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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글짓기 (중고등)] 대한민국과 나
작성일
2020.04.08

[글짓기(중고등) - 장려상]



대한민국과 나

 


정유진 / 중국심천


 

나는 자유로운 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인 것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 독립운동가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 민족에 일어난 크나큰 전쟁과 그 안에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조국의 오빠, 언니들이 하신 일들을 배우면서 그 분들이 나에게 대한민국 이라는 큰 상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그분들의 시체는 차디찬 낮 선 땅에도 있을 것이고 팔, 다리가 다르게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 몸을 다 찾지 못하고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니 지금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너무 많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지금 대한민국의 3.1 운동과.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수립에 대해 나의 생각을 몇 자 적었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에서 크고 작은 환란과 전쟁 속에서 나에게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3.1독립운동 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이 통치하고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억눌린 그 10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그 고통 속에서도 후손들을 위하여 결코 주저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무서워도 맞서 싸우고, 어렵고 힘들었어도 후손들을 위해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또한 다른 민족으로부터 우리가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주셨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나는 3.1독립선언서를 읽고 나서 우리 조상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 그리고 후손을 위한 그 뜨거운 사랑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굴하지 않는 그분들의 정신을 알게 되었고 그 마음이 어떠하였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수많은 명언을 찾아보았습니다. 나는 그 분들의 명언을 읽으면서 너무 벅차고 가슴이 아파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 모두 아는 운동가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손병희 선생, 강우규 의사, 우당 이회영, 유관순 열사, 등. 그 수 많은 운동가들의 명언, 한 번 읽었는데도 또렷이 기역이 납니다. 

 이번 기회에 처음 알게 된 독립운동가들도 있었고 이름은 알았지만 정확히 어떤 일을 하셨는지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며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게 되어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들의 용기와 정신과 똑똑함이 우리의 나라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민족성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디서든 한국사람은 똑똑하다고 말을 듣는가 봅니다. 

유관순 운동가는 그 때 당시 저보다 몇 살 많지 않은 17살의 어린 나이에 독립 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고문을 받아가며 기나긴 일년을 버티며 희생하셨습니다. 유관순 운동가는 18살 꽃이 필 나이에 이런 시련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고문을 당하며 말했던 명언이 있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은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한 마디에서 나는 수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유관순언니 독립운동가의 그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에 너무 놀랐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그 수많은 고문을 이겨낸 유관순 운동가의 정신을 말해 주고 싶습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중국 선전에 대한민국사람으로서 멋진 우리 나라를 알리고 싶습니다.

내가 우리 대한민국을 알릴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중국 학교 중2 우리 반에는 한국사람은 나 혼자입니다.

전에 남자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지난 학기에 싱가포르로 전학을 갔습니다.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없으니 갑자기 나는 혼자인 기분이 들었습니다.

별로 친한 것도 아니 였지만 나랑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 있고 업고는 내 마음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라에 대한 불편한 말을 들었을 때 나 혼자 그 많은 친구들을 대항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옆에서 가만히 있었어도 우리나라 친구가 있을 때는 어떤 말을 해도 눈치를 보지 않았었는데 ….

서럽고 억울했지만 당당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나도 나라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에 대해 책으로만 봤던 세종대왕 정도가 내 지식의 전부여서 입을 벌려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있을 때는 화장실 가서 억울해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엄마, 아빠랑 많이 대화를 합니다. 

우리가 이 곳에서 살고 있는 건 나라에 애국하는 것이라고 아빠는 말씀 하셨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착하게 사는 것도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엄마는 말씀 하셨습니다. 

동생이 초등 5학년 때 일입니다. 동생은 학교에서  4학년인 남자아이가 복도에서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너 한국사람이지? 왜 여기서 공부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 라고 말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동생은 태권도로 목 조르기를 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말 하면 가만 안 둔다고 엉덩이도 한방 날렸다고 합니다. 동생은 마르고 빨라서 내가 보진 않았지만 그 아이는 아마도 무지 많이 아팠을 거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그 어린 아이가 뭘 알고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아이는 부모가 하는 말을 들어서 이겠지요. 어른들이 더 큰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잘했다 내 동생!  그 후로 동생은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태권도는 우리의 전통 운동이고 나를 방어하는 운동이라고 어머니께서는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4년째 배우고 있습니다.

태권도에 한 동안 태극기가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와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어서라고 들었습니다.

동생은 국기경례로 시작하는데 항상 밖을 보았습니다. 억울했습니다.

태극기는 우리나라 운동인데 왜, 왜, 왜? 

그래서 우리가족은 이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년을 태권도장에 갈 때 마다 태극기를 달아 달라고 항의를 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만 했지만, 갈 때 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우리 가족은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태권도에 태극기가 없다면 그 정신은 뭐 하러 외우냐고 말했습니다.

2018년 10월 너무 행복했습니다.

태권도장 중앙에 태극기가 달려 있었습니다. 일 년 만에 있어야 곳에 자랑스럽게 있었습니다.

새로 단 거라 깨끗하고 보기 좋았습니다.

우리가 이꼈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와서 우리 가족은 정말 잘했다고 더 열심히 살자라고 말했습니다.

동생이 다니는 태권도장 말고 다른 지점에 있는 태권도장은 지금 현재 2019년5월인데 아직도 태극기가 달고 있지 않습니다.

승급 시험이 있을 때마다 다른 도장으로 저희 가족 네 명은 모두가 같이 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국인이고 태권도 정신을 말해주고 싶어서 입니다. 

또한 태극기를 이 도장에도 꼭 달아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직까지 태극기를 붙인 모습은 볼 수는 없지만 언젠가 이루어질 그 날을 위해 태권도를 끝까지 동생은 배울 것입니다.

그 날까지 우리 부모님은 늘 따라 다니실 겁니다.

하루 빨리 대한민국의 정의로운 모습을 이곳에서도 알고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저 태극기를 달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태극기가 달렸을 때 그 기분이 얼마나 좋았을지 상상이 됩니다.

그 태극기를 흔들면서 소리 치셨을 “ 만세 만세,만세 “

감격이 얼마나 크셨을까요?  그 태극기를 보기 위해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무서운 것도 없으셨겠죠!

유관순 언니는 혼자서 그 무서운 일본 아저씨들한테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작은 다툼이 있을 때마다 나한테 피해가 올까 봐 걱정하고 숨죽이며 조용히 지냈던 때가 생각나서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누구나 부모가 있고 친구가 있습니다.

유관순 언니도 가족이 있겠죠?  언니의 어머니는 얼마나 마음이 찟어지고 속상했을까요?  나는 조금만 아파도 엄마가 와서 약 발라주고 조금만 힘들어도 때 쓰고 신경질을 부리곤 했습니다.

 

이제 부터 나는 혼자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내 뒤에는 작고 커다란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사람으로 지금 이 현실에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런 나를 유관순 언니가 보고 있다면 뭐라 말했을까요?

“ 유진아! 너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국민이야. 작은 나라지만 우리는 힘이 있고 깨끗한 정의로운 민족이란다. 어디서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게 나라를 사랑하는 거야. 어느 나라에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날 줄은 우리도 잘 모르는 일이야. 어떤 사람은 대한민국을 비판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대한민국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넌 너무 잘하고 있어. ” 이렇게 말해 줄 거 같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지 일 년이 되어 갑니다. 한 방에 네 명이 생활을 합니다. 문화적인 생활 방식과 습관 때문에 너무 힘듭니다. 하지만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참으려고 합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럴 때면  힘들어서 침대에 이불을 덥고 소리 죽여 울었습니다. 다른 아이들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감옥에서의 생활을 배우고 알고 나서는 나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강한 민족입니다. 그 정신은 나에게도 있다고 믿습니다.

 

안중근 운동가는 우리가 다 알다시피 이토히로부미 에게 폭탄이든 도시락을 던지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하얼빈 공원에 묻어 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을 쓸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이 말씀에서 나는 무언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그 명언 속 깊은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지켜 나가자고 말하는 거 같습니다. 나는 그분들의 후손이니 나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늘 생각하면서 기 죽지 않겠습니다.

안중근 운동가의 어머니 조 마리아는 아들 안종근 의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어느 어머니가 자식에게 죽으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의 깊은 뜻에 순종하고 결국 나라를 위하여 순국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는 모자 지간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저런 말을 쓸 수 있을까요? 

 

‘죽으라….’ 그 말을 쓸 때 몇 천 번을 지우고 싶었을까요?  긴 말 없이 그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었을까요?

죽으라, 죽으라, 죽으라,

공부가 힘들고 세상 속에 실망이 커질 때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사춘기 때 겪는 아픔과 고통일 줄 압니다.  조 마리아가 자식한테 쓰는 죽으라는 말은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과 너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잠시나마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나약한 내가 이런 어리석은 내가 미안하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엄마한테 조 마리아에 대해 말씀 드렸더니 조용히 가슴으로 우셨습니다. 자식이 죽을 것을 알면서 죽으라고 한 다는 건 부모가슴에 큰 못을 박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마음이 어떤지 백 프로 알지 못합니다.

언젠가 어른이 되어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나면 그땐 알겠지요?

하지만 뭔지 모르게 무지하게 슬펐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다가 팔이 다쳐서 기브스를 보름 동안 했습니다. 그때 아픔보다 더 아프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나에게는 장난꾸러기 말 안 듣는 잘생긴 남동생이 있습니다. 그 아이가 안중근 의사와 같은 상황 이라서 죽을 거라 생각만해도 정말 미칠 거 같습니다.

매일 싸우고 다투어도 난 내 동생이라 너무 좋고 사랑합니다.

 

몇 년 전에 올림픽 경기를 할 때 였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운동이였습니다. 우리 선수들과 다른 나라 선수들의 시합이 있었습니다.

예능을 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경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왜 보는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한 경기, 한 경기 볼 때 마다 지면 같이 슬퍼지고 이기면 같이 환호 했습니다.

세상에서 축구경기가 이처럼 재미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빨간 옷을 입고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짝짝짝 짝짝 ….”

한 목소리였습니다. 누구 하나 틀리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소리 치는 게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소리질러도 질러도 목이 아프지 않았습니다.

이기든 지든 눈물이 나왔습니다.

왜 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나라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왜 눈물이 뜨겁다고 표현하는지 알았습니다. 우리나라 말은 정말 아름다운 표현이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줄임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알지 못하는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가족은 일년에 한 번 여름 방학에 대략 한달 정도 한국에서 생활합니다.

외 할머니 집은 종로에 있습니다. 

경북궁은 맛있는 음식이 많은 동네로 기역 했습니다.

역사박물관에서는 그냥 옛날 물건이구나 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전쟁기념관에선 그냥 영화보고 탱크 구경하고 나왔습니다.

엄마, 아빠가 설명해주는 말들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2019년 이번 여름방학에 한국에 가면 이제는 그냥 대충 보지 않겠습니다.

그 소중한 역사와 시간을 잘 듣고 배워서 오겠습니다.

나보다 어린 동생들과 언니, 오빠들에게도 알려주겠습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100일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충무로에 있는 삼성제일병원에서 조금 작은 아기로 태어나서 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치료로 지냈다고 들었습니다.  

폐와 눈이 다 완성되기 전에 태어나서, 태어나자마자 엄마와 따로 분리되어 입원했다고 합니다.

그런 나를 이렇게 건강하고 예쁘게 만들어준 최고의 병원이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세계최고의 의학을 가진 나라가 우리 나라라고 합니다. 

너무 대단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엄마는 한국가면 여러 장소를 네이버로 검색하십니다.

중국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한국의 역사적인 장소에 찾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눈으로 보고 얼마나 대단한 민족인지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작고 인구도 적지만, 세계 큰 나라들이 함부로 건들지 못 하는 건 그 동안 나라를 사랑하고 아꼈던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 이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한국 역사를 배우진 않지만 그 분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죽으면서까지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5 학년 때 유관순 언니의 마지막 감옥생활을 했었던 서대문 형무소에 갔었습니다. 그날 아침 나와 나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은 너무 졸렸습니다. 그래서 밖에 나가기 싫었습니다. 동생도 안 나간다고 난리를 폈습니다.

엄마는 맛 있는 거 사주신다고 저희를 꼬셨습니다.

광화문 뒤쪽에 조그만 골목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설렁탕 집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 였는데, 오래 전부터 먹었던 맛처럼 느껴졌습니다. 엄마, 동생, 나는 혹시 남길 까봐 설렁탕 두 개만 시켰습니다.  그런데 너무 맛있어서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어 버렸습니다.

주인 할머니는 어린 아이들이 너무 잘 먹는다고 칭찬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장사하면서 잘 먹어주는 손님이 제일 예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부엌에 가시더니 하나를 새로 시킨 것처럼 서비스로 설렁탕과 밥 한 공기를 들고 와서 다시 주셨습니다.

아! 이게 한국의 정 인가 보구나! 

우리는 배도 불렀지만 마음이 더 많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엄마 손에 끌려서 억지로 서대문 형무소로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그때 난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3.1 운동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 형무소에 있는 고문 기계를 떠올리며 정말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로 고문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인형 형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참 무서웠습니다.  손톱을 뽑고 있는 인형모형을 볼 때는 동생과 나는 멀리 도망 쳤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곳은 그냥 나에겐 하나의 장소로만 생각했습니다.

최고의 고문은 잠을 재우지 않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건 진짜 힘듭니다.

감옥을 지나칠 때는 조금 놀랐습니다. 에어컨도 없고 작은 방에 가득가득 사람들을 넣고 씻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루에 두 번씩 샤워를 합니다.

냄새가 나는걸 너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 감옥 안에는 작은 화장실도 있었습니다.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방에 같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더럽고 냄새가 났을까요?  벌레랑 같이 생활하고 누워지내며 사람이 누워있을 자리도 없었다고 합니다. 

너무 놀랬던 건 벽에 있는 손톱 자국이었습니다. 독립 운동하시는 분들이 그 안에서 너무 괴로워서 손톱으로 긁었던 자국이라고 들었습니다. 핏 자국도 보였습니다.

어떤 기분일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나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안에 유관순 독립운동가의 손톱자국도 있겠지요!

어떤 곳은 혼자 들어가서 앉지도 못하고 종일 서있기만 해야 하는 감옥도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엄마한테 혼나서 서서 벌을 밭을 때가 있었습니다. 한 시간도 힘들었는데 몇 일 몇 밤을 서서 지내는 건 죽는 것 보다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유관순 언니의 힘들고 지쳤을 때 하신 말씀 중에 명언이 생각납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이 글을 떠올리면서 그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다리가 아프고 그 고통이 심했을까요?

감옥 뒤쪽으로 가다 보면 왠지 슬퍼 보이는 커다란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를 지나면 동굴처럼 생긴 곳이 보였습니다. 그 곳이 사형장이라고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두려움을 그 나무를 볼 때마다 매일 느껴야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나라를 위해서 고문을 당해도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분들을 나는 지금 너무 존경합니다.

 

그때에 살았던 일본 사람들은 참 잔인하다고 생각합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화나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 내가 살고 있었으면 나는 아마도 일본사람들 앞에서 대한민국 이라는 이름은 꺼낼 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 무서워서 말도 못 할 거 같습니다.

지금 내 주위에 일본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러면 안되지만 그 친구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납니다. 마음 같아선 그 일본친구에게 일본인이 이렇게 잔인한 사람이라고 알려주고 싶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인이 일본사람한테 고문당하고 그 무서운 환경에서 살아갔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지금 중학교 2학년까지 중국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몰랐는데 중학교부터는 대한민국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고 한국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중국친구들이 한국을 나쁘게 이야기할 때면 속이 상하고 너무 가슴이 아프고 억울했습니다. 

내가 한국에 살았으면 이런 말을 안 들어도 되는데……

하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한국인입니다.

나는 우리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가슴속에 칼을 품은 정신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나는 대한국민의 정신을 전 세계에 알릴 것입니다.

그들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이름을 들을 때 그 정신에 감탄하게 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한국인의 정신을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1919년 중국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 임시정부인데 왜 중국 상해에서 만들었을까요?

나는 궁금해서 자료를 한 번 찾아 보았습니다.

찾아보니 임시정부가 상해에 가서 수립한 것은 상해가 당시에 일본의 군사력이 뻣치지 못하는 국제 도시였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일본군이 오지 못하는 곳이라 그곳이 최선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슬프고 힘든 일 입니까? 내 나라, 내 조국을 두고 다른 곳에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가족을 잃어 버린 기분처럼 처참 했을 거 같습니다.

모여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 했을 것입니다.

이 전에 우연히 한 영화를 본 기역이 납니다. 제목은 기역이 잘 안 나는데,

한국사람이면서도 중국어로 말해야 하고 사람들 눈치 보면서 도망 다니는 장면이 떠 오릅니다. 

나라가 없으면 저런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구나!

나라가 없으면 비겁하게 살아야 하는구나!

나라가 없으면 모국어라는 것도 없구나!

나라가 없으면 가족도 친구도 보호해 줄 수 없구나!

나라가 없으면 공부라는 것도 할 수 없구나!

나라가 없으면 나란 존재도 없는 거구나!

지금 난 얼마나 행복 한지 다시 한 번 나라를 사랑하고 목숨을 바치신 분들께 머리숙어 감사 드립니다.

나는 지금 그 분들이 임시정부를 세웠던 중국이라는 땅에 살고 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대부분이 한국사람을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K-POP 영향이 큰 거 같습니다. 우리 학교 친구들도 한국노래는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한국노래가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간단한 한국말들은 알아 듣는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드라마도 많이 보셔서 한국말을 제법 잘 합니다.

이게 우리나라 입니다. 자랑스런 대한민국 입니다. 너무 너무 좋습니다.

 

우리가 이런 끈기 있고 강인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존중해 주는 건 아닐까요?

나는 상해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가 보려고 하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임시정부 수립한 곳도 가보고 싶고, 나라를 위해 일하시고 목숨을 버리신 분들이 어떤 모습인지도 보고도 싶고 더 많은 우리나라의 역사에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여기 심천에는 한국주말학교가 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6년을 특별한 일 아니면 빠진 적이 없습니다.

중학교 때도 학업적인 문제로 고민도 했지만 한글은 우리가 배울 곳이 여기 말고 없기 때문에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또한 칭찬으로 나를 늘 아껴주시는 이주영 선생님이 계신 곳 입니다.

3학년 때 나는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었습니다. 어려운 중국어와 영어, 학교 공부에 조금씩 재미를 잃어갈 때 였습니다. 선생님은 나 한 테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같은 언어로 칭찬과 공부에 대하여 재미를 알게 해주신 선생님이 너무 고맙고 감사합니다. 지금도 그 분이 한글학교 중학교 선생님 이십니다.

솔직히 중학교는 시간도 없고 중국학교 숙제도 많아서 한글학교는 다니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물론 학비도 안 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선 와서 같이 공부하자고 학비는 나중에 내도 된다고 하루만이라도 수업해보자고 직접 연락을 주셨습니다.  나는 하루만 가보고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중학교에 와서 한국역사와 한국사회를 더 많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만 다닌다는 내 생각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내 나라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나라 역사와 사회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와서 엄마한테 등록해 달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선택했다 생각합니다.

내 평생을 외국 생활 하면서 그냥 하루하루 학교성적과 중국학교 잘 다니는 것만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 부끄럽기 시작했습니다.

안중근이 누구인지 몰랐던 내가 너무 멍청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관순이 17살에 독립운동을 하며 고문도 받으며 감옥살이를 했다는 것을 몰랐던 내가 부끄럽습니다.

 

나는 3.1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읽어 내려갔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쓰면서 얼마나 간절히 나라를 찾고 싶었을까요?

독립선언서를 만들고 찍어내면서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요?

독립선언서를 돌리면서 가족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그 모든 생각을 잊게 만든 것이 나라에 독립을 꿈꾸는 한가지 마음들이 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도 모르게 읽으면서 점점 마음이 아프고 찌릿거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선언서를 읽고 있는 그 장면을 떠 올려 보았습니다.

내 눈에서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한 마디 한마디에 불 같은 정신으로 선언을 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읽으면서 쓰여있는 한 글자 글자 마다 내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독립선언서의 내용은 우리가 조선의 주인이다라고 말 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에게는 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권리가 있는 그런 나라임을 선포합니다. 

우리민족은 더 높이 자유롭게 발전할 것이며 정당한 권리가 있다라고 선포 하였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습니다.

한글은 유치원과 일주일에 토요일 한번 가는 한글학교가 전부 입니다.

처음에 글을 시작할 때 쓰지 못할 꺼라 생각했습니다.

500글자를 넘기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배우고 찾아가면서 하고 싶은 말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알아 가는 기쁨도 생겼습니다.

예전에 어릴 때 나를 생각하면서 그때는 그랬었지 추억도 떠 올렸습니다.

내가 태어났던 내 나라 대한민국이 정말 대단하고 위대하다는 걸 가슴에 세기게 되었습니다.

작은 땅에서 참 대단한 분들이 많이도 나왔구나!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 나라 국민인 것이 지금 나에게 너무 큰 기쁨입니다.

중국어랑 영어는 문장이 한글과 달라서 글을 완성하는데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배운 한글이 많이 있음에 나에게 놀라고 또 감격스럽습니다.

부족한 한글을 이어가면서 우리나라 말에는 아름다운 표현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이 글을 3주 동안 써내려 갔습니다.

수 십 번 반복해서 읽고 쓰고 지웠습니다.

가족들과 대화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엄마랑 대화하면서 사춘기로 힘들게 했던 부분이 생각나서 죄송했습니다.

대한민국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너무 좋은 시간을 보낸 거 같아서 저한테 칭찬을 해주고 싶습니다.

우왕좌왕하면서 글이 쓰인 곳도 많이 있지만 끝까지 완성되어 정말 뿌듯합니다.

나는 또한 외치고 싶습니다.

 

“ 대한 독립 만세 만세 우리 나라 만세 만세”

 

나는 언제까지 중국에서 생활할지 어쩌면 더 먼 나라로 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잊지 말고 살아야 할 태극기를 가슴에 그리면서 항상 기역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