.
인생은 훔치는 거야. 양심이 있으니까 몰래 훔치는 거야.
송충이를 보고 달아나는 나를 보고 아들은 깔깔댔어.
앵두는 버터에 무쳐먹어야 돼. 할머니의 입에선 헝클어진 말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골목에서 뒤돌아본 할머니는 내가 있던 자리에서 하얗게 웃고 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나를 배웅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