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통신원 소식

[문화정책/이슈] 윤동주 시인에 대한 중국의 시각
구분
문화
출처
KOFICE
작성일
2022.08.25

한국인이라면 너무나도 친숙한 윤동주 시인의 '서시', 아마도 학창시절 수없이 읊조렸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올해는 광복 77주년을 맞는 해이다. 광복을 위한 항일 운동은 여러 형태로 이루어졌고, 윤동주는 시로써 투쟁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12월 30일 현재의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龙井)의 명동촌에서 유복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따라서 명동촌은 윤동주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윤동주 시인 생가 정문에 있는 기념비에 적힌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라는 문구는 가슴 아픈 현실을 느끼게 한다. 특히 명동촌의 정신적 리더이자 윤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 목사는 윤동주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항일과 통일 운동으로 유명한 문익환 목사도 명동촌 출신이며, 윤동주와 함께 자랐다. 또한 안중근 의사도 거사전 명동촌에서 사격 연습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전해진다.


< 2012년 제작된 윤동주 시인 생가 정문 기념비 - 출처 : 통신원 촬영 >

< 2012년 제작된 윤동주 시인 생가 정문 기념비 - 출처 : 통신원 촬영 >


항일 감정으로 인해, 명동촌 사람들은 일본을 '일본'이라 부르지 않고 '왈본'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인지 윤동주는 18살인 1935년 평양에서도 일본 순사들 멱살 잡기가 연일 화제였던 숭실학교로 건너왔으나, 일제가 신사참배운동을 강요하자 문익환 등과 함께 동맹 자퇴를 감행한다. 숭실학교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38년 폐교된다. 그는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을 다녔으며, 1943년 7월 귀향 직전 항일운동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2월, 광복을 6개월 앞둔 시점 28세의 젊은 나이로 총 116편의 시를 남긴채 생을 마쳤다.

사실 윤동주 시인의 생가는 윤동주 가족(한국전쟁 시 한국 정착)이 이사 간 후,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긴 시간이 흘러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고 난 후, 윤동주 가족의 중국 방문 후 본격적으로 윤동주 생가는 복원의 기회를 갖는다. 1994년, 연변대학 조선연구센터의 주선으로 윤동주 생가는 마침내 복원된다. 그러나 당시 복원은 윤동주가 유년기 공부한 방, 방학 때 귀향해 시를 적던 방 등 기본적인 집의 구조를 갖추는 정도로만 이루어졌다.


< 기존 나무 기둥을 최대한 활용해 복구한 윤동주 시인 생가 - 출처: 통신원 촬영 >

< 기존 나무 기둥을 최대한 활용해 복구한 윤동주 시인 생가 - 출처: 통신원 촬영 >


< 윤동주 시인뿐만 아니라 용정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전시된 별빛 찬란한 민족학교 - 출처: 통신원 촬영 >

< 윤동주 시인뿐만 아니라 용정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전시된 별빛 찬란한 민족학교 - 출처: 통신원 촬영 >


한중 수교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연변으로 여행을 떠났고, 윤동주 생가는 연변 관광의 필수 코스였다. 2012년, 중국 정부는 많은 한국인의 관광 필수 코스인 윤동주 생가의 제대로 된 보수와 정비를 진행했는데, 순전히 중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1994년의 정비 시에는 해외한민족 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복원하였기에, 당시 기념비에는 윤동주 시인을 조선족이라 표기하지 않았다. 또한 한글로만 표기하고 한자는 넣지도 않았다. 당시 중국 정부의 윤동주 시인에 대한 태도를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2012년 중국정부 주도의 대대적인 보수 과정에서 이 기념비는 새로 교체되었는데, 윤동주 시인을 조선족으로 표기하고 해외한민족 연구소의 지원을 받았다는 내용 등 한국에 관련된 내용은 삭제했다. 뿐만 아니라 윤동주 생가의 정문 기념비 또한 중국조선족애국시인이라고 적었으니, 한국인으로서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 윤동주 시인 생가 옛터를 소개한 첫 문구, '중국 조선족 유명한 시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 출처 : 통신원 촬영 >

< 윤동주 시인 생가 옛터를 소개한 첫 문구, '중국 조선족 유명한 시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 출처 : 통신원 촬영 >


윤동주 생가는 확실히 1994년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였을 때 큰 차이가 있다. 지금은 외관상으로는 거의 완벽하게 복원이 된 상태이고, 넓은 마당에는 윤동주 시인의 대표적인 시들이 바위와 의자 혹은 조명 등 곳곳에 한글과 한자 모두로 적혀 있다. 완전한 관광지로 변신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곳을 찾는 중국인들은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 알고 돌아갈 것이다. 사실 더 가슴 아픈 것은 일부 중국 동포들 중에도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 당시의 생활 환경을 엿볼 수 있는 윤동주 시인 생가의 실내 모습 - 출처 : 통신원 촬영 >

< 당시의 생활 환경을 엿볼 수 있는 윤동주 시인 생가의 실내 모습 - 출처 : 통신원 촬영 >


하지만 이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1992년 한중 수교 당시 상황과 비교하면, 연변에 살던 동포들은 달라진 점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들은 한민족 얘기만으로도 우리는 금방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2001년 생겨난 중국의 최초 인터넷 검색엔진 바이두, 이 플랫폼 속에서 발생한 양국간 윤동주 시인에 대한 국적 논쟁을 통해 적지 않은 중국인들이 사실을 인지했다. 바이두는 현재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포털사이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수정을 요청해도 바이두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오히려 조선족에 관련한 많은 부분에 있어 더 강력한 통제를 하고 있다. 사실 알면서도 제대로 돌려놓지 못하고, 찾아오지 못하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정부의 노력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노력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진출처: 통신원 촬영

참고자료: 바이두 백과사전, https://mbd.baidu.com/ma/s/zKju4KkN




한준욱

성명 : 한준욱[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중국(충칭)/충칭 통신원]
약력 : 현)Tank Art Center No41.Gallery Director 홍익대 미술학과, 추계대 문화예술경영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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