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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글짓기 중·고등] 같은 하늘 아래
작성일
2022.01.05

글짓기 중·고등 - 장려상

같은 하늘 아래

정 지 은 [아르헨티나]


별들이 유난히 밝게 빛나던 어느 늦은 밤, 로키는 자신의 집으로 오기로 한 슈슈와 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교 시절부터 친했던 이들은, 다음 달에 열릴 큰 마을 행사 의 기획을 셋 중 누가 맡을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모였다.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모 여있는 마을인 만큼, 행사는 포용적이어야 하고 유연해야 하기에 신경 쓸 일이 많을 터. 능력 좋고 일 잘하는 사람이 뽑혀야 한다는 점에서는 세 명 모두 동의하는 바 였다.


모두 모여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한 후, 각자 자신이 회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넌지 시 풀어놓기 시작했다. 진정한 토의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었다. 우선 슈슈는 자신의 증조할아버지 세대부터 이 남미 동쪽 마을에 거주하였기에 마을에 대한 이해도가 가 장 높은 점을 생각하면 당연히 자신이 행사를 책임져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하지만 구영은 비록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이민을 와 슈슈만큼 오랜 기간 마을에 살진 않았 지만, 세대는 변하고 있기에 시대의 흐름과 다문화 마을이 된 이 마을 주민들의 특성 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자신이 회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로키는 곤란했다. 그는 오히려 친구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더 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미 취직에 성공한 친구들과 달리 로키는 아직도 대학생이었고, 언젠간 꼭 미술 감독이 되고 싶은 자신의 꿈을 이루려면, 이런 경험이 절실했다. 그렇기에 로키도 이 자리를 내어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슈슈와 구영도 이런 로키의 상황을 이해했기에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씁쓸 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잠시 대화의 방향을 돌릴 필요가 있어 보였다. 먼저 구체적인 행사 얘기를 꺼낸 것은 구영이였다. 직접 챙겨온 포스터를 꺼내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을에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늘어남으로써 크고 작은 차별 사 건들이 증가함을 고려해 인종차별 단절 캠페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야심 차게 발표 를 한 구영과는 다르게 친구들의 반응은 다소 애매모호했다.


“그렇지만 우리 마을에는 인종차별이 없지 않나?”


로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구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외부에서 온 구영 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셀 수 없이 많은 모욕과 차별을 당해왔지만, 원주민인 로키와 슈슈는 이런 경험을 해본 적 없었던 것이었다. 순식간에 몰려온 배신감에 구영은 당 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이야? 그럼 내가 지금까지 당한 건 뭔데?”

“뭐? 누가 너에게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로키는 정말 몰랐단 듯이 걱정을 하며 말했다. 차별이란 이민자들이 흔하게 겪는 일들이었지만, 구영에게는 말하기에 용기가 필요한 이야기였기에, 친구들에게 처음 으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구영: 내가 처음으로 당한 일은 길거리에서 ‘치노(중국인)’라고 불리는 일이었어. 나는 한국인이지만, 아시아인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야.


슈슈: 나는 중국인이 아니라고 하지 그랬어, 알려주지 않으면 모르는 건 당연하잖 아. 알았으면 당연히 안 그랬겠지.

구영: 그들이 정말 내 국적이 알고 싶어서 그랬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그들은 그 저 나를 배척하고, 나는 자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점 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로키: 글쎄. 사실 내가 보기엔 그들이 인종차별주의자라기보단 그저 예의 없는 사 람들인 것 같아. 모르는 사람에게 그렇게 소리치는 것 자체가 예의 없는 행위잖아.

구영: 정말 그렇게 생각해? 만약 그저 예의가 없는 거라면, 모두에게 동일한 대우 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외적으로 외부인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만 선택적으로 예의 없게 구는 건 인종차별이 맞잖아. 너는 길에서 이런 사람을 본 적이나 있니? 누가 너 에게 치노라며 말을 건 적이 있어? 현지인인 너희가 우연히 운이 좋은 것 뿐일까? 이 게 인종차별이 아니라면 어쩜 그런 일들은 꼭 나에게만 일어나는 거야?

로키: 그건 그러네.. 하지만 그들이 꼭 나쁜 의도로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 아.

슈슈: 내 말이. 다르다고 차별하려고 한 게 아니라, 신기해서 말을 건 걸 수도 있잖 아. 궁금하니까, 친해지려고. 네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인다는 생각은 안 해봤 어? 바쁜 생활에 지쳐 예민해져 있는 걸 수도 있어. 설마 친해지려고 하는 것조차 나 쁘다고 하지는 않겠지?


구영: 아무리 순수한 어린아이라도 자신이 차별당하는 걸 느낄 수 있어. 당해보면 안다고. 그리고 가까워지려 한다고 해서 차별이 허용되는 게 아니잖아. 내가 한국 책 을 읽을 때마다 중국어도 읽냐고 콕 집어 얘기하는 사람들과 그저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중국어로 ‘셰셰’ 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는 아니? 심한 사람들은 나보고 내 나라로 돌아가래. 어떤 이들은 내가 먹는 음식에서 냄새가 난다며 나를 밖으로 쫓아내.


슈슈: 하지만 구영, 네가 우리와 다른 건 사실이고 그들이 너를 다르게 보는 건 어 쩌면 당연한 일이야. 네 말을 들어보니 심각성이 느껴지긴 하지만, 가끔은 네가 무조 건 나쁘게 받아들이고 보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같아.

구영: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무서울 정도로 반복 적인 차별을 겪게 되면 누구든 지치고 짜증 나게 돼. 넌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 나 도 한두 번쯤은 그냥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그것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정말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돼. 조금만 더 넓게 보면 결국 다 같은 땅 같은 하늘 아 래 사는 거고 나도 그들과 똑같이 자라왔는데 말이야. 외모가 다르다고 해서 그들에 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로키: 구영.. 많이 힘들었겠다. 정말 몰랐어. 하지만 그렇게 상처만 받고 살면 너에 게도 안 좋잖아. 그냥 웃고 넘어가 봐. 차라리 무시해. 굳이 저 사람이 나를 차별하려 고 하네 라는 생각을 해서 좋을 건 없잖아? 너만 상처받는 일이야. 그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려니 하고 네가 이해해 봐.

구영: 가해자는 가만두고 피해자 보고 이해해라 용서해라? 너는 당하지 않을 일이 니 개선이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웃어넘길 수 있으니 남들은 상처를 받든 말든 변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거야?


슈슈: 우리는 널 진심으로 생각해서 한 말인데 왜 그렇게 나쁘게 받아들이니? 현실 적으로 당장 모든 걸 바꿀 순 없으니 너라도 마음을 가볍게 먹고 신경을 쓰지 말라는 거잖아.

구영: 정말 날 위한다면 그런 의미 없는 조언보단 위로를 해줘. 당장 모든 걸 바꿀 수 없다면 포기하는 게 아니라 작은 일이라도 해봐야지. 너희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 한다 해도 누군가에겐 얼마나 불편하고 기분 나쁜 건지 알리고 이렇게 목소리를 내야 어떤 인식의 변화라도 생길 거 아니야. 인종차별을 숨 쉬듯 해대는 그 사람들의 인생 에 스쳐 지나간 누군가는 자신의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빴다는 걸 알아야 할 것 아니야. 다음번에는 잠시라도 주춤할 수 있도록. 만약 정말로 상처 주는지 모르고 할 말이었 다면 다음부턴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말이야!


구영은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 겨진 이들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이 멍하니 앉아있었다. 오랜 시간 구영과 알고 지 냈지만 이런 부당한 일들을 겪고 지내는지는 몰랐었다. 슈슈는 손으로 얼굴을 쓸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회사 동료 중 아시아계의 사람에게 가끔 치노라 고 불렀다. 슈슈는 나름대로 애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는 어떻게 받아들 일지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런 자신의 무지한 행동을 합리화하고자 구영 의 말에 그렇게 반박을 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구영의 이야기를 들은 지금 죄책 감이 밀려왔다.

로키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로키는 지금까지 인종이 다르단 이유로 폭력을 당하거 나 불이익을 받는 것만 인종차별인 줄 알았었다. 자신은 방관해왔던, 어떻게 보면 사 소하게 불합리한 일들이 자신의 친구를 이 정도로 괴롭히고 있었을 줄은 몰랐던 것이 다. 그간 외국인들을 향한 자신의 부주의한 언행과 행동들이 그들에겐 어떤 상처로 다가갔을지 생각해 보니 이런 사회의 문제들을 무시한 채 살아간 저 자신이 부끄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영이 돌아왔다. 구영 역시 느끼는 게 많았다. 갑자기 감정이 격 해지는 바람에 친구들에게 화풀이한 것 같아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그래서 마음 정 리를 하고 사과를 하러 돌아온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구영을 슈슈와 로키는 조 용히 바라보았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 구영이 말을 꺼 내기도 전에 슈슈와 로키 모두 차례대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해 구영. 네 상황을 더 이해해 줬어야 했는데. 내가 경솔했어.”

“나도 미안해. 느끼는 바가 많네. 너만 괜찮다면 나는 네가 회장을 해줬으면 해. 이 번 행사에서만큼은 상처를 입는 사람도, 상처를 주는 사람도 없었으면 좋겠어.”

구영은 친구들의 사과를 받아들이고는 그들에게 행사를 함께 기획하는 것은 어떻 겠냐고 제안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즐기는 행사이니만큼 다양한 관점에서 계획해 나 간다면 더욱 화합을 이룰 수 있을 거란 취지에서였다. 그렇게 해서 셋은, ‘같은 하늘 아래’라는 주제로 행사를 진행하기로 하고 앞으로는 차별에 있어 목소리를 내기로 약 속하며 회의를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