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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함께 읽는 인물 ]최봉설, “15만원탈취사건” 유일한 생존자
작성일
2021.11.30

최봉설, “15만원탈취사건” 유일한 생존자


최봉설崔鳯卨은 연길 와룡동에서 출생한, 이민2세이다. 그는 이주조선인 사회의 지도자는 아니고, 중요한 위치에 처한 중견인물도 아닌 충실한 실행자에 불과하지만 그를 통하여 우리는 북간도조선인사회의 가장 중요한 비밀단체인 철혈광복단, 그리고 당시 이민 조선인사회의 가장 큰 군자금모금 관련 사건인 15만탈취사건의 진정한 모습에 가장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봉설은 중요한 인물이다.


만년의 최봉설  “15만원탈취사건” 유일한 생존자이다.   1973년 연금생활 중 침켄트시에서 사망했다.

만년의 최봉설  “15만원탈취사건” 유일한 생존자이다. 

1973년 연금생활 중 침켄트시에서 사망했다.


최봉설崔鳯卨(1897-1973), 호는 이붕以鵬, 별명은 최계립崔溪立, 북간도 용정 지인향 와룡동(현 연길시 와룡촌)에서 농민 최문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세기 중엽 함북 회령에서 최종석崔宗锡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이주하여 민흥촌 상발원에서 소작농으로 있다가 와룡동에 들어와 화전농사를 지으면서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1883년에 이르러 화룡동에는 8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을 형성하였다. 최종석은 15만원탈취사건 주인공인 최봉설의 조부이다.


철혈광복단의 가장 걸출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 15만원탈취사건, 그 기념비석이 현재는 사건 현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2003)

철혈광복단의 가장 걸출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 15만원탈취사건, 

그 기념비석이 현재는 사건 현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2003)


마을에서는 서당을 이어가던 중 신식교육을 목표로 학교후원회가 설립되었고 이들의활약에 힘입어 새 교사가 세워지고 1908년 와룡동에 "창동소학교"를 창립했다. 4년 후에는 중학교를 설립하고 교명을 "창동학원"으로 개명하였다. 독립과 자유에 기반을 한 후대양성에 취지를 두었다. 졸업생 중 많은 이가 왕청 나자구사관학교에 전학했다.


최봉설은 1904년부터  8년간 창동학교를 다녔다.  


창동학교 후생들이 세운 사은비.   연길시 소영자향 민주촌 민흥 3대와 4대 사이의 산 서쪽비탈의 와룡동에 세워졌다. 총 높이 1.87m, 비석은 시멘트 기초에 세워졌다. 롱대석은 화강암으로 되었으며 길이 90cm, 너비 59cm, 높이 15cm이다. 비석몸체와 개두석은 흰 돌로 만들었다.

창동학교 후생들이 세운 사은비.  
연길시 소영자향 민주촌 민흥 3대와 4대 사이의 산 서쪽비탈의 와룡동에 세워졌다. 총 높이 1.87m, 비석은 시멘트 기초에 세워졌다. 롱대석은 화강암으로 되었으며 길이 90cm, 너비 59cm, 높이 15cm이다. 비석몸체와 개두석은 흰 돌로 만들었다.


최봉설은  와룡동 창동학교 졸업후 명동중학교 입학, 왕청 나자구군관학교를 다녔으며한때 창동학원  부속소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었다. 명동에 이주한 4대 가문 중 한분인 김하규金河奎 장로가 최봉설의 장 인이니 문재린(문익환 목사의 부친)과 최봉설은 친동서가 된다. 즉, 최봉설의 부인 김신희金信姬는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 김신묵金信默의 친언니이다.

최봉설이 공부하고 근무했던 창동학교는 북간도에서 용정 명동학교에 뒤지지 않는 독립투사 양성의 요람이었다. 간도지역의 가장 큰 반일단체 간도국민회의 외곽조직인 간도대한청년회는 본부를 창동학교에 두었으며 초대회장은 창동학교 교원 서성권, 부회장은 강백규였다. 간도청년회는 창동학교를 거점으로 적극 활동했다.

1919년 초,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 참가 비용을 간도지방에서도 모금하게 되었고 1월 말 모금위원회가 성립되었다. 와룡동 위원에 창동학교 교원 정기선郑基善,정기영郑基英 형제와 최이봉崔以鹏 즉 최봉설이 당선되어 모금에 전력했다.


기선 추모비 원경     연길시 와룡동 민흥 3대 위치, 정기선의 형 정기천이 1940년 4월 5일 세웠다.  1920년 10월, 일제는 2만 명 정규군을 동원하여 봉오동, 청산리 전투 참패의 보복으로 간도에서 대규모 “토벌”을 감행, ‘장암동학살사건’, ‘의란 구학살사건’, ‘송인동학살사건’ 등 참상을 빚어냈다. 일명 "경신년토벌",토벌과 살육은 12월 20일까지 간도전역에서 자행되었다.

정기선 추모비 원경   

연길시 와룡동 민흥 3대 위치, 정기선의 형 정기천이 1940년 4월 5일 세웠다.

1920년 10월, 일제는 2만 명 정규군을 동원하여 봉오동, 청산리 전투 참패의 보복으로 간도에서 대규모 “토벌”을 감행, ‘장암동학살사건’, ‘의란 구학살사건’, ‘송인동학살사건’ 등 참상을 빚어냈다. 일명 "경신년토벌",토벌과 살육은 12월 20일까지 간도전역에서 자행되었다.


정기선 추모비      정기선郑基善(1894-1920)은 와룡창동학교 졸업, 구수하 신흥동에 자리잡은 봉명鳳鳴학교 교원, 일본군은 그의 두 눈을 도려내고 얼굴을 난도질 하였다. 해방 후 혁명렬사로 추인되었다.

정기선 추모비    

정기선郑基善(1894-1920)은 와룡창동학교 졸업, 구수하 신흥동에 자리잡은 봉명鳳鳴학교 교원, 일본군은 그의 두 눈을 도려내고 얼굴을 난도질 하였다. 해방 후 혁명렬사로 추인되었다.


1919년 3.13반일시위에 창동학교 사생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행렬 제일 앞에 섰다가 조난당한 박문호는 창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3.13반일시위 후 와룡동과 적암평赤岩坪 (현 인평촌 동쪽)이 반일운동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1919년 2월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개최한 한족대표자회의에 정재면과 함께 참석하고 귀국 중 김약연은 일제의 눈을 피해 십여일 동안 몸을 피신한 곳도 창동학교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조선족민보"를 출간했다. 그리고 3월 31일, 김약연은 와룡동에서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최봉설은 북간도 비밀결사대인 철혈광복단 단원이다. 철혈광복단의 많은 골간들이 창동학교 교원과 학

생 출신들이다. 최봉설 외  서성권, 정기선, 정기영, 림국정, 한상호 등이다.


최봉설이 쓴 “철혈광복맹세铁血光复盟誓”  친필, 1914년  8월 10일자로 적혀있다.

최봉설이 쓴 “철혈광복맹세铁血光复盟誓”  친필, 1914년  8월 10일자로 적혀있다.


철혈광복단은 1914년 간도 나자구사관학교 출신인 남공선南公善(이명 남성우南性祐,1988-1924, 건국훈장 독립), 김립, 장기영张基永(张基荣, 1890-?), 김하석金夏锡, 오영선 등을 중심으로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등 수십 명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이며 1919년 2월 18일 조선독립의사회를 건립하고 노령지역과의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면서 진일보 확충되었다는 것이다.


최봉설과 임국정(1919.09). 함께 무기 구입을 위해 해삼위에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최봉설과 임국정(1919.09). 함께 무기 구입을 위해 해삼위에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철혈광복단은 15만원탈취사건 주역들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의 직접 지도자는 전일이었다. 이들 모두 이동휘를 따르던 기독교신자이다. 철혈광복단은 나중에 북로군정서에 귀속되었다고 한다. 철혈광복단 주요 인원들이 북로군정서에서 활약했었다.


최봉설의 옛집,   연길 소영진 민주촌 제10촌민소조에 위치, 15만원을 탈취한 후 이 집에서 이곳에서 돈을 재정리하고 휴식 후 다시 이란구 방향으로 움직이었다.  이종국(72)의 증조부가 이 집을 산 후 1958년까지 사용하다가 대약진 때 집체식당으로 썼다. 1969년 촌민 김영숙 씨가 들었으며 1980년대 말 3-4년은 비어 있었다. 지금은 집터만 남아있다..

최봉설의 옛집

연길 소영진 민주촌 제10촌민소조에 위치, 15만원을 탈취한 후 이 집에서 이곳에서 돈을 재정리하고 휴식 후 다시 이란구 방향으로 움직이었다.  이종국(72)의 증조부가 이 집을 산 후 1958년까지 사용하다가 대약진 때 집체식당으로 썼다. 1969년 촌민 김영숙 씨가 들었으며 1980년대 말 3-4년은 비어 있었다. 지금은 집터만 남아있다.


최봉설은 독립구 군자금 모금을 위한 15만원탈취사건 중 유일한 생존자이다. 15만탈취사건 중 신한촌에서 일본군 포위에서 탈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온몸이 얼어들었고 상처 투성이였다. 그는 당시의 처참한 사연을 훗날 글로 남기었다.


---최봉설이 남긴 글 ---

다시 정신을 차리어 채계복이네 집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었소. 복도 첫 간에는 이혜근이라는 처녀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애국여사이고, 당시 신한촌 애국부인회 회장이었소.
그는 내 음성을 듣고서 두루시만 입고 문을 열어주었소. 그 집에 들어가서 상에 척 앉고 나니, 사람이겠소? 귀신이겠소? 도깨비겠소? 이혜근이가 병원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연습된 여자니 그랬지 다른 여자라면 실력하여 번저 넘어졌을 것입니다.
그러자 곁방에서 채계복이, 채성화, 그 어머님까지 나와서 채계복이는 울었소. 이혜근이는 내 오른팔에 탄환이 박혀 마감 가죽까지 나와 박힌 것을 빼어내어 놓고서 말하기를 “나는 이 철을 영원히 보존하여 두었다가 조선이 독립된 뒤에 기념하겠다.”고 하였소.
그 나머지 어깨에 세 곳이나 조금씩 맞은 곳이 있었으나 그것은 관계치 아니하였소. 전체 온 몸이 모두 얼었소. 눈과 입만 내놓고 모두 얼었소. 온 몸은 통세나기(통증이 오기) 시작하였소.
채계복이는 자기 오빠의 양복과 신발, 외투를 가져다가 나에게 입혀 데리고 새벽에 날이 밝기 전에 떠났소. 그의 오빠 이름은 채창도였소. 그의 상점 뒷간에서 내가 치료하게 되었소.
상점 두어 칸을 막고 종이로 도배를 하고 채계복이만 뒷문으로 통하고 상점은 거리 문으로 출입하게 하고 나 있는 방은 뒷 장재 안에 들어와 뒷문으로 출입하는데 나 누운 방에는 다만 채계복이만 있었소.


이렇게 최봉설은 그 집에서 발을 동이고 손을 동이고 머리를 동인채 21일동안이나 채계복의 구원을 받게 되었다. 자기 생명을 구원해준 은공을 친형제, 친자매처럼 잊지 말자는 진정에서 채계도, 채계복의 항렬자 “계”자를 따서 자신의 이름을 최계립이라 개명하였다.


“15만원탈취사건” 의거 기념비 현 모습.(2020) 의거 100주념을 찾아 관련 인사들이 찾아오고 있다.

15만원탈취사건” 의거 기념비 현 모습.(2020) 의거 100주념을 찾아 관련 인사들이 찾아오고 있다.


훗날, 감금 된 세 의사를 구출하기 위하여 최봉설은 서울에 잠입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뒤 큰 아들 최동현만 만주에 남겨놓고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들어갔다.

러시아로 망명한 이후에는 “적기단”을 조직, 일본군과 러시아백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다. 1937년 우즈베크공화국 호레즌 갈대밭으로 겅제이주를 당한 후 꼴호즈에서 일하다, 1973년 1월, 연금생활 중 침켄트시에서 사망했다.


최봉설 묘비

최봉설 묘비


최봉설은 부인 김신희가 잠들어 있는 참켄트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국정부가 그의 유해를 봉환하고자 했으나 부인과 어머니의 묘만 남겨지는 것을 원치 않는 유족의 뜻에 따라 성사되지 않았다.


주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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