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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글짓기 중.고등] 나, 김환기, 그리고 세계 속의 한국인
작성일
2022.01.05

글짓기 중.고등-장려상


나, 김환기, 그리고 세계 속의 한국인


허 지 원 [영국]



이 글은 영국에서 태어난 저와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 프랑스 미국 등 외국에서 활 동한 한 천재 한국인 예술가와의 작품을 통해 경험한 글로벌 코리안에 대한 작은 생 각을 담았습니다.

저는 네 개의 나라가 하나의 연합체로 국가를 이루고,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는 영 국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인들은 저에게 ‘너는 어디서 왔니?’라고 자주 묻습니다. 어릴 때는 제가 태어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라고 대답을 했지만, 커가면서 같은 영국인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반복되는 질문에 대답을 머뭇거리게 되었습니다. 왜 냐하면 일부지만 질문을 한 그들의 눈에 비친 조그마한 동양 소녀는 ‘영국인’이 아니 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남과 북이 분단된 한반도의 상황 때문에 ‘남 쪽, 북 쪽?’이라 질문이 덧붙여질 때는 이유 없이 마음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사소하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이 질문이 커가면서 서서히 제 스스로에게 ‘나는 어디 서 온 누구일까’라는 무거운 질문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국 가나, 영국과 오랜 역사적 교류가 있었던 인도나 미국인 부모를 가진 친구들에게는 묻지 않은 질문이 저처럼 동양에서 온 아시아인들에게는 일상적으로 자주 접하는 물음입니다.


저는 태어난 스코틀랜드에서도, 지금 살고 있는 런던에서도, 한국인도 영국인도 아 닌 제3의 이방인일 뿐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우연히 학 교에서 Art 에세이를 준비하면서 접하게 된 한 한국인 화가인 김환기의 작품이 그 해 답을 주었습니다. 주로 점묘 기법으로 그려진 많은 단색의 추상화들은 거추장스럽게 나를 둘러싼 많은 껍질들을 벗겨내고 그대로의 나 자신을 다양하게 존재하는 다른 점 들과 함께 어울려 있는 아름답고 조화로운 전체로 보여줍니다.


특히, 멀리서 보면 푸른색의 단순한 그림이 가까이 갈수록 다양한 형태의 작은 점 들로 구성되어 있는 ‘우주’(fig.01)라는 작품은 물감의 농담의 차이로 만들어진 번짐 과 다양한 채도로 모두 다르게 그려져 있는 각각의 작은 점들이 나 자신과 또 다른 개 성들의 어울림으로 인식되면서 오랫동안 답하지 못한 의문이 일시에 풀어지는 계기 가 되었습니다. 무엇을 장식하기 위해서 깔끔하게 칠해진 색보다 가까이서 보면 번지 고 뭉개어지고, 검은색과 흰색들이 여러 겹의 레이어로 겹쳐져 있는 작은 점들은 하 나 하나의 개성을 보여주면 각각의 점들에게 집중하게 만들어줍니다. 이 각자의 개성 을 뽐내며 자유롭게 자리 잡은 많은 점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패턴과 단순한 색조가 저에게는 더욱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를 지나며, 한국을 떠나 일본과 프랑스를 거쳐, 미국 뉴욕에서 생 을 마감하면서 그가 남긴 작품들이 100년에 가까운 시간적 거리와 수천 킬로미터의 공간적 거리를 넘어서 서로가 소통하는 접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놀랍고도 경이로운 경험입니다.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에게 김환기 작품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는 피카소나 로스코의 작품보다, 그리고, 다른 일반의 한국작가들의 작품보다 더 많 은 공감을 주며 가깝게 다가왔습니다.


비록 영국에서 태어나서 자랐지만, 부모님의 영향으로 한국말을 하며 아침에는 된 장국에 밥을 말아먹는 것을 더 좋아하고, 또 학교에 가서는 영어로 영국의 역사와 문 화를 배우며 영국인의 정체성도 가지고 저는 양국 문화를 모두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하지만, 각각의 문화 속에서 무언가 아쉬워하던 빈자리가 항상 있었습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 마음이 편해질까 생각해서 한때는 미친 듯이 영국 문화와 역사에도 심 취해보거나, K-POP이나 K-Drama 등의 한국 대중문화에도 열심히 빠져보기도 했 지만, 그때도 마음속 깊은 곳의 나는 항상 비어 있었습니다. 아마 이전에 저는 한국인 도, 영국인도 그리고, 제 자신도 아닌 가면만 쓰고 있어서 그랬을 지도 모릅니다. 한 국인이란 정체성이 늘 확고한 부모님이 가끔은 불편하기도 했지만, 양쪽에 경계를 둔 제 입장에서 부러웠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에 언제나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고,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기뻐하고, 국가 간 경기가 열리면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열렬히 응 원할 수 있는 두 분을 볼 때면, 한국과 영국 양쪽을 응원하면서 마음을 나눠야 하는 저보다 더 행복해 보입니다.

이런 제 마음을 김환기는 단순한 색채화 하나로 사로잡고, 어지럽고 복잡하게 흩어 져 있던 제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었습니다. 점 하나에 중첩된 여러 겹이 흩어져 있던 제 마음을 합쳐 놓은 것처럼 하나의 개성 있는 점으로 만들어지고, 이 점들이 모여 단 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조화로운 큰 그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작은 외딴섬에서 태어나 일본, 파리, 그리고 뉴욕으로 옮겨 가면서 활동 한 한국인 작가의 작품에, 영국에서 나서 자란 소녀가 시공간을 넘어서 공감한다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아마 그의 작품이 한국이라는 문화와 역사의 뿌리 를 바탕으로 서양 추상 미술과 교류하고 부딪히면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어 쩌면 저의 이민 2세로서의 성장기와 비슷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의 예술을 거부감 없이 자유롭게 공부하고 실험했던 그이지만, 초기 김환기의 작품은 달 항아리, 매화, 산, 새 등 한국 전통 모티브들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이 모티브들이 나중에 선이나 점의 회상과 같은 흔적으로 남아 결국 그의 개성의 정수와 함께 녹아들어 가면서 그를 서양 작가와 다른 세계 속의 한국인 김환기 작가로 자리 매김합니다.


초기의 그의 작품들은 아주 강한 한국적 모티브를 바탕으로 철저하게 당시 유행하 던 서양식 기법들을 따라갔습니다. 정체성에 혼란이 왔던 제가 영국에 살면서도 오히려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 자신을 가두고 목소리만 크게 내던 시절이 떠오르지만, 자기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후기에 한국에서 이룬 화가로서의 명성을 뒤로하고 뉴욕에서 만들어진 그의 작업 들은 한국인으로 물려받은 문화적 역사적 배경들은 몸속에 당연히 흐르는 피처럼 자 연스럽게 물감 속에 흐르며, 서양식 기법이나 유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오히려 더 한국적인 서예 기법이나 농담 등을 과감하게 작품에 적용하면서 역설적으로 세계 속에서 더 개성 있는 작품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들어내거나 표현하려는 노력보다는 과감하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심감을 가 지고 자유롭게 개성을 드러낸 것이 그의 노력과 수행이 만나 그를 세계적인 작가, 세 계 속의 천재 한국인 작가로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김환기는 한국의 추상 미술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위대한 화가로 서의 평가가 주를 이룹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위대한 유산이 예술에만 머문다고 생 각하지 않습니다. 저처럼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혼란스러운 많은 한국인 2세 또는 3 세들에게 두려움 없이 자신이 속한 지역의 문화적 색깔들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함께 포용하고, 각자의 개성을 덧붙여 성장해 갈 수 있는 힘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정 성스럽게 그려낸 하나의 점들처럼 각자의 본질적인 내면을 잃지 않으면서, 각자가 속 한 나라와 한국인의 문화와 전통을 모두 포괄하는 조화롭고, 아름답고, 보편적이지 만, 독특한 한국 스타일의 글로벌 세계인의 근거를 보여줬습니다.


영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이민자의 2세인 저에게 김환기의 작품은 영국에서 보편적 으로 접하는 예술품과 비교해서 전혀 거부감 없이 현대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도 말 로 설명할 수 없는 내적인 호감을 느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한국에 대한 크고 작은 기억들이 코튼 캔버스의 작은 틈들을 통해 느낌으로 전해졌습니다.


그의 그림이 동서양의 문화가 현대적으로 응축되어, 한국과 영국 양국 공동체의 일 원으로서의 제 입장을 반영했다고 느꼈을 때 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의 또 하나의 정체성인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 어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김환기의 그림 속의 작지만 큰 울림을 가진 점들처럼 저도 비록 작은 점에 불과할지라도 제 자신을 이해하고 찾아 나아갈 것입니다. 그 중첩된 점들 중에 한국인 2세로서의 자긍심도 꼭 자리 잡고 있을 것입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