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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엄마, 세이 땡큐
작성일
2022.01.07

체험수기 - 가작

엄마, 세이 땡큐

박 지 반 [호주]


아들 쿠온이 초등학교 5학년 때 큰 학교로 전학을 했다. 시드니 하버 브릿지 건너 동쪽 지역에 있는 학교였다. 집에서 차로 30분 넘게 걸리는 거리다. 등교 첫날이었 다. 집근처에 학교로 가는 스쿨버스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류장이 어딘지 몰랐 다. 그러나 버스를 놓치면 출근길 교통체증 속에서 쿠온을 차로 학교까지 태워줘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집에서 조금 늦게 나온 우리 가족은 스쿨버스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류장을 찾아 뛰었다. 느긋한 호주인 남편과 쿠온은 앞장 서 뛰는 내 뒤 로 엉거주춤 따라 오고 있었다. 뛰면서도 진작 알아둘걸, 십분만 일찍 나올걸 하는 후 회가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규정에 엄격한 호주 버스가 시간 맞춰 도착하고 출발하 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버스가 어디서 서는 줄도 모르고 달리는 데 멀리서 스쿨버 스가 보였다. 남편은 이미 늦었으니 포기하자고 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달리기대 회에서 일등 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속력이 났다. 버스를 따라잡은 나는 버스 옆을 마구 두드렸다. 놀랍게도 도로 한가운데서 버스가 섰다. 운전기사에게 오늘 처음 학교 가는 날이니 좀 태워달라고 사정했다. 운전기사 는 오늘은 태워주겠지만 버스 정류장은 다음 신호등 300미터 앞쪽이니 다음부터 꼭 그리로 가야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좌석에 앉아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목을 내밀었다. 뛰느라 상기된 쿠온의 얼굴은 버스에 올라타며 더욱 빨개졌다. 남편은 우리를 모른 체하며 고개를 숙이고 멀어져갔다.


그날 학교에 갔다 온 쿠온은 버스 세운 한국인 엄마 덕분에 첫날부터 유명해졌다고 했다. 역시 한국 아줌마는 대단해 라며 쿠온과 남편은 입을 모았다. 한국에 몇 번 다 녀온 후로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한국 아줌마가 어떤 인류인지 정의하고 있었다. 그 들은 아직도 새로운 친구가 생길 때마다 스쿨버스 이야기를 하며 한국 아줌마에 대한 설명도 덧붙인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스쿨버스를 놓쳐도 여유 있게 차로 바래다줄 수 있었다. 그러나 황급한 순간에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이 버스를 꼭 타야한다는 간절함에 눈이 먼 것이다. 쿠온이 말하는 아줌마의 조건 첫 번째는 눈 앞의 것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내가 한국 아줌마일까? 맞다, 나는 두 드려야 문이 열린다는 것을 아는 한국 아줌마이다.


한국 아줌마는 타고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인생의 반을 살고 있는 호주 에서 지금도 나는 한국 아줌마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이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호주 인과 한국인 혼혈아로 호주에서 태어난 아들 쿠온을 키우고 호주 사회에 잘 적응하면 서 살았다고 생각한다. 쿠온이 호주 사회에 살면서 불이익을 겪지 않을까하는 조바심 도 있었다. 어릴 때는 서로 다르다는 구별 없이 놀지만 철이 들면 주위의 영향을 받 게 마련이다. 쿠온이 자라면서 백인친구들과 섞이고 또 엄마가 다른 인종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국적이 다른 남편과 결혼하면서 2세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안 해본 것 은 아니다. 내 자식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차별대우를 받는 다는 것은 내가 그런 상황 에 있을 때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다. 다행이도 걱정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쿠 온은 놀이터에서 친구들을 리드하고 다른 학부모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성장했다. 피 부색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쿠온은 한국인도 호주인도 아닌 독립국가 쿠온이었다. 내가 처음 호주에 도착했던 이십여 년 전보다 호주 사회 는 빠르게 다민족 국가로 변했다. 특히 디지털 원주민인 쿠온이 속한 Z세대는 윗세대 에 비해 인종의 다양성을 더 수용하는 편이며 남녀 성차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가장 없는 세대이기도 하다. 온라인에서 같은 세상을 공유하는 세계의 젊은이들은 평등하다.


친구들보다 두 뼘은 더 큰 키를 타고난 덕분에 쿠온은 어릴 때부터 중심에 서있었 다. 따돌림을 받지 않을까 하는 내 불안은 쓸모없는 것이었다. 별 문제 없이 잘 자랐 던 쿠온이었지만 단 한번 뜻밖의 말을 해 내 가슴이 서늘해 진적이 있다. 자신이 동양 인이기 때문에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호주 친구들 속에서 당연 히 자신을 호주인으로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쿠온이 동서양 혼혈이나 서양인보 다 동양인에 자신의 정체성을 둔다는 점에 놀랐다. 동양인은 서양인 여자 친구를 사 귈 수 없다는 생각에도 충격을 받았다. 낙천적인 그에게도 혼혈아라는 자의식이 어깨 를 두드렸던 것이다. 그의 사춘기 어느 하루의 증상이었다.


“너는 얼굴 잘생겼지, 키도 크지, 엄마 닮아 피부도 미끈하지, 게다가 시어머니 자 리까지 훌륭한데 무슨 걱정이니?”


나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내가 잘 생겼다는 말을 할 때마다 쿠온은 피식 웃으며 말을 던졌다.
“한국 아줌마는 모두 자기 자식이 최고라는 착각을 하고 있어. 자신과 자기 가족을 제대로 파악하는 눈이 필요해”


한국 엄마들은 자기감정에 정직하다는 나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한국 아줌마에 대 한 쿠온의 편견은 지금도 변함없다. 쿠온이 말하는 한국 아줌마의 조건 두 번째는 자 기 자식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자기 여자 친구를 소개해도 시큰둥하다고 불만이다. 어떤 잘난 여자 친구를 데려와도 자기 아들에게는 못 미친다 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럼 내가 6개월에 한 번씩 바뀌는 아들의 여자 친구를 볼 때마 다 나팔을 불고 춤이라도 춰야하나. 그리고 내 아들이 최고지, 뒷집 아들이 최고인가. 역시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쿠온의 조건에 부합되는 한국 아줌마가 분명하다.


쿠온이 나를 한국 아줌마라고 선언하는 세 번째 이유는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다 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동양인으로서의 선입견을 아직도 깨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 다. 사실 내가 서양사회에 살면서 깨진 선입견이 몇 가지 있다. 한국에서 교육받고 사회생활을 하며 가졌던 선입견들이었다. 그 중 하나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일 것 같던 서양사회가 가진 뜻밖의 보수적인 면이다. 규칙이 엄격한 쿠온의 학교에서는 교복도 단정해야하고 머리도 교복칼라에 닿으면 안 된다. 선생님께도 항상 존칭을 써야한다. 자유를 존중하지만 방임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또 진취적이고 외향적인 서양 학부모 들이 학교의 방침과 부딪치면 반드시 뒤로 물러선다. 부당하다고 교무실에 와서 따지 는 부모는 없다. 오죽하면 학교에서 제일 나서는 학부모가 나였다.


서양인들이 이기적일 것이라는 편견도 있었다. 호주 백인들이 인종차별이 심하다 는 선입견도 있었다. 동양인들끼리 모여 있으면 호주 백인들은 말 걸기를 주저한다. 처음에는 우리를 꺼려한다는 착각을 했다. 알고 보니 먼저 말을 걸어주면 그들은 굉 장히 기뻐한다. 우리를 배려해서 조심하는 것이다. 개인적이라는 것이 상대를 배려하 는 예의 다음에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쿠온의 여자 친구들은 나와 쉽게 친해지지 않 는다. 같은 호주 백인이라서인지 남편과는 대화를 잘 풀어가지만 나에게 먼저 말을 잘 걸지 않는다. 처음에는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괘씸했지만 쿠온이 전하는 말에 의 하면 엄마가 너무 무서워서라고 한다. 동양인과 대화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 이다. 모르기 때문에 어렵게 생각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월드는 먼 세계인 듯하다.


내가 가졌던 서양사회의 또 다른 편견은 서양아이들이 이성 친구를 일찍 사귀고 성 관계가 문란하다는 것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호주의 남학교에서는 운동을 많이 시킨다. 사춘기의 넘치는 호르몬을 땀으로 빼고 우울증도 해소시키기 위한 것이다. 운동을 좋아하는 쿠온은 학교 스포츠로 힘을 다 쓰기 때문인지 귀가하면 많이 먹고 일찍 잠들었다. 남자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해 여자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어 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쿠온의 친구들도 십대 후반이 되어서야 여자 친구를 사귀기 시 작했다. 쿠온의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올 때마다 나는 여자 친구 있냐고 묻는다. 그들의 이성 관계에 대한 나의 호기심이 몸 밖으로 튀어나온다. 진짜 궁금하다. 그럴 때마다 쿠온은 나를 친구들 주변에서 몰아내며 한국 아줌마처럼 굴지 말라고 한다. 여자 친 구가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인데 왜 한국을 들춰내는지 알 수가 없다. 한국 아줌마와 아들 친구의 여자 친구간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단순히 한국 아줌마는 남의 사 생활에 호기심이 많다는 것인가. 한국 아줌마는 아들의 친구에 관심이 많다는 것인 가. 쿠온이 한국적인 것(Korean thing!)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 데, 한국적 인 것을 얼마나 잘 알고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쿠온이 말하는 한국적인 것의 절정은 ‘빨리 빨리’다. 쿠온은 한국 김치는 좋아하지 만 행동은 아빠를 닮아 호주 스타일 ‘느리게 천천히’이다.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 는 하루에 많은 것을 하려고 서두른다. 남편과 쿠온의 모토는 ‘하루에 한 가지’씩 하는 여유 있는 여행이다.


어쩌다 쿠온이 운전하는 차를 타면 앉는 순간부터 답답해진다. 출발하기까지 시간 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쿠온은 우선 좌석을 다시 조절하고 유리창도 한번 닦 아준다. 그리고 휴대폰을 한참 스크롤한 후 음악을 고른다. 음악이 둥둥둥 나오면 조 금 들어보다가 기분에 맞지 않으면 몇 번이고 바꾼다. 몸이 덩실되는 음악이 나오면 그제야 출발한다. 나는 운전석에 엉덩이가 닿으면서 시동을 걸고 운전을 하면서 음악 을 고른다. 그래서 항상 마음이 바쁘다. 쿠온은 집에서 요리를 할 때도 음악을 준비하 는 시간이 한참 걸린다. 야채를 썰 때 듣는 음악과 볶을 때 듣는 음악이 다르다. 내가 빨리 시작하라고 닦달해도 쿠온은 음악을 들으면서 요리를 하면 일의 기쁨이 2배가 된다며 선곡을 바꾼다. 내 속에서 불이 몇 번씩 붙었다 꺼질 즈음에 식사 준비가 끝난 다. 요리는 입도 대기 전에 벌써 식어있다.


호주인 남편과 쿠온이 싫어하는 나의 ‘빨리 빨리’는 우리를 곤경에서 구출해주었다. 아이슬랜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공항에서 우리는 얼어버렸다. 출구까지 늘어서 있는 체크인 줄 때문이다. 시간 여유를 두고 출발했지만 렌트카를 돌려주는 데 오래 기다려야했다. 갑자기 불어 닥친 아이슬랜드 관광 붐 덕분에 작은 공항이 더 이상 컨 트롤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줄을 서서 기다렸지만 이대로 가다간 비행기를 놓칠게 뻔했다. 내가 안절부절 못하 고 있을 때 남편과 쿠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태연한 척하고 있었다. 이민국의 줄은 줄어들 줄 몰랐다. 내가 앞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양보해달라고 하자고하니 남편은 모두 바쁜 사람들이이니 차분하게 기다리자고 말했다. 얌전하게 기다리다가 비행기 를 놓칠 판이었다. 아이슬랜드의 날씨도 예측불가지만 다음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이 걱정되었다. 전날 폭풍우 때문에 공항에 갔다 비행기가 뜨지 못해 돌아온 여행자들 을 식당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앞에 서있는 한 사람 한사람에게 내 비행기 시간 을 말하며 먼저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보를 해주었다. 뒤에서 나를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서있는 두 사람에게 손짓에게 ‘빨리 빨리’ 앞으로 오라고 했다. 체면 불구하고 머리를 휘날리면서 앞서가는 나를 따라오던 그들은 세관 을 통과할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날처럼 열심히 뛴 날은 내 생애에 없으리라. 다행히 비행기는 놓치지 않았다. 그 날 비행기를 놓쳤다면 비바람 부는 아이슬랜드로 다시 나가야 했을 것이다. 다음 비행기를 탈 때까지의 수고는 한국인 아줌마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덜어진 셈이다. 그 후에도 우리 가족은 몇 번이나 나의 재치 있는 ‘빨 리 빨리’로 위기를 모면했다.


쿠온이 손에 꼽는 또 한 가지 한국 아줌마의 특성은 교육열이다. 한국 엄마를 뿐만 아니라 아시아엄마들 공통의 특징이다. 호주 사회에서 혹독하게 자녀를 교육하는 중 국을 비롯한 아시아인 엄마를 타이거 맘(Tiger Mum)이라 부른다. 넌 더 잘 할 수 있 어, 넌 더 좋은 학교에 갈 수 있어, 더 나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어, 더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 있어 라며 더 잘하라고 자녀를 압박하는 게 아시아인 부모라는 통념이 아쉽 고 부끄럽기도 하다. 이민자로서 그 사회의 주류에 진입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성적을 잘 내는 방법밖에 없다는 이민자 부모의 심정에 공감하지만 공부만 잘 하는 아이로 키우는 교육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내 친구의 아들이 호주에서도 손꼽히는 기업체의 사장이 됐다는 소식을 쿠온에게 기쁜 마음으로 전했다.
“엄마 친구 아들이 대기업의 CEO가 됐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야.”
아무 속뜻 없이 쿠온에게 한 말이다. 할아버지 무덤에 대고 맹세할 수 있다. 그러나 쿠온은 한국 아줌마들은 자식들을 비교한다며 빈정거렸다. 나는 다른 집 아이를 비교 해서 자극시킬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쿠온에게는 부담스러운 말이었다. 내가 원했던 엄마의 이상은 코끼리 엄마처럼 옆에 서서 보호하고 격려해주는 동반자였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쿠온에게 어떤 역할에 대한 기대를 내보였을 수도 있다. 쿠온이 어렸을 때는 음악학원도 열심히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얼마 후 쿠온은 확실하게 음 악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다. 쿠온이 거절한 음악에서 내 인생의 한 페이지 가 찢긴 기분이 들었을 때 나는 알았다. 자식을 통해 다시 살고 싶은 내 꿈이 보였던 것이다. 자식이 내 인생을 다시 살게 하기위해 나는 내 시간과 쿠온의 시간을 낭비하 고 있었다. 남의 집에 들여놨던 한 발을 빼야했다. 엄마의 욕망을 위한 시간이 쿠온에 게는 없었다. 그러니 한국에서 내 부모가 나에게 교육을 시키며 기대했던 은근한 보 상감이 내게도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쿠온이 나를 한국적으로 규정하는 또 한 가지는 의사 표현이다. 자기 의사를 뚜렷 이 표현하는 서양식 교육을 받은 쿠온은 나의 침묵을 이해하지 않는다. 서로 부딪치 는 일이 생기면 바로 대화로 푸는 그로서는 감정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할 수밖에 없다.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나는 입을 다물어버리기 때문이다. 말로 흘려버 리지 않으면 감정이 정체되어 관계가 썩어버릴 수도 있다. 사실 나는 말을 많이 하는 것도,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내 경상도 한국 가족의 정체 성은 말없음표이다. 그런 내가 인간관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화라고 생각하는 사 회에 살고 있다. 나는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것보다 머릿속 생 각의 방구석에 앉아 화해의 시간을 기다렸다. 이제 생각은 함께 나누는 대화라는 것 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내가 나서서 표현하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사실 말을 해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말도 안하는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할 수 있을까. 눈빛만 봐도 아는 것이 절대 아니다. 돌려서 말해도 안 되고 자세히 말해야 조금 알게 된다. 조목조목 짚어가며 대화를 하면 오해도 풀리고 관계가 개선되기도 한다. 그래 서 말을 더 많이 하는 가족 안에서 자란 아이들의 행복도지수가 높다고 한다. 관계는 그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직도 배우는 중이다.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특히 바다를 건너 와서 만난 다른 인종 다른 나 라 사람을 가족을 두는 일은 타고난 성격조차 바꾸어야만 가능하다.


쿠온의 친구 루카스의 엄마는 칠레인이고 아빠는 아르헨티나인이다. 자부심이 강 한 아르헨티나인답게 루카스의 아빠는 떠나온 고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만날 때 마다 강조한다. 호주와 비교되는 아르헨티나의 우월함을 열성적으로 토해낼 때마다 그가 왜 호주로 이민을 왔는지 궁금할 때가 있을 정도다. 몸만 호주에 있고 마음은 항 상 고국에 살고 있다.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고 하는 데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 다. 자식이 성장하여 그만의 가정을 이루고 독립할 때, 아니면 고국에 돌아가 편안하 게 먹고 살 정도의 경제적 풍요를 갖추었을 때일 수도 있다. 고국을 떠난 이민자들은 항상 돌아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곳 고향이 그들의 자존심이며 가슴 깊 숙이 남아있는 존엄함이다. 나의 선배들도 나이가 더 들면 남은 생을 한국에서 보내 고 싶다는 사람이 많다. 양로원은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호주 양로원에서 매 일 아침 빵과 버터를 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루카스의 부모는 호주에서 삼십년 넘게 살았지만 남미에서 살던 방식 그대로 생 활한다. 매일 고향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비디오 통화를 한다. 음식도 남미식이 며 교류하는 친구들도 스페인어로만 말하는 남미사람들이다. 다양한 인종들의 조화 로 우뚝 선 호주라는 큰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지가 모두 따로 뻗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중국인끼리 모여 사는 동네로 모이고 한국인들 역시 그들만 의 그룹을 이룬다. 중국인들이 이십오 퍼센트 이상이 되면 호주 백인들은 자연스럽게 그 동네를 떠나 백인들이 더 많은 동네나 아예 이민자들이 없는 시골 동네로 이사를 간다. 도서관이나 헬스클럽 같은 공공시설도 마찬가지다. 내가 다녔던 헬스클럽안의 줌바클래스에는 십 년 전만 해도 백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최근 중국 이민자들이 시드 니의 집을 대거 구입하여 이민을 온 후 클래스에는 중국인들이 늘어났다. 중국인들이 사십 퍼센트 정도까지 클래스를 차지하게 되자 백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다 민족 사회가 잘 섞여있는 것 같지만 사실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다. 동양인들만이 아니라 남미나 아프리카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만의 가지를 치고 산다. 다양한 길이와 두께의 가지들이 뻗은 큰 나무는 햇빛이 좋고 비가 잘 내리면 아무 문제없이 잘 자란 다. 그렇지만 태풍이 불고 산불이라도 나면 흔들리고 꺾이고 떨어진다. 코비드19같은 불상사가 생기면 다른 인종을 의심하고 다른 지역에 책임을 전가하는 현상이 발생한 다. 존재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던 벽이 서서히 형태를 드러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루카스의 부모는 선천적으로 유쾌한 바이러스를 타고난 사람들이다. 그들과 어울 리면 남미인 특유의 쾌활하고 시끌뻑쩍한 분위기 속에서 나조차 정신을 잃을 정도로 즐거워진다. 쿠온과 마찬가지로 호주에서 태어난 루카스는 이런 부모를 이해하지 못 한다. 오랜 세월을 호주 사회에 살면서 좀처럼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호주인 여자 친 구들을 사귀게 되면서 루카스는 그의 부모에게 공식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루카스 의 엄마는 아들의 불만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나에게 말해주었다. 첫째로 남미 사람 들은 너무 말이 많고 시끄럽다. 다음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없어서 창피하다 고 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감사하다는 말을 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 불만에 나는 앗 하는 동질감을 느꼈다. 쿠온이 한국인 엄마에게 했던 불만이기 때문이다. 남 미도 한국처럼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문화는 아닌 듯하다. 호주 사람들은 내가 감사한 일도 자신들이 감사하다고 먼저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냥 쉬지 않고 입 에서 나오는 말이 ‘땡큐’이다.


내가 호주에 처음 정착했을 때 ‘땡큐’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서양 사회의 에티켓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만큼 자주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쿠온이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식탁에서 내가 떨어뜨린 나이프를 쿠온이 주워주었 다. 무심코 받아들고 식사를 계속 하는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쿠온은 또박또박 말했다.
“엄마, 세이 땡큐”

쿠온이 어렸을 때는 가게나 식당 같은 곳에서 내가 무의식적으로 땡큐라는 말을 잊 어버리고 돌아서면 항상 옆에서 쿡쿡 찌르며 세이 땡큐라고 속삭여 나를 무안하게 했 다. 남이 나를 위해 한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적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본다. 내가 떨어뜨린 젓가락을 셀 수 없을 만큼 주워주었던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감사한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깨닫게 된 지금 내 옆에는 엄마가 없다. 감사 를 느낄 때 오는 충만한 행복감은 고맙다는 말로 표현될 때 더욱 커진다.


마음속으로 감사하면서 말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감사하 는 마음은 반드시 표현해야한다는 것을 아들에게 배웠다. 서양인 아들이 한국인 아줌 마에게 해준 가장 감사한 말은 ‘세이 땡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