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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엄마와 나와 노르웨이 할머니들
작성일
2022.01.07

체험수기 - 가작

엄마와 나와 노르웨이 할머니들

한 은 옥 [노르웨이]


나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던 날, 싱싱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백발의 할머니를. 그러면서 한국에 계신 엄마가 떠올랐 다. ‘우리 엄마도 저렇게 자전거를 타셨으면...’
부러웠다. 건강하게 자전거를 타시는 할머니가. 외롭게 혼자서 방에 계신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아프다.

노르웨이에  살면서도 한국의 뉴스 기사를 빼놓지 않고 읽는 것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이라서 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엄마가 한국에 계시기 때문인 이유가 크다. 사랑하는 엄마가 계신 곳이 행복하고 안전한 곳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언젠가 뉴스에 백발의 노인이 자전거를 타신 기사가 난 것을 읽은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에 서는 어르신이 자전거를 타시는 것은 뉴스에 나올 정도로 드문 일이지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노르웨이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자전거를 타고 운 동을 하고 서로 교류하고 사회에서 활동하고... 돈을 버는 일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사 회에서 활동한다. 그것이 그 들의 일상이다.

살면서 노르웨이는 한국과 다르고도 비슷한 면이 참 많다는 걸 깨닫는다. 그럴 때 마다 기쁘고 즐겁다. 다르지 않다는 데 큰 위안을 얻는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해... 다르고 익숙하지 않은 것은 힘들고 불편하다. 뭐하나 쉬운 것이 없다. 아주 사소한 것도 다 다시 배우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어른이 되어서 배운다는 건 젊었을 때 보다 더 많은 노력과 세심함이 필요하다. 처 음에 노르웨이 슈퍼에 갔는데 뭐하나 살 수가 없었다. 만국 공통어인 그림으로 판별 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다. 비슷비슷한 그림들.

설탕을 사려고 해도 노르웨이어로 쓰여 있어서 잘 구분할 수 없었다. 영어와 다른 언어. 물론 노르웨이 사람들은 영어를 아주 잘한다. 직원에게 영어로 물어봤다면 좀 더 쉬웠을 수 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노르웨이에 살게 되었으니 노르웨 이어를 배워볼 양으로 갖은 노력을 했으나 쉬운 게 아니었다. 한국어와 비슷하게 노 르웨이어는 노르웨이에서만 쓰인다. 문맹의 불편함이 이런 것이구나, 느꼈다. 역시 사람은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해. 그 당시 난 마트에서 신문을 사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한국에선 신문을 읽는 것은 아주 쉽고 평번한 일상이었는데, 이 곳 노르웨이에선 글을 모르니 신문을 사는 게 의미가 없었다. 글을 배워야겠다고 생 각했다. 노르웨이어를 배우고자 학원도 다니고 도서관에서 하는 언어 모임에도 나가 기 시작했다. 도서관의 노르웨이어를 배우는 모임은 자원봉사자들로 활동으로 이루 어지는데,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노르웨이어를 배우는 데 도움을 준다. 나는 거 기에서 아주 멋진 할머니를 알게 되었다. 우리 그룹의 리더 할머니는 60대 후반의 여 성으로 아주 열정적이었다. 어눌한 노르웨이어를 하는 다른나라 사람들을 아주 잘 이 해했으며 노르웨이에서 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소한 것들도 많이 알려 주었다. 예를 들면  가족들이 쉬는 일요일은 소리가 크게 나는 집안일은 하지 말 아야 하는 것 같은 것. 잔디 깎는 것도 소리가 큰 기계를 사용할 경우 평일에 해야 한 다고 했다. 내 생각으로는 시간이 많은 쉬는 날 하는 게 더 일반적일 것 같았는데... 사는 곳이 다르니 생각도 달라져야 했다. 예전의 살았던 방식은 잊고 새롭게 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노르웨이어를 잘 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조금 의사소통 을 할 수 있게 되자, 나는 한국에서 해왔던 봉사가 하고 싶어졌다. 노르웨이는 복지국가라 어려운 사람들이 없을 거라 많이들 생각하겠지만, 사람이 산다는 건 즐겁고 행 복한 일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는 게 아닐까. 인생은 희로애락 생로병사 가 아니겠는가. 나의 생각을 아는 노르웨이 자원봉사자 할머니께서 하루는 내게 노르 웨이 노인 봉사 단체를 소개해 주셨다.

처음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봉사자 모임에서의 첫날은 참 인상적이면서도 어 색했다. 멋지고 소박하게 꾸며진 큰 탁자에 들러 앉아 계신 열 명 정도의 할머니들... 외국인은 나 한 사람. 노르웨이 사람들은 보수적이라 한다. 과하게 친절하지도 않고 오히려 무뚝뚝한 편이다. 미국인처럼 sorry를 많이 사용하지도 않는다. 우연히 마주 쳐도 미소를 짓는 편이 드물다.

하지만 노르웨이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처럼 진국이라 한다. 정직하고 순박하다. 전 통적인 노르웨이 할머니들이 모인 모임에 나간 나는 정말 어색했다. 그 모임에 모인 할머니들의 나이는 60대부터 80대 후반까지 다양했다. 정년퇴임을 하신 사람들이 대 부분이었지만, 치과 의사로 활동하고 계신 분도 계셨다. 그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 정 기적으로 같은 장소에 모여 봉사활동을 하셨다. 주로 대 바늘로 뜨개질을 하셨다.

큰 탁자에 둘러앉아 정말 예쁜 소품들을 뜨셨다. 고등학교 때 떠보고 한국에서 뜨 개질을 하지 않은 나는 그 할머니들로부터 기초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할머니들 은 몇 십 년 동안 계속하셨기 때문에 보지 않고도 정말 잘 뜨개질을 하셨다.

주로 만드시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이 태어난 지 몇 개월 내에  아기들이 갖는 세 례식에 쓰이는 예쁜 양말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백일 행사 같은 것... 거기에 쓰이 는 축하 용품이었다. 하얀 양말에 노르웨이 색인 빨강과 파랑을 넣어서 만드는 특별 한 양말이었다. 이 양말을 만들어 크리스마스 전에 파시는 행사를 하셨는데, 그 수입 원으로 돈을 마련해 여러 곳을 도우셨다. 한 켤레에 이 나랏돈으로 100크로네. 우리 나라 돈으로 만 삼천 원 쯤 하니까 꽤 비싼 편인데도 잘 팔렸다. 나는 어려운 소품은 못 만들고 쉬운 것을 배워 연말에 내가 만든 작품을 내놓아 팔아서 모금을 하는데 도 왔다.

그분들은 그 활동은 하면서 네다섯 시간을 함께 하는데,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과 뉴스에 난 일들에 대한 자기 생각들을 말씀하시고 의견을  나누셨다. 그리고 각자 자 기 도시락을 가지고 참석하셔서 일을 마치고 식사를 함께 하셨다. 빵에 치즈와 오이 파프리카를 얹은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 그분들 중에 한 분은 함께 먹을 빵을 구워 오시는데, 약속을 하거나 정해진 순서가 없는데도 어느 한 분은 꼭 함께 먹을 빵을 구 어 오셨다. 정말 신기했다. 소박한 점심이지만 탁자에 식탁보를 깔고 촛대에 초를 켜 고 냅킨을 예쁘게 접에서 식탁을 준비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나이가 많으신 데 도 단정하게 옷을 입고 오셨으며 앉으실 때도 반듯하고 꼿꼿하게 앉으셨다. 함께 먹 을 빵을 돌아가며 잡으실 때도 빵 귀퉁이부터 고르시는 모습을 보면서 작은 것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좋은 것을 남겨 놓는...
처음의  어색함이 시간이 흘러 나도 그 봉사 단체에서 3 4년을 활동하면서 그 할머 니들과 함께 할 때 한국에 계신 엄마를 늘 생각했다.

내가 그 봉사 단체에 열심이고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할머니들 속에서 나의 엄마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일 거다. 일주일에 한번 그분들을 만나러 가면서 난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분들을 위해 빵을 구워가고 한국 음식을 만들어 가 는 과정 속에서 아마 난 엄마를 생각해서 더욱더 정성을 쏟아 음식을 만들어 갔을 것 이다. 엄마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그분들이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봉사를 하기 위 해 모였지만, 그분들도 역시 외로운 노인들이었다. 노르웨이 전국에서 일 년에 한번 모이는 정기 총회 때는 삼십대의 젊은 층도 있었으나, 일주일에 한 번 모일 때는 내가 제일 젊었다. 난 그 봉사 모임에 가서 그 할머니들을 섬겼다. 그리고 나이 많으신 어 른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삶에 대한 자세와 어려울 때 힘들 때 외로움을 극복 하는 방법 등. 정말 나라가 달라도 사람의 마음은 비슷했다.

그 모임에 나오시는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혼자 사시는데 정기적으로 모여서 이야 기를 나누고 서로의 삶에 대해서, 생각에 대해서 들어주고 공감하는 시간들에 동참 할 수 있어서 나도 참 행복했다. 어른들의 지혜로운 이야기를 듣는 건 유익하고 즐거 운 일이었다. 노르웨이에 살면서 나도 외롭고 힘든 일이 많았는데 그 모임에 나가서  참 많은 치유의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외국에 살면서 의식주 생계에 대한 고민도 크 지만, 나처럼 남편 따라 나와 외국에 살 경우, 직업도 없고 소외되고 우리나라 사람만 만나고  사는 나라에서 문화적 고립된 생활을 할 경우 정신적인 문제도 큰 것 같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은가. 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그 모임을 통해 노르웨이 사회를 알아가고 문화와 풍습을 알아가고 배웠다. 내 곁에 이처럼 훌륭한 어른이 여럿 계시다는 건 큰 행운이었다. 그분들의 모 습을 통해서 말이 아닌 공부를 통해서가 아닌 산 경험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일 년 동안 열심히 만든 작품들은 연말에 파는 날이 왔다.

노르웨이 할머니들과 나는 며칠 전부터 팔 물건들을 전시할 장소를 청소하고 꾸미 고 가꿨다.  정말로 한 분도 늦으신 분이 없이,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일찍 오셨다. 무 거운 탁자를 옮길 때도 서로가 조심스럽게 힘을 합쳤다. 몸이 불편한 분도 계셨기 때 문에 항상 천천히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그렇다고  어느 분도 앉아서 계시지만은 않 으셨다. 아픈 다리를 끌며 힘을 보태기에 주저함이 없으셨다. 누구 한 분도 자기의 불 편함이나 아픔을 보이기보다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셨다. 나는 상대적으 로 젊었기 때문에 무거운 것들을 들어 옮기려 애썼고, 그럴 때마다 할머니들은 나를 flott dame--좋은 사람이라고 치켜세워주셨다. 내가 실수를 할 때도 지적하시는 일 이 없었다. 내가 부끄러워할까 봐 조용히 다른 사람이 보지 않게 고쳐 놓아 주셨다.
일 년 동안 만든 작품들을 팔기 위해 마을마다 전봇대에 전단지를 붙이고 바자회 일정을 알렸다. 이 단체는 100년 이상 된 노르웨이 봉사 단체로 매년 지부마다 이 행 사를 여는데, 가족 잔치 같았다. 할머니가 회원이고, 딸이, 그리고 손녀가 회원이 되 었다. 근래는 젊은 사람들의 회원 수가 적어 어떻게 하면 회원 수를 증가시킬 수 있을 까 논의한 적도 있었다. 할머니가 만든 작품을 기쁘게 사고, 만든 음식들을 맛있게 사 먹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도 우리 가족들과 함께 와 이 축제를 즐겼다.

한국에서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어버이날이면 동네 노인정을 찾아 간단 한 다과와 과일을 준비해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뵙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서툴지만 배우고 있는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을 연주해 드렸는데 무척 기뻐하셨던 기억이 있어서 이 행사에도 우리 아이들을 참여 시키고 싶어서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셨다. 엄마가 매주 나가는 봉사 단체라 우리 아이들도 무척 궁금했을 것이다.

남편과 아이들이 함께 와서 행사에 참가하고, 우리 아이들은 바이올린과 클라리넷 을 연주해드렸다. 이 행사는 모금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본인들이 만든 케이크와 커 피 등을 모두 돈은 내고 사 드시는데, 우리 아이들에게는 케이크, 과일과 주스 등을  풍성히 무료로 주셨다. 역시 어느 나라에서든 할머니들의 손주 손녀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이렇게 모은 돈은 노인 복지 미혼모 장애인 등을 돕는데 쓰였다. 다 른 사람을 돕는 목적도 크지만 어르신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고 립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삶. 나누는 삶. 노인들의 이런 활동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었 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렇게 70,80세가 되어서도 모임을 가지려면 젊어서부터 훈 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을 위한 봉사 활동을 하면서도 구청의 지원을 받아 일 년에 몇 차례 작가를 초 청해 좋은 책을 소개받는 행사도 가졌다. 새로 나온 신간들, 그리고 좋은 책을 할머니 들께 알려주시고 퀴즈를 통해 책들을 나눠 주셨다. 내게도 쉬운 동화 같은 책을 선물 로 주셨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함께 하는 일, 관심사를 공유하는 거는 참 행복한 일 이었다.

우리 엄마도 책을 읽으실까... 우리 엄마는 참 텔레비전을 좋아하신다.
그래서 아는 것도 많으시고 유식하시다. 엄마는 친구보다, 남편보다, 텔레비전이 더 좋은 친구라고 말씀하신다. 항상 곁에서 함께해 주는...
그런데도 많이 외로우시다. 많은 정보가 외로움을 대신해 줄 수 없고 함께 하는 즐 거움을 대체할 수 없다. 우리 엄마에게도 이런 즐거운  정규적 모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늘 있었다.

이 봉사 단체는 일 년에 한번  함께 바깥나들이를  뮤지엄이나 유서 깊은 장소를 하 루 코스로 다녀왔다. 나와 할머니들은 이 나라 전래동화를 테마로 하는 뮤지엄을 갔 었는데, 손자 손녀들이 읽는 동화 속 인물들을 인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나도 책으로 읽었는데, 실제 상황으로 만들어 놓은 걸 보니 훨씬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어른인 나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아이들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싶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이 여행을 생각하면 동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르웨 이 할머니들과 나는 어린아이들처럼 즐거워했다. 만들어놓아진 인형들의 얼굴 표정 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고,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니 보고 있으면 절로 웃 음이 터져 나왔다.

뮤지엄을 관람하고 웃는 가운데 점심시간이 되었다. 노르웨이 할머니들은 matpakke라고 거의 개인 점심을 싸가지고 다닌다. 좀처럼 점심을 사 드시지 않는
데, 그날은 외식이었다. 우리는 근사한 연어 스테이크를 먹으며 즐거워했다. 후식으 로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께서 따사로운 햇볕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드시는 모습은 굉장히 사랑스러워 보였다. 이빨이 시리지도 않 으신지, 어린아이처럼 행복하게 드셨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을 굉장히 좋 아하고 사랑한다. 눈의 민족이라 그런지, 추운 겨울에도 노인분들이 아이스크림을 맛 있게 드시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5월에 구청에서, 또는 아파트 마다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나 식사 대접 여행을 하는 것을 봤다. 여기 노르웨이도 비슷한 문화가 있는 게 신기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몇 달 전부터 할머니들 스스 로 계획하고 돈을 내서 여행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복지겠지... 여기 노인분들은 젊 은 사람들보다 여유가 있으시다고 한다. 복지 연금이나 퇴직 연금으로 생활하시는데, 대부분 넉넉하시다. 그렇다고 돈을 절대 함부로 쓰시지는 않는다.

음식에 있어서도 매우 철저하시다. 모임에서 남은 빵은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그다 음 모임에서 다시 드신다. 음식을 버리시는 걸 난 본 적이 없다. 그날 음식점에서 음 식을 먹을 때도 소스까지 빵에 꾹꾹 찍어 전부 다 드셨다. 물론 나도 소스 국물까지 다 먹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음식물 버리는 것에 엄격했지만 여기 노르웨이에 와서는 더욱 음식물 버리는 게 없다. 예를 들면 삶은 감자를 먹을 때도 껍질째 다 먹는다.

맨 처음에 먹을 때는 껍질이 입안에서 돌아다녀 넘어가지 않더니만 요즘은 익숙해져서 껍질이 맛있다. 어쩌다 껍질 없는 삶은 감자를 먹으면 허전하고 이상하다. 이렇 듯 사과도 배도 포도도 거의 모든 과일을 껍질째 먹고, 음식도 딱 먹을 만큼만 해서 먹으니 버리는 게 거의 없다. 이것도 봉사 모임을 통해 배웠다. 봉사라고 말하지만 내 가 봉사 모임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말로 배우는 게 아니라 그분들의 성품에서 배운 것은 바로 내 몸에 체득되 행동으로 이어졌다.

우리 봉사 단체는 또한 일 년에 한 번 fastelavn이라는 행사 일부로  부활절 전에 자작나무에 색색으로 물들인 깃털을 꾸며 파는 일을 했다. 자작나무 가지를 꺾어 화 려한 깃털로 장식한 것을 화병에 꽂아 놓으면,
봄이 올 즈음 집의 거실에서도 나뭇가지의 초록색  잎을 볼 수 있었다. 이것으로 봄 이 오는 것을 알 수도 있고 이 자작나무의 역할이 우리나라 회초리와 비슷한 것이어 서 -물론 체벌용으로 사용된 건 절대 아니지만-때론 훈육의 목적으로 거실에 전시되 기도 한다고 한다.

봉사 모임의 할머니들이 2달에서 3달 걸려서 만든 이 자작나무의 나뭇가지들을 팔 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이 놀라웠다.
이 자작나무 가지를 사는 게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라 생각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색색의 자작나무들을 샀다. 이 봉사 단체는 전통적으로 노르웨이 사람들 에게 신뢰를 받고 있어서인지 아주 기쁘게 팔려 나갔다.
더 놀라운 건 나랑 팔러 나오신 할머니 두 분 다 꼿꼿하게 대여섯 시간 동안 서 계 신 것이다. 젊은 나도 다리가 아파 좀 앉으시라 말씀드리면 서서 파시는 게 예의라 말 씀하셨다.
꼿꼿한 성품은 꼿꼿한 마음에서 나오는 거라 생각되었다. 왜 다리가 안 아프시겠는 가. 몸을 지탱해 주는 마음이 강한 게 아닐까.
다리가 아픈 엄마가 생각났다. 우리 엄마, 아마 활동을 안 하셔서 더 다리가 아프실 지도 모르겠다. 외롭게 혼자 계셔서 꼿꼿한 마음이 약해지셨나 보다. 난 이 어르신들 을 보면 늘 사랑하는 엄마가 생각났다.

노르웨이에 살면서 젊은 사람들보다 노르웨이 할머니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 냈다. 나이가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생김새가 달라도 난 그 모임에서 세대차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 모임에 갔다 온 날은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마음이 평화로웠으며 외롭지 않았다. 전통을 중요시 여기는 할머니들을 통해 삶의 진지함을 배웠고 순응함 으로 얻어지는 평안함도 알았다.

이렇게 봉사 모임을 이어가던 중, 작년에 코로나로 인해 모임이 중단되었다. 연세 가 많으신 분들이 다수이다 보니 더욱 건강에 조심스러웠다.
노르웨이도 코로나 확진자가 다수 발생하였고, 모든 노인분들이 계신 곳은 면회가 중단되었다. 뉴스에서도 되도록 집에 있기를 권고하였으며 상점들도 문을 닫았다. 밖 에 나가는 일이 줄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혼자 계신 엄마가 더욱 생각났다. 외롭게 혼자 계실 어머니...
이 긴 시간을 혼자서 어떻게 감당하고 계실까... 젊은 나도 이렇게 힘든데... 이 고 립된 멈춰진 시간들... 시간이 지날수록 시간의 무게는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봉사 단체 회원 중 한 분인 엘사라는 분한테서 문자가 왔다. 우체통 에 노르웨이 책 한 권과 노르웨이 풍경으로 만들어진 새해 달력을 넣어 놓았으니 가 져가라고...

우리 집 주소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셨을까. 그분은 운전을 못하신다. 항상 모임에 나오실 때도 남편분이 차로 태워오고 태워 가셨는데 우리 집에 책과 달력을 배달하셨 을 때도 함께였을 것이다. 코로나만 아니면 우리 집에 들어오시게 해서 차라도 대접 했을 텐데... 코로나 상황 중에도 나에게 노르웨이에서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 주셨 다. ‘내가 너를 기억하고 있어’,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 책상 앞, 벽에 걸린  노르웨 이 사시사철의 풍경을 담은 달력을 보면서 나도 엘사 할머니를 생각한다. 이 외롭고 힘든 코로나 시대에 더욱이 외국에서 서로에게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음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해 주는 건 얼마나 살맛 나게 하는 일인가.

노르웨이에 있는 우리 집에 개나리가 화사하게 활짝 피었다. 내가 한국에서 어렸을 때 보았던 해가 많이 드는 곳에 활짝 피었던 개나리와 똑같은 ... 노르웨이에 피는 개 나리의 원산지는 대부분 한국이라고 한다.

처음 노르웨이로 간다고 했을 때 엄마는 걱정을 많이 하셨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딸을 위해서 두꺼운 이불을  잔뜩 준비해 주셨다.

문화도 낯설고 자연도 다른 환경에서 어렸을 때 보았던 똑같은 꽃을 보았을 때의 경이로움. 비행기로 열 시간쯤 떨어진 곳에서도 봄에 회사한 개나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리고 한국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이 노르웨이에서 할 수 있을 때 한 국에 있는 것처럼 마음에 좋았다.

요즘 코로나로 행동의 제약이 많아서인지 가까운 주변 환경이 눈에 잘 들어온다.  주변을 자세히 잘 살펴보면서  한국의 고산지대의 음지에서 잘 자라는 산나물의 일종인 참나물이 집 근처에 흐드러지게 자라고 있는 걸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먹었던 것 처럼 나물로 무쳐서 밥과 함께 먹으니 한국의 평창에 온 것처럼 좋았다. 노르웨이에 사는 한국 몇몇 사람들은 봄이 되면  고사리, 명이 나물을 따러 간다. 평상시에도 먹 긴 하지만, 제사상에 빠지지 않는 고사리를 여기 노르웨이에서 먹게 될 것을 상상이 나 했을까. 더욱이 울릉도 특산물인 명이 나물까지... 같은 일을 다른 장소에서 경험 하는 일은 신비로운 일이다.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노르웨이 할머니들의 사랑으로 극복한 것-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인가.

내가 다시 한국에서 살게 된다면 이 노르웨이 할머니들의 사랑으로 인해 노르웨이 를 따뜻한 나라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한 가 보다. 환경이 아무 리 사람을 힘들게 하더라도 따뜻한 사람들이 살면 그곳은 따뜻한 곳이 된다. 내가 지 금 이곳 노르웨이에 살고 있더라도 내 마음의 일부는 항상 엄마가 계신 한국에 살고 있으며, 노르웨이 할머니들과 우리 엄마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있는 한, 난 어디서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