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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주목한 화가 고암(顧菴) 이응노
작성일
2020.09.24

프랑스가 주목한 화가 고암(顧菴) 이응노

장르와 소재를 넘나드는 끊임없는 실험으로 한국 미술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고암(顧菴)이응노 그는 전통성과 현대성을 아우른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는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190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응노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꿈을 이루고자 19세에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그는 서화계 거장 '해강 김규진'을 찾아가 문인화와 서예를 배웠습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하며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58년, 그의 나이 55세 때 대학교수로서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세계 예술의 본고장 프랑스 파리로 향한 것입니다. 이응노는 입선 이후, 대나무를 잘 그리는 화가로 이름을 떨치며 '죽사(竹史)'라 불렸다.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상작 이응노의 '청죽(靑竹)'

가난에 쪼들려 물감도 살 수 없었지만,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잡지를 찢어 붙여 작품을 만드는데 몰두했습니다. 여리게 동양적인 요소인 수묵이나 담채를 활용해 실험적이고 새로운 콜라주를 선보였습니다. 1962 캔버스 천 위에 종이 콜라주 1961 천 위에 한지 콜라주 1962 캔버스 위에 종이 콜라주 "어릴 때 가난하게 보냈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것은 뭐든지 재료가 되었습니다. 농사일하면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나뭇조각을 깎아 조각하고..."

하지만 독자적 작품세계로 이름을 알리던 어느 날 그는 한국전쟁 때 북으로 간 아들을 찾으러 동베를린에 간 것이 화근이 되어 동백림 사건(동베를린간첩단사건)에 연루되고 말았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이 살아있고, 만나게 해주겠다는데 어떻게 안 가봅니까?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구속된 이응노 화백의 법정에서의 모습

감옥에 갇힌 그에겐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재료로 삼아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것은 나에겐 죽음과도 같다."

간장으로 화장지에 데생을 하는가 하면, 매일 밥알을 아껴 신문지에 개어 조각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의 명작으로 극찬 받는 작품 <구성>은 이러한 방식으로 탄생했으며 그는 2년 6개월 동안 무려 300여 점의 '옥중화'를 남겼습니다. 나무 도시락에 먹다 남은 밥풀과 고추장, 간장을 발라 색을 입혔다. 고암의 옥중 도시락 콜라주 작품 <구성>

남북 분단, 한국 전쟁, 정치·경제적 혼란기 등 유난히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겪은 그는 작고하지 10년 전부터 사람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군상>은 평화 속에서 서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갈망하는 그의 염원이 담긴 작품입니다. 익명의 군중이 서로 어울리고 뒤엉켜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을 나타냈다. 1986 <군상>

석방 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현지에서 작품활동을 이어온 이응노는 1989년 고국에서 열린 회고전 기간 중에 프랑스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습니다. 그의 예술세계가 담긴 독창적 작품들은 현재 이응노 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 세계 각국에 전시되어 우리의 삶과 문화를 한층 풍성하게 채워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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