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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타이거 마스크
작성일
2022.12.13

단편소설 부문  대상


타이거 마스크

이 수 정 (미국)


오랜만에 본 아버지는 다른 가족과 있었다.

금수 씨가 아버지를 좀 더 일찍 알아보았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그 앞에 물컵을 놓으며 뭘 주문하겠냐고 물을 때 아주 잠깐이지만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고도 금수 씨는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음식 주문은 아버지가 아니라 함께 온 여자가 했다. 두 여자 중 나이 많은 쪽이었다. 여자는 음식을 시킬 때 아버지를 포함해 다른 일행에게 뭘 먹겠냐고 묻지 않았다. 여자가 제 맘대로 해산물 위주로 요리를 주문할 때 금수 씨는 메뉴를 받아 적다가 자기를 쳐다보는 아버지와 또 한 번 눈이 마주쳤고 그때도 금수 씨는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금수 씨의 눈에 아버지의 얼굴은 다르게 보일 만했다. 우선, 늘 눈썹을 덮게 덥수룩하던 앞머리가 7대 3 정도의 선명한 가르마로 나뉘어 넘어가 있었다. 그리고 염소수염이 사라지고 없었다. 앞머리가 바뀌고, 수염이 있던 자리에 없어진 사람을 이십 년 만에 보고 바로 알아볼 정도라면 보통 눈썰미가 아닐 것이다. 금수 씨는 눈썰미가 좋은 축에 들지 못했다.
먼저 알아본 쪽은 아버지였다. 주문하던 여자가 금수 씨의 이름표를 가리키며 차이니즈인지, 코리안인지 영어로 물었을 때였지 싶다. 악센트로 보아, 여자는 ‘왕(Wang)’이란 라스트 네임이 한국에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중국인 같았다. 이런 일이 왕왕 있어, 금수 씨는 빙긋 웃으며 “워씨한궈런(我是韩国人).”하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여자가 금수 씨더러 금수 씨의 얼굴은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 같다고 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젊은 여자가 픽 웃으며 눈을 휴대폰에 박은 채 “일본인은 이런 데서 일 안 해.”라고 영어로 말했다. 부아가 나는지 말끝에 아랫입술을 무는 게 보였다. ‘이런 데’서 일 안 하는 일본인들에게 나는 부아인지, 나이 많은 여자에게 내는 부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이 든 여자는 그런 젊은 여자를 본 척도 않고 금수 씨의 아버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 His last name is also Korean Wang(그의 성도 역시 한국계 ‘왕’이에요).

순간, 함께 앉은 아이 앞의 스테인리스 스푼이며 나이프가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이가 실수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아버지가 부러 떨어뜨린 것이었다. 아버지가 그것들을 집으려 테이블 보 밑으로 반은 기어들어 갔다. 자리를 뜨면서 금수 씨가 슬쩍 보니, 고개를 드는 아버지 얼굴이 불이 잘 붙은 구공탄 마냥 붉었는데 일행 중에 아버지 얼굴이 놀라서 붉어졌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금수 씨는 그래도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주방에 들어가 있는 금수 씨를 아버지가 찾아와 당신을 아버지라고 밝혔을 때 금수 씨는 놀라지도 못했다. 아버지를 이십 년 만에 만났다는 사실보다 가뜩이나 바쁜 주방에서 손님하고 뭐하냐는 듯 힐끔거리는 주방장이 금수 씨는 더 신경 쓰였다.
우물쭈물 별말이 없는 금수 씨를 보고 아버지는 이럴 줄 알고 준비해왔다는 듯 셔츠 앞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옆모습이었지만 아버지에게 업혀 정면을 보고 있는 여자아이는 금수 씨 자신이 맞았다. 금수 씨가 사진에서 눈을 떼고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자 아버지는 어려운 허락을 얻어낸 사람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버지는 수시로 열리는 주방 문틈으로 홀 쪽을 힐끔거리며 금수 씨에게 역시 미리 적어온 쪽지를 쥐여 주었다. 그러면서 금수 씨의 손을 그 두 손으로 힘주어 감싸고는 꼭 전화를 달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아버지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금수 씨의 팔이 티 나게 움찔거렸다. 열두 살에 헤어져 얼굴도 가뭇한 아버지를 이십 년 만에 만났을 때 딸이 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서였다. “안녕하세요.”라고 해야 할지, “반가워요.”라고 해야 할지…. 솔직히, 제일 먼저 떠오른 말은 “왜 이러세요.”였다.

금수 씨는 아버지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통화를 하지도 않았다. 문자가 오가지도 않았다. 꼭 연락을 달라고 할 때 아버지 표정은 진심인 듯했고 얼핏 간절해 보이기까지 했으나 금수 씨 입장에서 그 말을 들어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집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반가워할 사람이 없으니 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금수 씨는 아버지를 오랜만에 만났다는 사실도 곧 잊을 참이었다.
뜻밖에, 아버지를 먼저 입에 올린 건 엄마였다. 이십 년 전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엄마가 아버지 이야기를 전혀 안 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를 입에 올릴 때 엄마는 대개, 어떤 일로 화가 아주 많이 나 있었다. 어떤 일로 화가 났는데 화난 김에 떠올리기 제일 좋은 사람이 아버지라는 듯….
엄마는 그렇게 아버지를 떠올리면 당신을 화나게 한 어떤 일을 대번에 잊곤 했다. 화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를 입에 올리는 엄마를 거의 본 적 없었기에, 뭐 좋은 일이 있는지 엄마가 콧노래 결에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을 때 금수 씨는 구안와사가 온 사람처럼 입가로 커피를 다 흘렸다.

그날, 금수 씨의 집은 오랜만에 별일이 없었다. 그 전날은 엄마의 성한 가슴에서 또 발견된 종양이 음성이라는 결과를 병원에서 받았고 당일은 치수 씨가 모처럼 일찍 퇴근해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던 참이었다. 먼저 식사를 마친 금수 씨는 식탁에 그대로 앉아 육개장 때문에 후끈거리는 속을 차가운 보리차로 달래고 있었고 엄마는 자몽 껍질을 손끝으로 뜯어내는 중이었다.

- 아무래도 내가 왕병기, 느이 아버지를 찾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리 말하고 엄마가 자몽 두 조각을 한꺼번에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동안 금수 씨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었다. 한 달 전 전화 기록을 찾기 위해서였다. ‘드래곤 팔레스’에서 아버지를 만난 뒤 금수 씨는 아버지한테 전화를 한 번 걸긴 했다.
쪽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고는 통화 연결음 소리가 들리자 바로 끊었다. 그러고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따로 저장하지는 않았다. 저장할 필요까진 없는데 그렇다고 바로 잊기는 뭣한 전화번호를 남기는 금수 씨만의 방식이었다.

금수 씨는 휴대폰 화면을 위로 죽죽 밀어 아버지를 만난 한 달 전쯤으로 갔다. 아버지 것으로 짐작되는, 저장 안 된 번호가 있었다. 네 시경에 금수 씨가 걸었으나 통화는 성사되지 않은 전화…. 일단 그걸 찾아 놓고 금수 씨는 휴대폰에서 눈을 들었다.
아버지 이야기를 운만 떼고 엄마가 더 말이 없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아버지를 직접 찾은 건 아니지만 찾은 것과 진배없게 돼버린 금수 씨는 저 혼자 얼굴이 뜨듯해졌다. 아무래도 아무 말이나 해야겠다 싶어 입을 떼려는데 막 입에 집어넣던 밥 한 숟갈이 뜨거워 치수 씨가 입을 못 다물고 턱을 덜덜 떨었다.
금수 씨보다 먼저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틈에 금수 씨가 치수 씨를 향해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금수 씨는 등을 돌린 채 정수기에서 물을 받는 엄마를 곁눈으로 힐끔거리며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댔다. 쉬. 치수 씨가 금수 씨의 휴대폰을 슬쩍 보고는 금수 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금수 씨는 입 모양으로 ‘아버지’를 만들어 보이고(엄마가 말한 그대로 ‘왕병기’라고 하려고 ‘와’를 만든 입을 얼른 ‘아’로 바꿔서) 휴대폰 화면을 치수 씨 쪽으로 해서 들이밀었다. 그걸 잠깐 들여다본 치수 씨가 입안의 음식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얼른 삼켰다.
‘아버지를 찾았어?’라는 입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니, 우연히 만났어. 어디서? 식당에서.
소리를 안 내고 입 모양으로 말하려니 입의 움직임이 과장되어 둘 다 턱이 뻐근했다. 엄마가 물컵을 들고 돌아와 자리에 앉는 바람에 금수 씨와 치수 씨는 소리 없는 대화를 멈춰야 했다. 치수 씨는 엄마가 내미는 컵을 받아 들고 물을 마시면서 가늘게 뜬 곁눈으로 금수 씨를 보았다. 금수 씨는 못 본 척했다. 괜히 목울대를 크게 울려가며 물을 오래 마시는 치수 씨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엄마가 말했다.

- 느이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이젠 느이들을 만나야지.

식탁 아래서 치수 씨가 금수 씨의 다리를 툭 찼다. 금수 씨가 쓱 쳐다보니 치수 씨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게,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걸 엄마에게 알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금수 씨를 질책하는 것도 같고,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엄마만 모르는 걸 재미있어하는 것도 같았다.

금수 씨와 치수 씨는 이제 갓 예순이 되었을 아버지의 생사를 엄마가 궁금해하는 게 이해는 갔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걸 몰랐다면 금수 씨와 치수 씨도 아버지에 관해 그걸 제일 궁금해할 판이었다.
아버지와 같이 살았을 때가 어려서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금수 씨가 아는 한 아버지는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혼자 죽고 싶다는 말은 물론, 식구 다 같이 죽자는 말도 심심찮게 했다. 아버지는 죽고 싶다는 말을 대부분 밥을 먹다 말고 했다.
식구들은 죽고 싶다는 아버지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버지가 워낙 그 말을 자주 해서 그러기도 했고 그보다는 눈앞의 밥을 먹는 일이 더 중하기도 했다. 사실, 식구들은 죽고 싶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염려된다기보다는, 좀 우스운 쪽이었다.
그게 좀 우스운 이유가 식구 나름대로 있었다. 엄마는 식구를 먹여 살리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기에 그게 우스웠다. 금수 씨는 죽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가 드러나게 입술을 질끈 깨무는 아버지의 입매가 비장하다기보다는 간지럼을 참는 것처럼 보여 우스웠다. 치수 씨는 아버지가 죽고 싶다는 말만 하고 한 번도 진짜로 죽는 적은 없어서 우스웠다.
식구들은 그 마음을 나름대로 내비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밥상머리에 앉은 사람이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죽고 싶은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나지.”라고 중얼거렸고, 치수 씨는 혓바닥을 있는 대로 내밀고 고개를 앞으로 푹 떨구면서 저가 죽는 시늉을 했다.
밥을 먹다 말고 아버지가 죽고 싶다고 말할 때, 금수 씨는 입술을 깨무는 아버지를 보지 않기 위해 마주 앉은 아버지 뒤쪽 벽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여지없이 그 벽의 옷걸이용 못에 걸린 타이거 마스크가 눈에 들어왔다.
바탕은 희고, 이마와 눈 아래쪽에 검은 줄 몇 개가 굵게 간 고무 재질의 레슬러용 마스크. 타이거 마스크는 늘 거기에 걸려, 늘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구멍, 콧구멍, 입 구멍이 있는 대로 늘어져 몹시 졸린 듯한 표정의….
그래서 금수 씨는 아버지를 보지 못한 지난 이십 년간 어떤 이유로든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아버지의 얼굴보다 타이거 마스크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타이거 마스크는 아버지가 타이거 마스크에게 얻은 것이었다. 엄마는 타이거 마스크를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아버지뿐일 거라며, 누굴 좋아해도 아버지는 꼭 ‘저 같은’ 인간을 좋아한다고 이죽거렸다.
타이거 마스크는 경기에서 이기는 때가 거의, 아니, 단 한 번도 없는 레슬러였다. 쉽게 말해, 타이거 마스크는 져 주는 역할을 하는 레슬러였다.
물론, 한국 프로레슬링의 태동기에 태어나 한국 프로레슬링의 황금기에 청춘을 보내고 한국 프로레슬링의 암흑기에 때맞춰 일터에서 쫓겨난 사람답게 아버지는 프로레슬링에 ‘져 준다’는 말 따위는 개입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아버지는 프로레슬링이 만들어진 각본대로 짜고 하는 쇼가 아니라 극본 없는 드라마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 믿음은 동네마다 있어 뵈던 레슬링 체육관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더 굳건해졌다.
금수 씨와 치수 씨는 세상 사람들이 레슬링 경기장이 아니라 야구장으로 몰려가기 시작하면서 더는 한국에서 프로레슬링 방송을 볼 수 없게 된 무렵 태어났다. 말하자면, 금수 씨와 치수 씨가 아버지와 같이 산 십 년 남짓한 시간은 아버지로서는 가장 암울한 시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치수 씨가 태어나고 몇 년 뒤 주한미군방송(AFKN)에서 프로레슬링 중계가 재개되었는데 그 경기 내용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이기는 쪽은 늘 치렁치렁한 금발을 휘날리거나 근육보다 배가 더 불거져 보이는 백인 레슬러들이었다.
상대편은 비단 한국인만은 아니었지만 누가 됐든 백인들 눈치라도 보듯 만날 졌다. 영어로 할 줄 아는 제일 긴 말이 ‘마이 네임 이즈 왕병기’면서 아버지는 AFKN 레슬링 경기를 빠짐없이 챙겨 보았다. 경기가 장충체육관 같은 데서 열린다고 하면 그 길로 달려갔다.
아버지가 응원하는 한국 레슬러는 질 때가 훨씬 더 많아 레슬링 시합을 보고 오면 아버지는 여지없이 또 죽고 싶다고 말했다. 타이거 마스크는 그즈음, 등장한 레슬러였다. 타이거 마스크의 사명은 단순했다. 불붙은 듯 시뻘건 ‘비로도’ 망토를 휘날리며 링 위로 올라 양다리를 가위 삼은 ‘헤드 시저스’로 상대의 머리빡을 조이며 기세등등…그러다 어느새, 허무하게 매트에 메다 꽂혀 양어깨를 링 바닥에 바짝 붙이고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타이거 마스크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아는 이는 없었다. 벗은 몸 색깔을 보면 백인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경기 시작 전에 캐스터가 타이거 마스크의 국적 비슷한 걸 소개하기는 했으나 설마 저런 나라가 있을까 싶게 요상한 이름인데다가 장내 마이크가 너무 울려 대개 뭉개진 발음으로 들렸다.
하긴, 그의 국적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는 편의 나라 따윈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는 하필, 그런 타이거 마스크의 팬이 되었다. 승자가 아니라 패자의 팬. 아버지는 타이거 마스크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다니는 극성팬이 되어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엄마는 그 덕에 아버지의 죽고 싶다는 말을 안 들어 좋다며 개의치 않았다.
늘 패자였지만 타이거 마스크는 그 전매특허 기술인 헤드 시저스 하나만큼은 어린 금수 씨가 봐도 가히 독보적으로 멋지게 해 보였다. 사실, 아버지에게도 가히 독보적이라 할 만한 게 있긴 했다. 키도 몸집도 한국의 평균 남자보다 조금 큰 정도였지만 아버지의 장딴지만큼은 태생적으로 벽돌처럼 두껍고 딴딴했다. 하루는 타이거 마스크가 아버지의 장딴지를 가리켜 헤드 시저스를 위해 ‘신이 내린 장딴지’라 했다며 아버지는 밥을 먹다 말고 아이처럼 자꾸 웃었다.
어느 날, 타이거 마스크는 등짝에 뱀 문신을 한 미국의 ‘레드 스네이크’에게 곧바로 헤드 시저스를 걸려다 실패하고 뒤이어 백 드롭을 당했는데 그만 각본에 없는 뇌진탕을 일으키고 말았다. 티브이 속에서 타이거 마스크가 들것에 실려 나갈 때, 금수 씨의 아버지가 그 한 귀퉁이를 붙잡고 달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 큰 어른이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다음날, 신문 한 귀퉁이에 왕년의 한국 프로레슬링계 한 스타 레슬러의 부고가 실렸지만 그걸 눈여겨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사나흘 뒤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손에는 타이거 마스크의 유품인 타이거 마스크가 들려 있었다. 아버지는 그러고 어쩐 일인지, 죽고 싶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더니 몇 년 뒤 겨울, 집을 나갔다. 프로 레슬러가 되어야겠다는 쪽지 하나만 달랑 남긴 채….
벽에 걸린 타이거 마스크도 그때 아버지와 같이 금수 씨의 집에서 사라졌다. 언젠가 아버지가 미국에 있다고, 엄마가 전화로 누군가와 속삭이는 걸 들은 어린 금수 씨는 아버지가 타이거 마스크의 원수를 갚으러 간 거로 생각했다.

-아버지는 레슬러가 되었을까?

비단 아버지가 살아 있다고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치수 씨는 아버지의 생사보다 그게 더 궁금했다. 사실은 금수 씨도 그랬다. 아버지는 프로 레슬러가 되었을까?
한 달 전, 식당 주방에서 아버지에 잡힌 손을 빼내면서 금수 씨가 떨군 시선에 하필 아버지의 장딴지가 들어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레슬러가 되었다 쳐도 이제 예순이 된 아버지는 머리도 희끗희끗하고 눈가에 주름도 자글자글했지만 입고 있던 카고 반바지 아래로 불거진 장딴지는 여전히 어지간한 남자의 넓적다리만 했다.
아버지는 레슬러가 되었던 걸까? 엄마는 레슬러가 되고 싶다는 아버지를 죽고 싶다고 말할 때의 아버지보다 더 우스워했다. 금수 씨는 웃통을 벗고 검정 타이즈를 신고서 사각의 링에 올라 있는 아버지 꿈을 꾼 적이 몇 번 있었다. 꿈속 아버지는 타이거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마스크로 얼굴이 가리었지만, 금수 씨는 그게 아버지임을 알 수 있었다.
어떤 표식 같은 게 있어서 알아본 건 아니었다. 아버지 얼굴을 본다 한들, 금수 씨가 아버지 얼굴을 선명히 기억하는 것도 아니었다. 금수 씨는 다만, 느낌으로 그게 아버지 꿈이니 아버지라고 알 뿐이었다. 살아서 일면식도 없는 타이거 마스크가 금수 씨의 꿈에 굳이 나올 리는 없을 테니까.
금수 씨의 꿈속에서 아버지는 레슬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타이거 마스크가 그랬던 것처럼 꿈속의 아버지도 졌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지면서 웃었다. 타이거 마스크의 뚫린 눈구멍으로 보이는 아버지는 눈은 분명 웃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지는 게 당신이 할 일이라는 듯, 늘 지는 게 당신의 사명이라는 듯.
엄마는 밥을 다 먹은 치수 씨에게 자몽 조각 하나를 내밀며 아버지가 하는 레슬링 경기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고 이제야 털어놓았다. 엄마는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오 년 뒤 아버지를 LA에서 만났다. 다니던 보험회사에서 엄마가 공금 횡령죄를 뒤집어쓰고 금수 씨의 남은 식구들 모두 미국으로 올 때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금수 씨와 치수 씨를 조퇴시키러 온 엄마는 지퍼를 미처 다 채우지 못해 옷가지가 삐죽 튀어나온 짐 가방 하나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엄마의 블라우스 단추는 하나씩 밀려 있었다. 금수 씨와 치수 씨는 학교에서 바로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에 올랐다. 점심시간 전이라 도시락도 먹지 못한 채였다.
사진이나 티브이에서만 보던 비행기를 처음 타고도 금수 씨는 내놓고 신기해하지도 못하고 열 시간 내내 부동자세로 앉아 있었다. 치수 씨는 비행 내내 잤고 몇 차례 화장실을 다녀왔지만, 금수 씨는 오금에 잔뜩 힘을 준 채 진득하니 참았다. 비록 어렸지만 적어도 금수 씨는 엄마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지는 않았다.
잠도 소변도 참을 수 있었으나 금수 씨는 자기 가방에서 밥이 쉬어가는 냄새, 신 김치가 더 발효되는 냄새가 새 나오는 게 몹시 신경 쓰였다. 앞뒤에서 코를 ‘킁킁’ 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엄마는 치수와 머리를 기대고 코까지 골면서 잤다. 금수 씨는 속도 몰라주고 잘 자는 엄마가 야속하다기보다는 짠한 마음이 더 컸다. 이 모두가 식구들을 걷어 먹이려다 생긴 일이었고, 아버지가 집을 나가서 생긴 일이었으니까.
그 뒤로 이십 년이 지나는 동안 금수 씨는 아버지에 관해 한 마디도 묻지 않았고 엄마 입에서 아버지 소식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랬기에 아버지가 레슬러가 되었는지 어떤지는커녕, 아버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아버지의 레슬링 시합에 가 보았다고 말하자 금수 씨는 이번에는 엄마가 조금 야속했다. 아버지가 남긴 쪽지에 ‘애들한테 아버지 노릇 좀 제대로 해보려고’라는 말도 있었던 걸 말 안 했을 때보다는 덜했지만….
- 아버지가 이겼어?

치수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빈 밥공기와 수저를 들고 싱크대로 가면서 말했다. 심드렁하다는 투였지만 치수 씨는 무심코 튼 물의 세기를 바로 줄였다. 금수 씨가 옆 눈으로 보니 엄마는 막 입에 자몽 조각을 또 두 개나 넣고 우물거리는 중이었다.

- 그때, 갑자기 미국에 왔을 때 말이야. 우리가 신세 진 집이 느이 아버지 사촌 형네였어.

대충 그런 뜻으로 들렸는데 엄마가 입을 우물거리는 통에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시합에서 이겼는지 묻는 말에 적절한 대답이 아니었기에 금수 씨는 엄마의 입을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치수 씨도 수세미로 그릇을 닦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는 자몽이 입에 있는데도 한 조각을 더 집어넣을 기세였다. 금수 씨가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그 손을 저지했다. 엄마가 고개를 돌려 금수 씨를 보았다. 금수 씨는 굳이 눈을 마주치지는 않고 어떤 말을 기다린다는 시늉만 했다.

- 그이 통해서 아버지가 어디 사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어. 그래서 실종신고까지는 안 했던 거고. 신고 안 하길 잘했지, 그 난리 났을 때 느이 아버지라도 미국에 있었으니 다행이지 뭐야. 그때 아버지를 만나야 해서 시합에 갔던 거야. 잘 돼 있으면 슬쩍 좀 비벼볼 참이었는데, 나 원, 진짜로 레슬링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다니?

엄마가 말하는 도중에 치수 씨는 물을 다시 세게 틀고 싱크대 위에 널린 그릇들을 죄 끌어다 작심하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후드에 장착된 라디오도 켰다. 환성 소리가 쏟아지면서 프로야구 중계 캐스터의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뒷부분의 ‘진짜로 레슬링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다니?’는 금수 씨만 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아버지가 졌는지 이겼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금수 씨는 엄마 쪽으로 몸을 조금 틀었다. 이제 와 그게 왜 자꾸 궁금한지 금수 씨도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 시합 도중에 느이 아버지가 날 알아보더라고. 하긴 관중이라 해봐야 몇 사람 되지도 않았거든.

금수 씨가 엄마 등 뒤로 손을 뻗어 라디오 좀 끄라고 치수 씨에게 손짓을 보냈다. 엄마는 자몽 하나를 다 먹고는 또 하나를 집어 들고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엄마의 손톱이 껍질에 푹 들어가면서 불그레한 즙이 찍, 엄마 눈에 튀었다. 금수 씨가 티슈를 몇 장 뽑아 엄마에게 내밀었다. 엄마가 티슈로 두 눈을 지그시 눌렀다. 앞뒤 정황을 모르는 이 눈에는 설피 울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때, 돌아선 치수 씨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치수 씨가 고무장갑을 벗고 전화를 받았다. 움직이는 치수 씨를 금수 씨가 곁눈으로 좇았다. 입으로 ‘누렁이?’하고 해 보이자 치수 씨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고개를 저었다. 전화기에서 얼굴을 조금 떼고 치수 씨는 ‘주향이’라고 내뱉듯 말하고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

- 누렁이 놈, 요즘 치수한테 전화가 잦드라?

누렁이는 치수 씨가 일하는 ‘델리 바이트(Deli Bite)’의 주인이었다. 어디 유럽계라는데 백반증이 있어 가뜩이나 누런 이가 더 누래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이름이 길고 생소해서 엄마 입을 통해 그냥 ‘누렁이’로 굳어졌다.
단어란 건 개개인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는 성질이 있어, 금수 씨나 치수 씨에게는 ‘누렁이’가 ‘누런 이’의 비슷한 말 정도였지만 엄마에게는 한국의 시골 마을이면 으레 한두 마리 돌아다니는 동네 개와 같은 말인 듯했다.
엄마는 통화하는 치수 씨를 보려 목을 길게 뺐다. 금수 씨가 그런 엄마를 위해 상체를 뒤로 살짝 젖혔다.

- 돈도 제대로 안 주면서 뭐 시킬 일은 그리 많다니?

엄마는 치수 씨가 주향이라고 한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주향이 델리 바이트에서 일하게 된 건 금수 씨 덕이었다. 금수 씨는 치수 씨나 주향보다 델리 바이트에서 먼저 일했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일자리가 급해진 주향에게 금수 씨가 그 자리를 내준 것이었다.
금수 씨는 드래곤 팔레스 자리를 주향에게 소개했지만, 밤 열 시 넘어 퇴근이 가능한 웨이트리스 일을 주향은 할 수가 없어 금수 씨가 드래곤 팔레스로 옮겨 갔다. 덕분에 금수 씨는 배우고 싶던 중식 요리를 눈동냥으로나마 익힐 수 있었고 주향 씨는 오후 다섯 시면 퇴근해서 남편을 돌볼 수 있었다.
다리 저는 치수 씨를 고용하기 싫어하는 누렁이에게 힘든 일을 적게 시키는 대신 덜 힘든 일을 길게 시키면 되지 않겠냐고 설득한 것도 주향이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주급이 자꾸 늦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주기는 줬고, 히스패닉계가 대부분인 동료 직원들이 무거운 식자재를 힘겹게 옮기면서도 그 일을 잘 해내지 못하는 치수 씨에게 눈치 안 주는 것만 해도 치수 씨로서는 불평할 수 없는 자리였다. 주향에게 어떤 물건 위치를 가르쳐 주는 듯한 통화가 끝나는가 싶더니 치수 씨가 금수 씨를 향해 말했다.

- 누나랑 통화하고 싶대.
- 나하고?
- 응.
- 내 전화로 하라 그래. 내 전화번호 알 텐데?

금수 씨의 말끝에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잠시 잊고 있었고, 그랬기에 잠시 평온할 수 있었는데 무언가를 계기로 그걸 떠올려야 하면서 평온이 깨지고 어떤 현실로 돌아와 짓게 되는 침묵….
금수 씨네 평온을 깨는데 계기가 된 것은 금수 씨의 전화번호였다. 한 달이 멀다고 바꿔야 하는 전화번호. 가족이나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전화번호. 아니, 가까운 사이기에 더 알려줄 수 없는 전화번호. 이혼에 합의를 안 해주고 있으니 ‘전’ 남편이라고도 할 수 없는 동보가 캐내려 혈안이 된 금수 씨의 전화번호.
지금 금수 씨가 사는 집과 드래곤 팔레스는 아직 동보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델리 바이트는 금수 씨 동생 치수 씨가 집보다 더 오랜 시간 머무는 곳이라 가장 위험해야 할 텐데 현재로서는 가장 안전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델리 바이트로 찾아온 동보가 금수 씨 있는 곳을 대라며 냉장고 앞에서 치수 씨 목을 조르는 것을 주향이 계산대에서 CCTV로 보았다. 주향은 누렁이가 가게 보안상 창고에서 키우는 진짜 개, 핏불 ‘찰스’를 풀었다. 찰스는 누렁이도 가끔 무는, 한 마디로 주인도 몰라보는 개인데, 어떤 영문인지 금수 씨 남매에게만큼은 순종적이었기에 치수 씨의 목을 조르는 동보를 보고 찰스의 눈에서 실제로 불꽃 같은 게 튀더라고. 나중에 주향이 푼 현장 목격담이었다.
찰스가 동보의 드러난 발목을 ‘어그적’하고 물 때 날카롭고 긴 개 이빨이 사람 뼈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는데 주향은 그게, 찌는 여름날 얼음 조각 씹을 때 소리와 비슷하더란 말까지는 굳이 할 필요 없었다고 멋쩍어했다.
금수 씨가 치수 씨에게서 휴대폰을 받아 들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하듯 속삭이는 주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언니, 가게에 한 번 들러요. 될수록 빨리요. 꼭 보여드릴 게 있어요.


손님이 많아 한참 분주한 1시 무렵, 5번 테이블 손님이 금수 씨를 찾는다고 매니저가 알려왔다. 오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겠다고 해서 안 된다고 했더니 막무가내로 앉더란다. 5번 테이블 쪽은 가림막이 있어 메인 홀에서는 보이지 않았고 금수 씨 담당도 아니어서 금수 씨는 손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금수 씨를 찾는 이유는 전에 들렀을 때 받은 서비스가 인상에 남았기 때문이라고. 중년의 남자라고 했다.
금수 씨가 맡은 2번 테이블 손님이 필요한 게 있는지 손을 드는 게 보였다. 매니저가 대신 그쪽으로 움직이며 금수 씨에게 빨리 5번으로 가보라고 손짓했다. 대충 달래서 작은 테이블로 옮겨 앉게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금수 씨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님이 찾는다고 할 때부터 심장이 저 밑으로 떨어져 요동치는 바람에 배가 다 아파졌다. 금수 씨는 입술을 안으로 힘주어 말아 넣고 5번 테이블로 들어가는 벽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동보는 금수 씨를 보고 손을 번쩍 들었다. 한 테이블 건너에 앉은 백인 손님 중 하나가 젓가락으로 로메인을 길게 들어 올리다가 동보 쪽을 쳐다보았다. 그걸 시작으로 등을 보이고 앉은 손님도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동보가 그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리자 고개도 시선도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금수 씨가 동보 곁으로 다가가 섰다. 동보가 턱을 까딱하며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금수 씨는 직원은 손님 테이블에 앉지 못하게 돼 있다고 영어로 말했다. 조금 전 그 테이블에서 들어오는 시선이 금수 씨 옆구리에서 따갑게 느껴졌다.
동보가 그쪽으로 또 인상을 쓰면서 금수 씨의 손목을 잡아채듯 끌어서 자리에 앉히려 했다. 금수 씨는 얼른 그 손을 빼고 자세를 고쳐 섰다.

- What…would you order?(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입안에서 혀를 굴리는지 동보의 턱이 불거져 나왔다. 동보가 그 부위를 손으로 문지르며 픽,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한 번 푹 떨구더니 동보는 결심한 듯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복숭아뼈 위쪽으로 꿰맨 듯한 상처 자국이 나 있었다.

- 개 값 받으러 왔네. 주는 거 봐서 얌전히 돌아가든지, 아니면 여기서 개 춤 한 번 춰주고.
금수 씨의 주먹이 저절로 꼭 쥐어졌다. 동보에게 뺨을 맞거나 동보가 배드민턴 라켓을 휘두르는 걸 막다가 손가락이 부러졌을 때가 떠올랐다. 그게 이제 와 억울하다기보다 그러고 오 년이나 같이 살았던 자신이 새삼 어이없어서였다.
금수 씨는 코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뒤 긴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금수 씨는 입을 거의 열지 않고 복화술 하듯 동보에게 돈을 온라인으로 부쳐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일단 이곳에서 제발 나가 달라고.
동보는 금수 씨더러 돈을 갖고 집으로 오라면서 그러지 않으면 다음 날 여기 다시 와서 ‘개 춤’ 한 판 제대로 춰 보이겠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스토랑을 문을 밀고 나가던 동보가 빙글거리며 저만치 선 매니저에게 굳이 인사를 했다. 자신은 금수 씨 남편이고 금수 씨를 잘 부탁한다는 말도 했다. 동보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금수 씨는 그 옆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두 층을 걸어 내려가던 금수 씨는 어느 지점에서 계단 난간을 붙잡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볼이 터질 정도로 입안 가득 숨을 몰아 담고는 한동안 참았다가 일시에 쏟아냈다. 입안에 오래 머물러 뜨거워진 날숨과 함께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어린애처럼 소리 내며 울고 싶지는 않아서 금수 씨는 이를 세게 물었는데 그래도 이 사이로 소리 몇 가닥이 새어 나왔다.
금수 씨의 손이 유니폼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을 더듬어 꺼냈다. 눈물 몇 방울이 휴대폰 화면에 떨어졌다. 금수 씨는 얼른 손바닥으로 그걸 문질러 지우고 통화 기록을 보려 손가락으로 화면을 올렸다. 식구들부터 시작해 낯익은 이름들이 죽죽 지나갔지만 하나를 짚어 전화 걸 곳이 없었다. 그게 또 서러워지려는 순간, 금수 씨의 손가락이 뚝 멈췄다. 어쩐 일인지 눈물도 뚝 멈췄다.
한 달 전 네 시 무렵, 금수 씨에게서 나간 전화. 아버지의 번호였다. 금수 씨의 손가락이 그 번호를 톡 치니 아래쪽으로 동그란 전화기 표시가 나타났다. 금수 씨의 손가락이 그 표시 위에서 까딱거렸다. 아버지라고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예전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 안 나는 아버지에게, 다른 가족과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뭘 어쩌겠다고.
금수 씨는 폈던 검지를 주먹으로 밀어 넣었다. 문득, 아버지 얼굴 대신 더 떠올리기 쉬운 얼굴이라 그런지, 죽고 싶다고 말하던 아버지 등 뒤로 걸린 타이거 마스크가 떠올랐다. 여지없이 졸린 표정을 한…. 그때는 그걸 보고 용케 참았던 웃음이 이 와중에 피식 새 나왔다.
이제, 금수 씨는 눈물과 콧물이 섞여 진득해진 얼굴의 물기를 손등으로 닦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맡겨 놓은 돈을 좀 찾아두라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엄마에게 동보가 찾아왔고 그래서 ‘개 값’을 갚아야 한다고 설명할 때 금수 씨는 울먹이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쩐 일인지, 엄마는 돈을 찾아 놓지 않았다. 동보란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오그라든다며 해달라는 대로 그냥 다 해주고 목숨이나 보전하자던 엄마가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는 그저 돈 찾는 걸 잊었다고 했다.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절제할 때 의사가 기억에 관여하는 뇌 신경의 일부를 잘못 잘라낸 게 분명하다는 말을 이참에 엄마는 또 했다. 잊어버리고도 꿀릴 것 없다는 소리였다. 왜 그걸 잊었는지 따질 겨를이 없었다.
돈을 받지 못한 동보가 식당으로 쳐들어올 게 뻔해서 금수 씨는 새벽같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보에게 들킨 이상, 그곳에서 더 일하기도 글렀기에 몸이 아파 하루 쉬겠다고 말하면서 금수 씨는 벌써 서운해 목소리가 떨렸다.
마음 좋은 매니저가 목소리 상태가 안 좋은 걸 보니 많이 아픈가 보다, 혹시 코로나면 큰일이라고 말할 때 금수 씨는 울컥 목이 메었다. 금수 씨는 엄마가 돈을 찾아 놓지 않아서 동보의 집에 갈 수가 없었던 것인데 사실은 갈 필요가 없었다. 동보 역시 자기 집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자기 집 앞까지 가기는 했으나 집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병원에 실려 갔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경위를 금수 씨는 집에서 티브이 뉴스를 통해 알았다. 가게에 틀어놓은 티브이를 보던 주향이 기겁하고 빨리 뉴스를 보라고 금수 씨에게 알려 주었다. 뉴스에 나온 사건 현장은 일층이 피자 가게인 상가 건물로 그 이층에 동보의 원룸이 있었다. 건물 앞에 경찰차가 줄줄이 서 있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중에 몇 목격자들의 증언이 나왔다. 아시안 헤이트 크라임(Asian Hate Crime). 미국 내에서 아시안 헤이트 크라임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 뉴욕에서도 동보가 사는 P타운 부근이었다. 그러니까 동보가, 금수 씨는 말로만 듣던 아시안 헤이트 크라임을 당했다는 소리였다. 경찰 기자회견 장면에서는 자막이며 설명이 추가돼 금수 씨는 좀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술이 좀 취한 상태로 동보가 비틀거리며 집 문을 열려고 고개를 숙일 때 동보를 덮친 괴한이 있었다. 동보는 어깨뼈가 군데군데 으스러지고 팔이 어깨에서 빠진 상태로 널브러져 있다가 옆집 인도인에 의해 새벽에 발견되었다. 경찰은 전형적인 아시안 헤이트 크라임과 달리, 더 심각하고 복잡한 상해가 연루된 전혀 새로운 형태의 아시안 헤이트 크라임 사례가 나왔다고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아직 자세한 피해 정황은 알 수 없으나 경찰은 가해자가 동보의 목과 어깨 쪽을 무언가로 심하게 압박하면서 반항하는 피해자의 팔을 어깨에서 빠질 정도로 잡아당긴 것으로 추측했다. 이 정도 손상을 가하려면 대체 무엇으로 압박한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좀 더 과학적, 의학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그게, 육십이 갓 넘었지만 ‘신이 내린 장딴지’를 지닌 한 전직 프로 레슬러의 헤드 시저스에 의한 것일 수 있다고 추측하는 이는 금수 씨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제대로 증언할 상태가 못 되는 피해자가 그나마 한 말 중, 가해자가 쓰고 있었다는 마스크는 요즘 같은 팬데믹에 누구나 쓰고 다니는, 입만 가리는 마스크가 아니라 얼굴을 다 가린 타이거 마스크라는 것도.

엄마는 아버지를 찾았다는 말을 금수 씨에게 이미 했다고 우겼다. 치수 씨가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는 날을 기다렸다가 모처럼 다 모인 자리에서 했기에 분명히 기억한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내가 자몽을 먹고 있었잖아.”라고 할 때는 식탁으로 가서 거기 놓인 자몽을 들어 보이기도 했다.
금수 씨는 그때 엄마가 아버지를 찾았다고 한 게 아니라 찾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자 엄마는 반갑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서 찾았다’는 뜻이라고 했다. 찾아야 할 것 같아서 찾았고 그래서 찾았는데 뒷말을 생략한 것뿐이라고. 그 정도면 다 알아들어야 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금수 씨는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이제는 자식들을 만나야 한다고 엄마가 말했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엄마는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이 아니라 살아 ‘있으니’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며 ‘있으니’ 부분에서 음절에 맞춰 식탁을 세 번 두들겼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드래곤 팔레스로 온 게 우연이 아니라 엄마가 알려줘서 금수 씨를 일부러 보러 왔다는 이야기였다.

- 너는 아버지를 만나고도 왜 나한테 말을 안 했다니?

지난 이십 년간 아버지 사는 곳도 알고, 아버지에게서 생활비에 치수 씨의 다리 하며 엄마 수술 병원비까지 도움받아 놓고 말하지 않은 엄마가 할 말은 아니라고 금수 씨는 말하고 싶었지만, 하필 엄마가 꺼진 가슴을 문지르는 바람에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이 손 저 손 교대로 계속 가슴을 문지르면서 엄마가 풀어 놓은 이야기는 동보가 툭하면 금수 씨에게 주먹질하고 이혼도 안 해주면서 돈을 뜯어 간다는 걸 아버지에게 전했다는 내용이 아니었다. 당신이 동보의 집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엄마는 레슬링 이야기만 했다. 아버지가 미국에 와서 천신만고 끝에 프로 레슬러가 되었는데 얼마 못 가 프로레슬링 협회에서 제명당하고, 신분 문제로 추방당할 판에 아버지의 레슬링 코치였던 관장의 미망인과 재혼하고 그 덕에 미국 시민이 된 경위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지만 알아두면 나쁜 것 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별로 오래 말하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피곤하니 눕고 싶다며 안방 쪽으로 걸어갔다. 금수 씨는 빈 찻잔을 들고 싱크대로 가면서 역시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데 그냥 생각나 묻는다는 말투로, 아버지가 이겼냐고 물었다. 엄마가 보러 갔다는 그 시합에서…. 엄마가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아, 이겼다니까. 그래서 프로레슬링 협회에서 쫓겨났다고 좀 전에 말했는데 넌 뭘 들었다니?

금수 씨는 주향이 주인 없을 때 오라는 시간에 맞춰 델리 바이트로 갔다. 치수 씨도 거래처에 심부름 가고 없었다. 주향은 문 앞에 나와 금수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수 씨를 보자마자 주향이 금수 씨의 팔을 잡아끌다시피 해서 가게 홀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진열대에서 가격 라벨을 붙이고 있던 마구엘이 금수 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주향이 마구엘을 보면서 계산대를 향해 손가락으로 총 쏘는 시늉을 하자 마구엘이 바레, 바레 하면서 계산대로 향했다. 금수 씨가 창고 옆을 지날 때 안에서 찰스가 그르렁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문을 긁어대며 끙끙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금수 씨의 체취를 기억하는 게 기특해 금수 씨가 멈칫하자 주향이 아예 금수 씨 뒤로 와서 등을 창고 옆방 안으로 들이밀었다.
금수 씨가 일할 때는 늘 잠겨 있던 방이었다. 누런 상자가 온 벽을 가득 메우고 있어 발 디딜 틈 없는 방 한쪽에 철제 선반이 있고 그 위로 컴퓨터며 낡은 오디오, 비디오 재생기 같은 게 보였다. 주향이 고개만 빼고 문밖을 살피더니 문을 닫고 안에서 잠갔다.

- 내가 이 방 열쇠를 복사하느라 스파이 작전을 썼다니깐.

주향이 컴퓨터와 비디오 재생기를 켜고 거기 달린 둥근 레버를 이리저리 돌렸다가 마우스를 클릭하는 동작을 반복했다.

- 다들 내가 노래방 다닐 때 노래만 부른 줄 알지? 노래방 기기도 다 내가 만졌다니깐.

찾으려던 걸 찾은 듯 주향이 컴퓨터 모니터를 가리켰다.

- 많이 놀라지는 말아요, 언니. 언니는 알아야 할 거 같아서요.
모니터에 델리 바이트의 냉장고와 그 앞쪽 선반이 나타났다. 냉장고에 물건을 넣고 있는 사람의 옆모습은 치수 씨였다. 금수 씨는 한동안 모니터를 보다가 주향을 돌아보았다. 주향이 조금만 더 보라는 신호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런 주향의 표정은 자못 심각하기도, 자못 서글퍼도 보였다.
금수 씨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보내는 순간, 모니터 한쪽에 주인, 누렁이가 나타났다. 그가 걸어와 허리를 숙이고 있는 치수 씨에게 다가들더니 그 뒤에 섰다. 델리 가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정경에 여전히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몰라 금수 씨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다음 순간, 델리 가게 안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정경이 펼쳐졌다. 누렁이의 두 손이 치수 씨의 엉덩이에 철썩 가 붙은 것이다. 치수 씨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았다. 한 손으로 자기 엉덩이를 만지는 누렁이의 손을 밀쳤지만 다른 손으로는 여전히 냉장고에 물건을 들였다. 급기야 누렁이는 치수 씨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치수 씨 등에다 얼굴을 비볐는데 두 손은 어느새 치수 씨의 가슴에 가 있었다.
CCTV의 위치를 알고 있는 누렁이가 CCTV 카메라를 향해 정면으로 웃었다. 있는 대로 이를 드러내며…. CCTV가 구형이라 그런지 영상이 흑백이라 누렁이의 누런 이가 실제와 달리 하얗게 드러났다.
치수 씨는 모니터에 보이는 쪽 손에 1리터짜리 콜라병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냉장고 문을 짚은 채 가만히 있었다. 옆으로 서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서리쳐지는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란다는 듯, 체념한 몸짓이었다.

금수 씨는 자동차에 올라탔다. 화씨로 100도가 넘는 바깥 날씨에 있는 대로 달궈진 차 실내는 살을 태울 기세였다. 창문을 조금 열어놓지 않은 걸 후회하며 금수 씨는 에어컨을 틀었다.
냉매가 바닥났는지 바람이 나오는 기척이 없었다. 금수 씨는 에어컨 온도를 최저로, 바람 세기를 최대로 맞췄다. 폐차 직전의 차답게 위잉, 기계 섞인 바람 소리가 뜨거운 차 안을 채웠다.
금수 씨가 바람이 나오는 곳에 얼굴을 들이대려는데 조수석에 놓은 휴대폰에서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휴대폰을 열어 보니, 그새 주향이 문제의 영상만 편집해 보내온 것이었다. 결코 다시 보고 싶은 생각 없었으나 뭘 잘못 눌렀는지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금수 씨의 차가 대어진 지점에서 두어 블록만 가면 경찰서가 있었다. 하지만 금수 씨는 경찰에 신고할 생각 같은 건 하지 못했다. 그건 치수 씨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주변 사람들은 금수 씨의 식구가 경찰에 신고할 수 없는 처지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금수 씨 가족이 경찰에 신고하고 싶은 사람일수록 그걸 더 잘 알았다.
금수 씨는 영상 속 치수 씨가 가만히 서 있는 지점에서 멈춤을 눌렀다. 금수 씨가 손가락으로 휴대폰 영상을 확대했다. 그러나 화면이 커지는 대신 선명도가 흐려져서 여전히 치수 씨의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치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혹시, 치수는 죽고 싶어 하는 걸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와 같이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싶다고 하면 다들 우스워했다. 아버지와 헤어져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금수 씨는 아버지가 죽고 싶다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금수 씨에게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할 때는 숱하게 많았다. 그러나 적어도 금수 씨는 죽는 게 무서워 어떻게든 살아가려 하는 쪽이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무섭다는 뜻일 텐데,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무서운 사람은 어떤 얼굴을 지을까.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치수의 얼굴이 혹시 그런 얼굴인 건 아닐까.
흐릿한 치수의 얼굴 위로 아버지의 얼굴이 겹쳤다. 아버지의 얼굴도 치수처럼 흐릿했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던 아버지의 얼굴,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을 더 무서워하는 얼굴….
금수 씨는 죽고 싶다고 말할 때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이제야 들었다. 죽고 싶다고 말할 때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금수 씨는 아버지가 왜 죽고 싶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식구 중 누구도 그걸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
흐릿한 치수 씨의 얼굴 위로 흐릿한 아버지의 얼굴이 겹치고, 다시 그 위로 또 다른 얼굴이 겹쳤다. 아버지가 죽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금수 씨가 쳐다보던 얼굴, 타이거 마스크. 아버지가 자진해서 덮어쓰기라도 하듯, 아버지 얼굴 위에 타이거 마크가 씌워졌다.
타이거 마스크는 예전 벽에 걸려 있을 때와 표정이 달라졌다. 졸리던 표정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었던 구멍들마다 무언가가 채워졌다. 눈구멍 안에 바둑돌처럼 검은 눈동자가 박히고, 콧구멍 안으로 뜨거운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고, 입 구멍 안에 붉은 핏기가 감도는 입술이 들어앉았다.
밥상을 앞에 두고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앉아 있던 아버지, 아니 타이거 마스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몸을 날려 누군가를 쓰러뜨리고는 같이 누워 그 누군가의 목을 자기 다리 사이에 끼워 넣었다.
타이거 마스크는 발가락에서부터 서서히 힘을 모아 위로, 위로 끌어올렸다. 그 힘이 발등을 지나 발목을 지나 ‘신이 내린 장딴지’에 닿았다. 거기서부터는 억지로 힘을 쓰지 않아도 힘은 제힘으로 생(生)을 입어 더 위로, 위로 질주했다. 그 힘은 목적지에 닿아 무언가를 있는 힘껏 조였고, 감히 누군가의 생을 누르는 누군가의 날 선 비명이 좁고 어두운 아파트 복도에 울렸다.

자동차 안이 어느새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워져 금수 씨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금수 씨는 휴대폰을 바투 들고 전화번호를 뒤졌다. 그리고 찾은 번호를 저장부터 했다. 이름을 입력할 때,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아버지’로…. 금수 씨는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전화가 가는 신호음에 금수 씨의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로 올라와 둥둥, 박자를 맞추었다. 신호음 두 번에 딸깍, 전화를 받는 기척이 났다.

- 여보세요.
- 아버지.
잠깐의 정적.

- 너, 금수로구나.
- 네. 저, 금수예요. 치수 일로 상의드릴 게 좀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