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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글짓기(중고등)] 주름살에 핀 웃음 꽃
작성일
2021.02.01

[장려상 - 청소년글짓기 부문]


주름살에 핀 웃음 꽃


유 다 은 / 태국


따르르릉……따르르릉……따르르릉……전화벨 소리가 거의 끝날 무렵 영림이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급하게 수화기를 든다.“여보세요?”“영림아! 나여. 나.”뜬금없는 소리에 영림이의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졌다.“누구시오?”“나 순례여.”영림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뭐여, 김순례라고? 강경초등학교 1회 김순례? 아이구, 친구야. 안 죽고살아있었냐?”“그려. 아직까지는 살아있어…….”떨리는 목소리로 영림이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아이구, 반갑다 친구야. 이게 얼마 만이냐…….이렇게 시작된 영림이와 순례의 수다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올해 86세, 우리 할머니의 성함은 김순례이시다.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안 죽고 살아있어”라는 할머니의 투박한 사투리가 섞인 대화에 호기심이 생겨 귀를 쫑긋하고 듣게 되었다.

전화기를 든 할머니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영림이 할머니의 남편분이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소식에는 어두움이 잔뜩깔려 있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시던 두 분은 서울의 한 백화점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 시간을 잡으셨다. 그때 마침 태국에서 여름방학이라 한국에 와계시던 엄마가 그날 외할머니와 친구분을 모시고 다니시기로 하셨다.

통화를 하셨던 할머니의 초등학교 친구분이신 영림이 할머니는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집안이 힘들어지자 학교를 다 졸업하지 못하고19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셨다고 한다. 그 이후로 할머니와 소식이 끊어지셨다고 했다.

결혼식 전날 고등학생이셨던 외할머니는 학교까지 결석하며 선물을 가지고 찾아가셔서 한참을 껴안고 울었다고 하신다. 그 후 할머니가 수소문하여 40년 만인 60세쯤에 한 번, 그리고 오늘 두 번째 연락이 된 것이다. 86세때, 25년 만의 만남을 약속하신 거였다. 두 분 다 사는 지역도 다르고 바쁜일상을 살다 보니 만나기가 쉽지 않으셨나 보다.

드디어 우리는 약속 장소인 총신대역으로 향했다. 영림 할머니는 안산에사시는데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서울 나들이를 하신 거였다. 두리번거리던할머니는 횡단보도 건너편에 계신 친구분을 보자마자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할머니의 설렘이 나에게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두 분은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아이처럼 세차게 손을 흔들며 걸어가셨지만 마음과는 달리 발걸음은 너무나 힘들어 보였다. 그때처럼 이 보행등 신호가 이렇게 빠르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두 분의 얼굴 표정은 마치 구름 위를 사뿐사뿐 걸어가는 것처럼 반가움으로 들떠 있었다.

엄마는 그 근처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곳으로 식사 대접을 하고 싶어 하셨지만 다리가 불편하신 두 분의 걸음 상태로는 무리였다. 우리는 두 분이 만났던 백화점 안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점심시간이라 붐비는 백화점 안에서 할머니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 사람들을헤치고 나아갔다. 나는 할머니를 부축해 드리며 천천히 걸으려고 했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겨우 에스컬레이터 앞에 메뉴와 상관없이 가장 가까운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점심식사를 하시며 두 분은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하셨다.

평소에 외할머니는 과묵하다 하실 정도로 말씀이 없으시고 조용한 분이시다. 그러나 이날 본 외할머니는 낯설어 보였다. 남자 동창들과 좋아하던 선생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손뼉까지 치시며 깔깔거리셨다. 집에서 학교까지 1시간 동안 걸어가던 길에 불렀던 노래까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같이 부르시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마치 내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수다 떠는 거랑 다르지않았다.

‘아! 할머니는 처음부터 어른이 아니었구나…….’ 나와 똑같은 학창 시절이 있으셨던 거였다.

두 분은 70년 전의 기억들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끄집어내셨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나는 “할머니는 언제 가장 행복하셨어요?”라고 여쭈어보았다. 그러자 할머니는 “너처럼 학교 다닐 때가 제일 행복하였지”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바로 “그럼 할아버지와 연애하셨을 때는요?”라고 되물었다. 할머니는 “그때도 좋았지. 근데 너무 짧았어……”라고 말끝을 흐리셨다. 소녀처럼볼이 붉게 물들었다가 새침하기까지 한 할머니의 모습은 누가 봐도 16살 소녀의 모습이었다.

모든 근심과 걱정은 잊어버리고, 두 분은 봄날에 흐드러지는 벚꽃보다 더아름다운 웃음꽃을 떨어뜨리고 계셨다. 나와 엄마는 옆에서 소녀들의 행복한 수다에 빠져 눈을 반짝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고 있었다. 그렇게즐거운 만남을 마치시고 우리는 다시 영림이 할머니를 총신대역 입구까지모셔다드렸다. 두 분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들었고 애틋한 눈빛으로 서로를바라볼 뿐 꽉 잡은 두 손을 쉽게 놓지 못하셨다.

“건강해야 돼. 친구야. 혼자 있다고 밥 대충 챙겨 먹지 말고. 네가 4학년때 가장 친한 친구로 내 이름을 적어줘서 고마워.”

그렇지만 두 분은 다시 만날 기약을 하지 않으셨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아쉬움에 젖어있는 할머니에게 나는 밝은 목소리로 여쭈었다. “할머니, 다음에 또 만나시면 되죠.” 그러자 할머니는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너와 엄마가 있어서 할머니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친구를만나 보았어. 고맙다…….” 주름지고 거북이 등처럼 까칠한 손이 살포시 내손 위에 포개졌다. 차마 바쁘신 외삼촌과 외숙모에게는 친구 만나러 가자고얘기를 못 하셨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엄마를, 영림이 할머니는 지팡이를 의지하며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니 도움 없이 두 분이 자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걱정 마세요. 내년에 또 한국에 나오면, 할머니 친구분께 모셔다드릴게요.”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시며 미소를 지으셨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태어난 외할머니는 요동치는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참으로 고달픈 삶을 견뎌내신 분이다. 7남매 중 큰아들이셨던 외할아버지가군대도 가기 전에 결혼하시는 바람에 외할머니는 홀로 남아 큰외삼촌과 시부모 그리고 5명의 어린 시누이들과 시동생까지 뒷바라지하며 힘든 시집살이를 버티셨다.

할머니는 치열한 젊음 속에서 2번째, 3번째 외삼촌을 가슴에 묻었던 감당하기 힘든 시련도 있으셨지만 항상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엄마, 이모, 외삼촌들을 비롯한 7남매를 잘 키우셨다.

지금은 비록 갈라지고 뽀개져 성한 곳 하나 제대로 없는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매서운 화염과 비바람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켜낸 거대한 고목나무 같은 분이시다. 이제는 넉넉한 삶을 사셔도 좋으련만 지금도 할머니 본인에게 10원 한 장 쓰는 것도 아까워하시며절약에 또 절약을 하신다. 뵐 때마다 “이것은 용돈이 아니여. 한국에서 많이보고 느끼고 배우고 가라는 교육비다”라며 꼭 손에 봉투를 쥐여 주신다. 어렸을 때는 용돈 받았다고 좋아했지만 이제는 그 의미를 알기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돈이 되었다.

2살 때부터 해외에 살게 된 나에게 외할머니는 자주 볼 수 없는 분이셔서어렵기도 하였지만 항상 한국에 갈 때마다 포근하고 따뜻함을 안겨주셨다.

굽어진 등을 이끌고 우리 올 때마다 간도 잘 안 맞는 반찬이지만 정성껏차려주시려 애를 쓰신다. 작년에는 저녁 시간에 좀 늦게 도착했더니 불어터지고 밑이 새까맣게 탄 백숙을 먹으라며 차려주셨다. 아빠와 나, 동생은 탄맛 나는 백숙을 다 먹어치우고 왔다. 그 탄 맛 나는 백숙에는 할머니의 기다림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맛있는 척해야 하는 게 좀 힘들었지만, 그 따스함과소박함에 난 할머니가 좋다. 또한 할머니가 친구분을 만나시면서 보여 주었던 해맑고 수줍음 많던 16세의 모습은 나에게 친근함까지 선물해 주셨다.

할머니가 억척스럽게 이겨낸 삶은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 주셨다. 힘겨웠던삶을 이겨낼 때마다 한 줄씩 주름살이 더 늘어나셨을 거다. 그래서 그 흔적의 증거인 주름살이 난 자랑스럽다. 그 주름살은 단순히 노화의 한 부분이아니다. 오랜 기간 쌓아 올린 경험과 지혜, 그리고 눈물과 땀방울로 만들어낸 삶의 깊이였던 것이다.

요즘 할머니는 치매가 제일 무섭다고 하신다. 사랑하는 자식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짐만 될까 봐…….이제는 내가 할머니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꼭 전해드리고 싶다. “걱정 마세요. 제가 잊지 않고 기억할 테니…….”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 여행은 나에게 삶이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어떻게 그 시간을 채우고 가꿔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되었다.

할머니의 인생을 통해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그 시간들이 모여 열매가 맺어지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희생과 사랑이 필요한지도 보았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친구분에게 모셔다드린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게되었다. 죄송한 마음에 속이 상하지만 할머니가 그래왔듯이 나 역시 지금의불편함과 답답함을 인내로 묵묵히 이겨내려 한다.

지금 내 나이 만 16세, 이 순간이 나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국에 가면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할머니의 깊게 패인 주름살에 웃음꽃이 가득 필 수 있도록 할머니를 모시고 친구분들을 찾아뵈어야겠다.

“할머니! 할머니의 삶은 누구보다 더 아름다웠으며 찬란했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저랑 같이 꼭 친구분 만나러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