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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고려인' 1부- 블라디미르의 귀환
작성일
2018.04.20

YTN 특별 기획 3부작‘고려인' 1부 블라디미르의 귀환


자막

YTN 특별 기획 3부작‘고려인’: 1부 블라디미르의 귀환 

[프롤로그]
광주 광산구 월곡동 주택가, 이곳을 중심으로 4천여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골목마다 러시아어 간판이 보이고, 고려인 식당과 상점이 들어서 있다.

광주 생활 6년째인 62살 김 블라디미르 씨는 이 마을의 유명 인사다.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문학 교수 출신으로 올해 초 광주에서 첫 시집을 냈다.

주민들 대소사나 행사 때마다 그의 시낭송이 빠지지 않는다. 

[인터뷰: 김 블라디미르(62) / 광주 고려인 마을 시인] 
“수많은 고통을 겪은 내 민족은 무너지지 않았노라, 
그 누구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었노라!”

부모님이 그토록 그리던 모국에 돌아왔지만 현실은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그에게 진정한 귀환의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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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타이틀: 1부 블라디미르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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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배꽃 물결 아래, 배 농장에서 봄맞이가 한창이다. 김 블라디미르 씨의 오늘 작업은 겨우내 나무속을 파고든 해충을 제거하는 일이다.

[인터뷰: 김 블라디미르(62) / 광주 고려인 마을 시인] 
"오늘 배나무 껍질 작업을 하게 될 줄 몰랐어요."

함께 온 고려인 대부분 환갑을 넘겼다. 농번기엔 과수원 일손돕기로 가족의 생계를 돕는다.

[인터뷰: 정충기 / 배 영농조합 대표]
“배 철 지나면 감 작업 다니고 또 양파 작업도 다니는데, 딸기 하우스 담양에 블루베리 다 작업 다녀요."

[인터뷰: 김 블라디미르(62) / 광주 고려인 마을 시인] 
여기선 일도 하고 시도 쓸 수 있죠. 한국에 6년 살면서 배밭 일이 제일 좋아요. 

과수원 일을 마치고 돌아온 김 블라디미르 씨를 아내와 손자가 반갑게 맞아준다.

김 씨가 한국에 온 것은 지난 2011년, 우즈베키스탄에서 정년 퇴직한 뒤 아들과 딸 가족 모두 한국으로 왔다.

정착은 쉽지 않았다. 고된 공장일보다 참기 힘든 건 고려인에 대한 편견이었다.

[인터뷰: 김 블라디미르(62) / 광주 고려인 마을 시인] 
"거기 사장님이 제 눈을 보며 바로 얘기하더군요. '너는 배신자다, 너 네 부모님들도 다 나라가 힘들 때 도망간 반역자다.'"

그의 할아버지는 연해주에서 독립군 부대에 참가했지만 자세한 기록은 알지 못한다.

[인터뷰: 김 블라디미르(62) / 광주 고려인 마을 시인] 
(연해주에서) 마을과 농장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에 맞서 부대를 만들었어요.  (강제이주 기억 때문에) 아버지는 저에게 알 필요 없다고 하셨어요. 

블라디미르 씨도 한국에서 시를 쓰며 뒤늦게 고려인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80년 전 부모님의 강제 이주 발자취를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한 이유다.

"무엇이 진짜 진실인지를 찾는 여정이 되고 싶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부터  중앙아시아까지는 6500km. 80년 전 한달 넘게 걸렸던 기나긴 여정이다. 

김 블라디미르 씨는 국내 고려인 대표로 회상열차 탐방에 동행했다.

## 신한촌 기념비  

100년 전 한인 집단 거주지가 있던 신한촌 기념비, 그래서 이곳은 고려인의 고향으로 불린다.

주변 불량배가 훼손하는 경우가 많아 고려인 관리인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관리하고 있다.

[인터뷰: 이 베체슬라브 / 전 연해주 고려인문화재단 회장]
"고려인이 어떻게 고통 받았는지 꼭 알려주고 싶어요"

1910년대 신한촌은 거대한 독립운동 전진기지나 마찬가지였다.

입구에는 ‘독립대문’을 세워 일본인 출입을 막고 삼일절 독립 만세를 외쳤다. 사진 속 태극기가 당시 뜨거운 열기를 말해준다. 블라디미르 씨 아버지도 이곳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하지만 사진 속의 신한촌 유적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탐방단은 인근 신한촌 ‘서울 거리’ 표지판을 찾았다.  ‘세울 스카야’, ‘서울거리 2번지’란 의미로 100년 전 신한촌 흔적이다. 그런데 철거 공사가 진행 중이다. 러시아 인부들이 무심하게 표지판을 떼어냈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신한촌 유적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인터뷰: 이삼열 / 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우리 자주독립을 위해서 애쓰던 선열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데, 잘 보존되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좀 아프고"

초기 집단 거주지가 있던 개척리, 이동휘 선생 집터, 민족운동 단체 권업회 자리는 당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어렵게 매입한 최재형 선생 고택은 아직 기념관 공사가 진행 중이다.

반면 당시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옛 일본 총영사관 건물은 지금까지 안내문과 함께 잘 보존돼 있다.

인근 블라디보스토크의 혁명광장도 고려인의 아픈 역사가 서려 있다. 사회주의 혁명을 기념하는 동상이 서 있지만 고려인에겐 강제이주 당시 눈물의 집합 장소였다.

1937년 8월 강제이주 비밀 명령서에 서명한 스탈린은 혁명을 도왔던 고려인 지도자와 독립운동가 수천 명을 먼저 숙청한 뒤 치밀하게 강제이주를 진행했다.

한민족 이주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현장을 뒤로 하고 본격적인 열차 여정에 나섰다.

밤새 열차 바퀴 소음에 뒤척이다 첫 아침을 맞은 김 블라디미르 씨, 

스쳐 가는 풍경 위로 떠오른 시상을 종이 위에 옮겨 적는다.

[인터뷰:김 블라디미르/ 광주 고려인 시인] 
"밖을 보니 부모님이 열차를 타고 지날 때 모습이 떠올라요. 부모님은 가축을 옮기던 화물칸에 실려 갔다고 합니다."

##(화면 전환) 샌드 애니메이션
“"창밖의 자작나무를 바라보며 
부모님의 신음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힘들었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가…아버지가 흘린 눈물마저 기억난다.”

중앙아시아까지 20만 명을 강제이주하는 동안 희생자가 속출했다. 절반 이상은 타슈켄트 등 더 먼 곳으로 수천 km를 더 가야 했다.

##1937년 당시 유치원 사진
굶주림과 전염병에 시달린 어린아이 절반 이상이 숨졌다. 학자들은 전염병과 사고 등으로 당시 희생자가 적게는 2만 명, 많게는 5만 명까지 추산한다.

[인터뷰: 손조야(86) / 강제이주 당시 6살] 
"오라버니 혼절해서 오다가 (열차에서) 죽었습니다. (죽은 오빠를) 아버지가 안고 내려가는 거 봤지
거기서 파묻었는지 내버리고 왔는지 모릅니다."

[인터뷰: 김 니콜라이(95)/ 강제이주 당시 15살] 
"이불로 둘둘 말아서 차가 정차했을 때, 사람들이 내려 가서 나뭇잎으로 덮었어"

[인터뷰: 천억실(92) / 강제이주 당시 12살] 
"그땐 아이들 노인들이 어떤 집에서는 아이 노인을 둘씩, 셋씩 잃은 집도 있었습니다."

##열차 전복 사고 영상
무리한 열차 운행으로 대규모 사고도 잇따랐다. 비슷한 시기 촬영된 화면 가운데 열차가 전복되는 대형 사고 장면도 기록 영상으로 전해진다.

[인터뷰: 이원용 교수/ 국가기록원 자문위원] 
"열차 상태 이런 걸 봤을 때 그 당시 열차라고 생각되고 강제이주 당시 필름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보시비르스크 러시아 철도 박물관에서 1930년대 사용됐던 화물열차 규모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뷰: 김병학 / 고려인 연구가]
"1935년 당시 가장 강력한 힘으로 화물을 끌었던 증기기관차라고 써 있어요. 
여기 고려인의 통한의 눈물과 한숨과, 피가 묻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달리는 열차 풍경 구성]

열차는 어느덧 시베리아 숲과 바이칼호를 지나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빠져 나왔다.

지평선 위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마저 고려인에겐 생존을 위한 극복 대상이었다.

##열차 문학 대담
열차에서 블라디미르 씨가 탐방에 동승한 또 다른 고려인 소설가를 만났다. 

우연히도 성과 이름이 같은 두 작가. 9살 많은 소설가 블라디미르 역시 작품을 위해 이번 탐방에 동승했다. 서로 명함 대신 작품을 교환했다.

## 1. 자기 소개
[광주 블라디미르] 
'광주에 내린 첫눈'이라고 저의 시집이에요. [우즈베크 블라디미르]
제 소설 제목은 <멀리 떠나온 사람들>이에요. 한국에서 출판됐죠. 

##2. 작가가 된 계기?
[광주 블라디미르]
저는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오래 됐어요. 학교 다녔을 때부터 썼으니까요. 
[우즈베크 블라디미르] 제 직업은 기자였어요. 기자하다 보니까 작품을 많이 쓰고 작가가 됐죠. 

##3. 현재 작품 준비는?
[광주 블라디미르] 언론 인터뷰도 많이 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어요. 
[우즈베크 블라디미르] 저는 예전에 인기가 많았어요. 최근에 작품 준비에 전념하고 있지만... 

## 4. '강제이주' 나쁜 것만 아니다?
[우즈베크 블라디미르] 이주는 인간의 발전 과정이기도 하죠. 새로운 환경과 도전, 언어와 풍습에 적응해서 주변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아야 되니까요.

## 5. 유랑의 삶...끝없는 작품 주제 
[우즈베크 블라디미르]
이제 이 모든 아픔을 표현할 수 있는 시기가 됐죠. 

[광주 블라디미르] 
고려인은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일도 문학도. 모든 것을 잘하고 싶어 했죠.

일주일 넘게 달려온 열차는 어느새 종착역인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멈췄다.

역에서 차로 30분을 가면 고려인이 첫 겨울을 났던 바슈토베 마을이 나온다.

바람과 추위를 피하기 위해 팠던 토굴촌 주변에 100여 기의 고려인 묘지가 있다.

[인터뷰: 천억실(92) / 우슈토베 고려인 1세대] 
"갈대밭에 집도 없어서 산 밑에 여기 돌아가며 땅굴을 파고 37년도에 겨울을 났습니다."

고려인 묘지 앞에 나란히 선 3명의 고려인, 묘비 이름 하나하나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인터뷰:김 블라디미르(62) / 광주 고려인 마을 시인] 
"이 분은 7살 때 이주 당했어요."

[인터뷰: 김 블라디미르(71)/ 우즈벡 고려인 소설가] 
"57세에 돌아가셨으면. 오래 못 사셨네"

[인터뷰: 박 아르촘(36) / 키르기스스탄 고려인] 
"정말 인상 깊은 장소입니다. 특히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더욱 의미가 많이 곳이죠.
여기에 이주하고 살았던 토굴 흔적도 남아 있고, 
바로 옆에 묘지도 같이 있네요."

[인터뷰: 김 블라디미르(71)/ 우즈벡 고려인 소설가] 
"모든 고려인들에게…이 장소가 꼭 봐야 할 장소죠."

첫 정착지가 공동묘지가 된 비극의 역사, 이들도 마지막 순간에 고향을 떠올렸을까?

[김 블라디미르 추모시 낭송]
"나는 부모님이 꿈꾸던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단 한번 만이라도 조국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들은 큰 행복을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조국 땅에 머물러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열차 탐방은 끝났지만 블라디미르의 여정은 계속됐다.
우즈베크에 남은 여동생을 보기 위해 홀로 타슈켄트로 향했다.

3년 만에 찾은 타슈켄트 고향 마을, 40도 가까운 폭염에도 여동생이 마을 입구까지 마중을 나왔다.

먼 길을 지나온 오빠를 위해 구수한 된장국을 준비하고 상을 차렸다.

[인터뷰:김 갈리나(59) / 김 블라디미르 여동생]
"오빠는 한국을 좋아해요. 
한국에서 훌륭한 시인이 돼서 하고 싶은 일을 계속했으면 해요. 대부분 일자리를 찾아 떠나면서 마을엔 노인과 아이들만 남았다."

[인터뷰: 김 블라디미르 / 광주 고려인 마을 시인]
"제 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아버지 고향에서 꿈을 이뤘습니다' 라고 말했을 거예요.
제 여동생하고, 친구들을 만나서 아주 행복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건배하시죠. “우라!” (만세!)"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23만 명에 달했던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은 15만 명까지 크게 줄었다.

타슈켄트 외곽에 있는 시온고 마을, 고려인 독거 노인 40여 명이 모여 있는 아리랑 요양원이 있다. 우리 정부 지원으로 고려인 1세대를 8년째 무료로 돌보고 있다. 여든 해의 유랑의 세월에도 우리 말을 잊지 않고, 김치와 만두를 즐긴다.

80년 전 부모 손에 끌려 열차를 탔던 어린아이는 이제 아흔을 훌쩍 넘겼다. 

[인터뷰: 김귀둥야(94)/ 강제이주 당시 14살] 
"산도 낯설고 물도 낯설고 우리 그런 데로 가서. 
고생 많이 해서 굶어 죽은 사람들이 많았어"

[인터뷰: 강안나(94) / 강제이주 당시 14살] "고려사람들 여기 와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갈대밭에 손으로 일하고. 지금 목화도 심고 그렇게 했지."

[인터뷰: 현 마리야(82)/ 강제이주 당시 2살] "나는 한 살에 여기 들어왔어요. 아버지 세상 떠나고 어머니도 세상 떠나고 두 오빠를 잃어버리고. 이젠 남은 건 나밖에 없어"" 

남은 어른들 가운데 중에 독립운동가 후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인터뷰: 김 알렉세이(82) / 강제이주 당시 2살] 
"아버지가 독립군 부대였다고 들었죠. 바로 ‘홍범도 장군’ 부대였죠. 젊고 힘센 청년만 뽑았어요. 나중에 자다가도 돌아 누우면서 '(일본에)  원수를 갚아야 한다' 하셨죠."

아리랑 요양원에선 해마다 5명 정도의 노인들이 세상을 떠난다. 강제이주를 경험했던 1세대는 이제 37명이 남아 있다.

[인터뷰: 김나영 / 국제보건의료재단 아리랑요양원 원장] 
"고려인이기 때문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신 분들이거든요. 어떻게 보면 역사의 산 증인이고…."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블라디미르 씨, 그 사이 한글 실력도 부쩍 늘었다.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광주를 잘 아는 고려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이다.

[인터뷰: 김 블라디미르 / 광주 고려인 시인]
"광주 좋아요. 여기서 다 있어요. 고려인 많이 있어요. 한국 친구들 많이 있어요. 아들딸 손자 다 여기 있어요. 나 어디 가요? 안가요!"

80년의 유랑의 세월을 지나 우리 앞에 선 고려인, 우리는 그들의 귀환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을까?

[김 블라디미르 '추석' / 시집 '광주에 내린 첫눈' 중에서]
"내 벗들이여, 역사적인 조국의 땅에서 살고 있는 그대들에게 바라는 바는 우리도 “이것이 내 조국이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 [크레딧 : 스탭 스크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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