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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멕시코의 태양 아래에서
작성일
2022.01.07

체험수기-가작

멕시코의 태양 아래에서

정 갑 환 [멕시코]


에크모 기계를 장착한 채 투명 비닐 상자에 창백하게 누워있는 아내를 에어 엠뷸런 스에 태워 한국으로 보내고,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심정은 착잡했다. 흐린 하늘 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쳐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멕시코의 태양 아래 에서 동분서주 살아온 20여 년 세월이 물에 비친 불빛처럼 흔들렸다. 멕시코에 집도 있고 사업체도 있고 아들, 며느리, 손자들이 살고 있지만 다시는 못 돌아갈 것 같은 서글픈 예감이 들었다. 2020년 8월이었다.



센트로 시장의 나비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천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부산에서 봉제완구 제조 수출업을 하다가 인건비 급상승과 사업 환경의 사양화로 폐업하고, 복잡한 마음에 시집을 뒤적이다가 형수 전화를 받고 시작한 이민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에스파뇰도 한 마디 모르지만, ‘멕시코’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감 전된 듯 짜릿했다. 그래서 나는 이튿날 지체 없이 LA행 비행기에 올랐고 멕시코시티 에 도착한 것은 1998년 11월 중순이었다.

깡마른 체구에 콧수염을 기른 영리하게 생긴 40대 중반의 마르셀, 그는 내가 만난 첫 멕시칸이었다. 완구 제조업을 하며 센트로 시장에서 도소매업을 하는 그의 가게 에 갔을 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오후 2시쯤 가서 7시 퇴근할 때까지, 손님 이 밀어닥쳐 돈 받느라고 정신이 없는 그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였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시내로 나가는데, 그야말로 인산인해, 70년대 명동 사보이 호텔 골목처 럼 사람들에게 떠밀려 갔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갑자기 돈이 되어 나비처럼 내 눈앞 에 훨훨 날아올랐다. 이 착시 현상은 시장을 벗어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어디서든 물 건만 갖고 오면 파는 것은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마르셀이 같이 원단 장사를 하자고 하여, 나는 한국으로 되돌아와 본격 이민을 준 비했다. 새롭게 시작하려니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수중에 있던 육백만 원에서 항공 발권 250만 원, 아내와 아들들과 짧은 여행, 장인 장모와 식사하고 아이들 용돈 을 주니 겨우 250만 원이 남아 있었다. 아내에게는 거의 맨손으로 간다고 차마 말을 못 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사업이니,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가자, 멕시코 드 림을 찾아서!


홀로 멕시코 이민
1999년 5월 8일, 나는 홀로 멕시코로 돌아갔다. 유명호텔에서 값싼 호텔로, 교민 집에서 한국인 하숙집으로, 다시 하루 만 원짜리 여인숙으로 옮기며 곶감 빼먹듯 줄 어드는 돈을 절약하려고 나는 안간힘을 썼다.

나는 그때 한국에서 원단 컨테이너가 도착하길 기다리며 오전 내내 에스파뇰 공부 하고, 오후에는 미국에서 완구 사업을 하는 형수가 적어준 외상장부를 들고 수금을 다녔다. 노점에서 저녁 요기를 하고 호텔로 돌아와 맥주 한잔하는 게 일과의 전부였 다. 노점에서 타코, 토르타, 께사디아로 하루 세 끼를 해결하니 속이 메스꺼워 한국 음식이 점점 간절했다. 편의점에 맥주 사러 가서는 말이 안 통해, 책 보고 문장을 써 서 다시 갔건만 거스름돈을 못 받아 고생하기도 했다.

스페인어를 외워 인사하며 나름 비즈니스맨 포즈로 수금에 나섰으나, 그 길은 험난 했다. 수금하러 오후에 가면 저녁에 오라하고, 저녁에 가면 내일 아침에 오라는 식으 로 며칠 동안 계속 뺑뺑이를 돌렸다. 그러다가 팔 물건이 떨어지면 수금을 약간해주 거나 수표를 주지만 은행 가서 추심하면 예사로 부도가 났다. 멕시코 은행은 통장이 없고 입금 증명서와 수표라는 형식의 출금 청구뿐이니, 은행에서 돈이 지급될 때까지 는 수금된 게 아니다.

수중의 돈이 다 떨어져 갔다. ‘궁하면 통한다’고 계산기 두드리며 BOLSA (Paper Bag)를 받아 팔았다. Paper Bag을 대량 구매하고 결제도 깔끔했던 상인을 만났고, 영리한 멕시칸 아가씨를 채용하여 영업을 하면서 매출이 늘어 참으로 고마웠다. 그 덕에 나는 5개월 만에 낡은 아파트로 옮겨 밥이라도 해 먹을 수 있었다. 또 운 좋게도 시장 정중앙에 창고를 얻어 BOLSA와 봉제완구 가게를 시작하였다. 작은 성취지만 환희심으로 가슴이 벅찼다.

기다리던 원단 컨테이너(보통 40피트에 원단 약 600롤 정도)가 도착하였으나 잘 팔리지 않았다. 자기 창고에 입고시켜준다는 마르셀의 친절(?)은 물건 빼돌리기 사기 로 마무리되었고, 나는 5만 불 손해를 보고 그와의 사업 관계는 끝났다. 막막했다. 이 날을 꼭 기억하리라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멕시코 완구공장으로 세일하러 다니 며 완구 제조업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결과는 불가, 믿었던 완구 제조업을 포기 하였다. 수입품 완구 판매도 쉽지 않아 페이퍼 백과 포장지, 자동차 방향제를 팔았다. 뭐라도 팔아 살아야 했다.


온 가족이 다시 만나
2년 후 아내가 멕시코로 왔다. 힘이 났다. 6개월 전에 온 아이들도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오랜만에 네 식구 모여서 오붓하게 식사도 하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저녁 마다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에스파뇰 공부도 하였다. 에스파뇰을 조금 익혔다고 애들 이 엄마에게 교습한다고 난리였다. 따뜻하고 행복했다.

아내는 그동안 생활이 얼마나 피곤했던지 내리 한 달을 잠만 잤다. 그리고 한 달 후 UNAM대 어학코스에 등록하였다. 아내는 사교적이어서 곧 유학생들의 왕언니가 되 고 유학생들이 우리 집에 한국 음식 먹으러 몰려오기 시작했다. 유학생들의 전공이 다양해서 아들 둘은 에스파뇰, 영어, 수학, 국어를 과외수업 받을 수 있었다.

아내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멕시코 최대의 연휴 SEMANA SANTA (부활절 연 휴)가 되었다. 모두 휴양지로 떠나고 텅 빈 도시, 우리 네 식구는 UNAM대 캠퍼스에 서 공놀이를 하다가 싸간 도시락을 먹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였다. 가난한 날의 행 복이랄까. 애들은 그때를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고,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고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고맙다.

아들 둘이 멕시코 학교에 다닌 지 1년이 되자, 에스파뇰을 제대로 구사하여  Bilingue Shool (이중언어학교)로 전학했다. 명문학교라고 수업료가 먼저 학교보 다 3배나 비쌌기 때문에 아내는 어학과정을 못 마친 채 이민 7개월 만에 시장으로 나 섰다. 전업주부와 학창생활을 병행하며 아내가 행복해 보였는데 다시 일을 맡겨 너 무 미안하였다. 아들 둘이 학비를 제때 못 내서 그 학교에서 꼴찌로 성적표를 가져오 자, 아내는 애들 기죽일 수 없다고 일수 빚을 내어서 학비를 마련했다. 일수는 이자가 20%인데 매일 원금을 함께 갚아야 하는 엄청난 고리채였다. 장사가 안 되어 하루라 도 일수를 못 찍으면 욕하고 고함치며 윽박질러서 아내는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가게를 옮겨 핸드백과 배낭을 받아 팔았다. 장사는 그럭저럭 되었는데 아내를 가볍 게 본 종업원들이 짜고서 도둑질을 많이 했다. 심지어는 자기 친구를 강도로 위장하 여 데리고 와서는 아내 머리에 총을 갖다 대고서 돈을 강탈해 갔다. 멕시코 전입 신고 식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초봄에 돋는 새싹처럼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데, 이번에는 집주인이 난데없이 권리 금을 6만 불을 요구했다. 사흘 안에 안 주려면 당장 나가라며 그는 아내 가게 매대와 진열상품을 길거리로 내놨다.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쇼 케이스를 끌고 쫓겨났다. 얼 마 후 내가 하던 가게도 내놓게 되어 졸지에 가게 두 군데를 다 잃었다. 멋모르고 온 낯선 땅, 아득하고 황량했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는지, 어렵사리 사거리 큰 건물에 가게를 구했다. 목이 좋아 오히려 장사가 잘 되었다. 다만 협소한 게 흠이었는데, 20m 전방에 좀 더 큰 점포를 계약금만 걸고 하나 더 얻었다. 부처님 가피력을 입었나? 가게 2개를 한 번에 잃더니 만 또 한참에 2개가 생겼다. 거액의 잔금을 치르느라 얼굴에 철판을 깔고 교민들에게 빌려오고, 사채까지 끌어다 썼지만 좋은 자리에 가게를 얻었으니 그나마 행운이었다. 어려울 때 기댈 곳은 역시 동포들뿐이었다.

수입 업체에서 받아 파는 상품은 한계가 있었다. 똑같은 제품으로 경쟁이 심해 마 진이 없으니 새 브랜드가 필요했다. LA에 있는 가방 수입업체로 가서 외상으로 한 컨 테이너를 가져왔다. NICKS CLUB이나 EVEREST 제품은 품질이 우수하나 가격이 비쌌다. 그때부터 싸구려 중국 물건들이 밀려오기 시작하니 물건이 잘 팔리지 않아 가방을 직접 가져오려고 중국으로 갔다. 잘 팔리는 백팩 샘플 몇 개를 친구 공장으로 가져가 선불만 내고 주문을 했다. 응원해 주는 친구가 있어 힘을 얻고 돌아왔다. 얼마 후 친구가 보내준 컨테이너가 '만사니요‘항에 도착했건만, 엉터리 통관사로 인해 일이 꼬이는 바람에 판매 성수기를 놓쳐버렸다. 나는 어찌 그리 돈 복이 없을까, 허탈하였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통관 자금을 뺏기지 않은 것이다.
그때 나는 하루하루 통관을 기다리느라고 통관 자금 20만 페소(약 2천만 원)를 가 게 금고 밑에 숨겨두고 있었다. 그러다 그날 아침, 거금을 가게에 두면 위험하겠다 싶 어 돈을 전부 긁어서 은행에 입금하였다. 1시간쯤 후, 6인조 권총강도가 들이닥쳐 두 놈이 내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머릿속이 하얘져 돈이고 물건이고 다 가져가라고 외 쳤다. 금고에는 동전만 있었다. 가게가 워낙 번화한 곳에 있으니 강도들도 급했던지 물건은 쌌으나 가져가지 못하고 핸드폰만 빼앗아 갔다. 천우신조였다. 부쳐야 할 물 건값도 많고 애들 학비도 버거운데 그 돈마저 뺏겼으면 어쩔 뻔했을까. 아찔했다.


아이템을 바꾸며 새로운 지평으로
큰아들이 대학 들어가고부터 사업이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가방 파는 아내 가게에, 아는 사람이 의류 재고를 들고 와서 팔아보라고 한 게 결 정적 계기였다. 가방을 두 줄 빼고 옷을 진열하였는데 금방 팔렸다. 옷 진열을 조금씩 늘렸는데 역시 금방 팔렸다. 그래서 며칠 만에 아내 가게 전체에 옷을 진열했다. 또 다시 불티나게 팔렸다. 이거구나 싶어 구색을 갖추려 여신(외상)을 받으려 하자 업자 들이 서로 공급하겠다고 나섰다. 내가 그 동안 반야보리사 신도회장도 하고 문화원을 운영하며 신문 잡지에 이름을 올린 것이 도움이 되었다.  

아내는 인상이 좋고 장사 수완도 좋았다. 의류업을 시작한 지 한두 달 만에 장사 가 잘 된다고 소문나니, 수입업체에서 자기 발로 찾아와 팔아달라고 물건을 밀어 넣 기 시작했다. 장사가 잘 되니 종업원들도 도둑질하느라 극성을 부렸다. 손님이 주문 하면 물건을 싸고 아내가 계산서를 쓸 동안, 종업원들이 의류를 100~200장 더 집어 넣고 손님으로부터 팁을 받았다. 창고에 입고시키는 종업원이 창고 앞 쓰레기장 안에 빈 박스를 쌓아놓고 그 밑에다 의류 몇 박스를 숨겨 놓는 경우도 있었다. 건물 경비원 과 종업원이 짜고 창고 안에서 몇 봉지를 싸 들고 나와 시장 노점상에게 팔기도 했다. 멕시코인이나 한국인이나 틈만 나면 도둑질 하니 누구를 믿어야 하나 싶었다.

은행에도 질 나쁜 은행원이 한두 명 있었다. 기계로 세는 척 하면서 밑으로 돈을 떨 어뜨리고 모자란다고 한다. 자주 그러는 바람에 돈을 한꺼번에 주지 않고 한 다발씩 주어 사고를 예방했다. 어떤 때는 송금하고 영수증을 받아왔는데, 은행원이 계산이 잘못되었으니 영수증을 돌려달라고 하고는 2만 페소가 부족하다고 더 달라는 경우도 있었다. 세무회계사가 우리 은행 계좌가 인터넷뱅킹이 안된다고 자기 계좌로 돈을 입 금하라 하고 8개월치 세금을 횡령하기도 했다. 먹고살기 어려우니 그런 식으로 돈을 벌려는 것이겠지만 한국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 일어나니, 톡톡히 수업료를 내며 그곳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이게 나라냐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약간은 혼 란스럽고 빈틈이 있으니 내가 돈을 벌 자리도 있다는 역발상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 으려고 노력했다. 고마운 일은 가슴에 새기고 궂은일은 금방 잊어버리려 했다. 괴로 워한다고 이미 일어난 일이 없어질 것도 아닌데, 지난 일에 묶여 건강을 해치면 나만 손해 아닌가.

그런 중에도 장사는 계속 성업 중이었다. 6개월쯤 지나고부터는 중국에 가서 주문 생산을 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있는 친구며 사업 파트너와 함께 의류 공장과 수출업 체 전시장을 직접 찾아다녔다. 완구 봉제공장을 운영한 경험이 공장 선정에 도움이 되었다. 믿을만한 자가 직영 공장과 샘플 개발 능력이 뛰어난 업체와 계약을 했다. 봉 제 공장할 때 샘플을 개발했던 경험을 살려 의류 샘플을 주어 주문하기도 했다. 다양 한 의류가 큰 컨테이너로 들어오니 도·소매업이 원활해졌다. 지방에서는 의류를 더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아내와 나는 점심 먹을 틈도 없이 바빴다. 이게 꿈인가, 도저 히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한창 사업이 잘나가던 중에, 중국 공장 사장이 야반도주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온 한국인 사장에게 돈만 보내고 물건을 못 받는 사기를 당했다. 게다가 그가 나를 절도 및 장물취득죄로 고소해서 ‘혐의 없음’으로 마무리된 적도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상생의 원칙
돈을 버는 대로 외상 미수금과 빚을 다 갚고, 바이어로서 과한 접대도 받았다. 중국 공장 사장들의 접대문화는 과할 정도여서 한 병에 2~30만 원 하는 술을 대접하고 음 식을 먹지 못할 만큼 시킨다. 공장 직원들은 부실하게 먹고 종일 일하는데 이런 사치 스러운 만찬은 도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어 나름의 원칙 몇 가지를 정해 지켰다.

첫째, 출장 시 한 공장주하고 두 번 이상 먹지 않는다. 둘째, 요리는 최소한만 시킨 다. 셋째, 남은 음식은 싸가지고 가게 한다. 넷째, 부득이 3회 이상 식사할 경우에는 경비를 내가 지불한다. 이런 원칙으로 공장주들을 대했다. 접대비는 생산 원가에 포 함되니 결코 공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장 거래를 시작할 때 어떤 사람이, 옷 만들 때 자수 작업을 따로 하면 싸게 할 수 있다고 자수공장을 소개해 줬다. 나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나도 공장 운영 원리는 알고 있다. 공장마다 자체 보유한 자수기계가 있는데 밖에서 해가면 의류공장은 무얼 남기겠나? 나만 이익을 남기려 하면 앞으로는 남을지 몰라도 뒤로 밑지는 것이다. 세 상은 어수룩하지 않다. 다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는 법이다. 상생의 원칙을 지켜야지, 나만 살겠다는 이기적인 발상은 절대 오래가지 않는다.

공장에 샘플 개발을 의뢰할 때 비싼 가격으로 산출되기도 한다. 다른 공장이면 더 싸게 할 수 있지만 나는 거래 약속을 지켰다. 또 원단은 물론이고 단추 등 부속자재는 비싸더라도 고급 제품을 사용하도록 했다. 원가 압박이 있어 마진을 적게 보더라도 품질을 유지하자는 원칙을 지켰다. 그 덕분인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많은 공장들과 거 래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나는 남의 나라에 살수록, 눈 속이지 말고 세금을 정당하게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직원들을 내 사업 파트너로 여겨 3개월 이상 근무하면 반드시 의료보험과 주택부 금 넣어준다. 그래서 우리 가게에는 10년 이상 함께한 직원이 있고, 5년 이상 된 직원 도 수두룩하다. 도둑질만 하지 않으면 일을 좀 못해도 절대 해고하지 않는 게 나의 원 칙이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  

오프라인 판매만 하다가 큰아들이 사업을 함께하면서 온라인 판매량이 늘고, 직원 이 어느덧 45명으로 늘어났다. 과분한 은혜에 감사하다.


첫 한국 불교 사찰, 반야선원 설립
불교는 종교이기도 하지만 우리 역사며 문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교회 가 10개나 있는 멕시코시티에 절을 하나 세우고 싶었다.  
우연이었을까, 연말쯤 시카고와 토론토 선련사 會主 A스님이 오셨다. 내가 법회 를 열어달라고 청하니, 믿기 힘든지 진짜냐고 두서너 차례 물어왔다. 걱정 마시라 해 놓고 전기도 없는 빈 사무실을 빌려 1월 1일 두 시간 동안 쓰기로 했다. ‘법회 초청장’ 100부를 만들어 센트로 시장 한국인 가게에 돌리고는 얼마나 올까 노심초사했다. 그 런데 26명이나 모였고, 우리는 촛불을 켜고 분위기 있게 A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그 후, 절을 하나 만들기로 합의하여 寺名 ‘반야선원’을 설립했다. 십시일반으로 도량 설 립자금을 모아, 불단을 꾸몄다.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한마음으로 함께하는 교민들이 고맙고 든든했다.

2002년 2월 18일, 불상이 없어 사진을 모셔놓고 법회를 하던 그날은 멕시코 한국 이민사 10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사찰이 개원한 감동적인 날이었다. 대사님과 한 인회장이 축사를 하고, 내빈께 한국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리고 회장, 부회장, 법사, 총무를 뽑아 진용을 갖추고 반야선원을 열었다.

한국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자, 9월 중순 한국에서 비구스님 두 분이 진짜로 오셨 다, 불상과 범종, 불화 등 불구를 가득 싣고서. 성철 스님 법손 상좌인데, 법문을 기 가 막히게 잘 하셨다. 그때부터 절은 단연 활기를 띠었다. 그 후 E스님 한 분만 남으 셨고, 100일 동안 부처님의 생애와 불경을 배우며 마지막 날에는 삼천 배를 하였다. 100일 기도 기간 내내 ‘세계평화, 남북통일, 가족평강, 사업번성’을 기원했다. 스님은 추진력이 좋으셔서 신도 50여 명 절에 주간지 ‘반야소식’을 만들고 한국인이 많이 사 는 지방 도시에 법회 원정을 가고, 낮에는 LG, SK 등 대기업 지사 직원 보살들을 모 아서 불교교리 강좌를 하고 부처님 오신 날 제등행렬 준비까지 하셨다.

부처님 오신 날 멕시칸 스님이 데려온 불자 50명과 우리 절 신자와 교민들 200여 명이 행진에 참가하였다. 대형 불등을 앞장세우고 손에 손에 연등을 든 신도들이 소 나로사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경찰 오토바이 5대가 앞뒤에서 호위하는 가운데 스님 이 큰 목탁을 두드리며 신도들과 함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치며 나아가니, 구경하던 멕시칸들이 행렬에 합세하였다. 돌아보니 기다란 등불 행렬이 물결쳐 오는 데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왔다. 5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하니. 방송국에서 그 장 관을 방영하였다. 불기 2548년 부처님 오신 날(2004년 5월 22일)에 멕시코 수도 중 심부에서 거행된 연등축제와 제등행렬은 한인 이민사에 처음 있는 기념비적인 사건 이었다. 우리 꼬레아노가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민족이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 좋 은 계기였다. 우리 민족을 알리기 위해 멕시코 언론에 수백만 불의 광고를 한 것보다 훨씬 더 멋진 홍보였다.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

그리고 E스님 덕분에 우리 사찰은 ‘반야보리사’로 조계종에 정식 사찰로 등록했다.



한인문화원 설립과 운영
E스님이, 어떤 보살이 렌트비 1년 치를 시주하겠다고 하니 불교문화원을 만들자고 했다. 우리 문화를 알릴 기회를 찾던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마침 절이 입주한 건물 한 쪽이 비어 있어 임대를 했다. 명칭은 ‘한인문화원’, 종교와 상관없이 많은 교민들이 올 수 있도록 ‘불교’란 말을 뺐다. 2003년 10월 30일, 문화원 설립으로 이민사에 또 하나의 역사를 썼다.

시주하겠다는 보살이 석 달 만에 사라지니, 빠듯한 절의 재정에 문화원 렌트비도 걱정이었다. 마침 LG전자 직원들 중 신도가 몇 명 있어, 지사장과 관리 부장의 도움 을 청할 수 있었다. LG전자와 삼성전자에서 월 1만 페소씩 정기기부를 받고, 교육용 대형 TV와 컴퓨터 20대도 기증받았다. 지원금이 큰 힘이 되었다.

우리는 한인문화원의 설립 목적을 천명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한국인으로서 정체성과 문화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나아가 멕시코인들에게 우 리의 우수한 문화를 소개해 국가 이미지를 높여 이곳에서 안정되게 살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한인문화원에서는, 토요청소년 학교와 멕시코 포럼, 스페인어와 한글 강좌, 요가, 청소년 피시방 운영, 사물놀이 강습과 연극·등산·배드민턴 취미 동호회 활동 등 다 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민 초보 교민 대상으로 스페인어 강좌를 운영하고, 산 악회는 멕시코시티 인근 산은 거의 다 섭렵했다. 또한 한인매일신문 편집장이 ‘굿나 잇 코리아’라는 희곡을 쓰고 절과 문화원 식구들이 무대장치, 조명, 가설무대 조립 등 역할을 분담하여 성공적으로 연극을 공연했다. 교민 모두가 성취감과 자부심으로 뿌 듯했다. 대사관 오00영사가 재외 동포재단에 그 희곡을 올려서 상을 받기도 했다.

E스님이 해인사로 떠나고 LG와 삼성 지사장마저 전근 가버리자 지원금이 끊어졌 다. 당장 문화원 렌트비 지급도 어려운 상황에서, 우여곡절 끝에 내가 신도회장과 문 화원장이 되어 책임을 지고 운영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문화원 활동을 놓지 못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100일 기도 24일째 되는 날 경찰과 세관 합동 단속반이 센트로 시장을 포 위하여 한국인 가게를 덮치고 그중 33명을 잡아간 이른바 “타이거 작전” 때문이었다. 한국인들이 밀수, 탈세, 마약 밀매, 심지어는 총기 밀매를 하다가 무더기로 잡혔다고 매스컴에서 떠들어 댔으나 그것은 기획수사요 과잉단속이었다. 72년 만에 정권이 바 뀌었으나 가시적 성과는 없으니 한국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억울했다. 왜 하필 한국인인가? 잡혀간 교민들의 인권유린이 문제가 되고 항의가 빗발쳤으며, 대 사관이 나서고 KBS 팀이 달려왔으니 멕시코 교민사회에서 이런 난리는 처음이었다. 그 사건을 겪으며 나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이며 오천 년 역 사를 지닌 문화 선진국임을 이곳에 제대로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내가 문화원장을 맡자 제일 먼저 스페인어 강좌를 늘렸다. 전문 강사를 채용하니 금방 소문이 퍼져 교민들이 몰려들었다. 입학금과 수업료를 조금씩 받아 강사비를 지 급하고 렌트비도 해결하였다.

문화원 초기에 수업받던 유학생들이 한국과 미국 등지로 떠나자 멕시칸들이 몰려 오기 시작했다. 멕시코 TV방송에서 한국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가 인기리에 방영되 면서 한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글강좌를 주 2회에서 5회로 늘렸다. 수강 생은 늘었으나 멕시칸 수업료는 전액 무료라 문화원 예산이 더 많이 필요했다. 마침 그때 내 사업이 잘 풀려가고 있어서 가게에서 아내 몰래 삥땅(?)쳐서 운영비를 메꾸 었다. 아내는, 장사꾼이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밤낮 자기 돈 써가며 엉뚱한 일만 하느 냐고 말하지만, 문화원 행사에 제일 먼저 나서주고, 가게 돈 빼돌려서 문화원 유지비 용 대는 걸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 눈감아주었다

나의 꿈대로, 한국 영화도 상영하고 사물놀이도 가르쳤다. 교민들은 물론, 멕시칸 한류 팬들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치니 문화원 사물놀이 현지인 팀이 만들어졌다. 재외 동포재단에서 사물놀이와 탈춤 강사를 2주간 파견해 주어 교민과 멕시코인들, C수녀 원 중·고등생 1500명에게 장구와 탈춤을 가르치며 한국 문화를 알렸다. 그리하여 그 들은 멕시코 내 각종 행사에서 공연하며 갈채를 받았으며, KBS에 여러 차례 방영되 어 큰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한인문화원 개원 4년째 되는 3월 30일(금), 세뇨리알 홀에서 ‘한인문화원 후원의 밤’을 열었다.


제17회 부여 세계 사물놀이 대축제 참가
한국 사물놀이 강사가 다녀간 후, 사기가 높아진 한류 팬들은 세계 사물놀이 대축 제 참가를 열망했다. 명분 있는 행사라, 예산이 없었으나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발로 뛰었다. 할 일을 다하며 때를 기다리니, 주최 측의 지원과 재외동포재단과 KOTRA, 대사관에서 도와주었다. 첫 출전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니 영광이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한류 팬들이 꿈에도 그리던 한국에 다녀왔으니 그것만으로도 대만족 이었다.

세계사물놀이 대축제에 다녀온 후 회원들이 부쩍 자신감이 붙어서 계속 일을 벌이 고 싶어 했다. 몬테레이 한류 팬클럽에서 주관하는 제2회 대한민국 문화박람회에 참 가해 사물놀이, 부채춤, 상모돌리기, 장구 독주 등을 공연하여 몬테레이 시민들에게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고맙고 감동스러워서 눈물이 고였다. ‘제3회 멕시코 한류팬 클럽 전국페스티벌’ 행사도 벌였다. 500여 명의 관중이 참석하여, 3시간 동안 그들이 그동안 갈고닦아온 사물놀이, 부채춤, 한국가요 솜씨를 재미있게 지켜보았다. 손님들 에게 불고기, 잡채, 김밥 등 한국 음식을 접대하며 즐긴 성공적인 행사였다. 탐피코에 서 ‘제1회 타마울리파스 한멕 문화교류전’, 대사관 주최로 UNAM대에서 열리는 ‘한국 문화 행사주간’에도 참석하였다.

한인문화원을 설립한지 벌써 7년째 접어들었다.

6.15 공동선언 실천 통일 조직 결성
문화원 멤버들을 중심으로 통일 운동 회원들을 모집하였다. 여기에도 노무현 열풍 이 뜨거워서 노사모를 자칭하는 젊은이도 다수 모였다. 그중에서도 문화원 부원장과 총무가 적극적으로 나섰고, 천주교 신부님이 고문을 맡아주셨다. 30여 명이 조직 결 성식을 하고 통일뉴스에 기사를 올렸고, 해외 측 위원회 산하단체인 중남미위원회로 인가되었다.  


남북한을 다 합쳐도 미국이나 중국의 1/50밖에 안 되는 나라가 그마저도 반동가리 로 분단되어 있으니, 어서 빨리 통일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유하고 민족번영의 영 광을 누리게 되길 기원했다.


우리 집의 일등 공신
큰아들은 한국 대학에, 작은 아들은 한국 고등학교에 보낼 때 우리는 180만 원이 없어 부산 친구에게 꿔야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아들 둘을 한국으로 보내 놓고 우리는 월세 12000페소에서 6000페소짜리 작은 아파트로 옮겼고 학비 조달에 투지 를 불태우며 아내는 더욱 지독해졌다.

내가 담배를 끊고 달달한 과자가 당겨 한국 마켓에서 맛동산 과자를 집을라치면 아 내는 여지없이 그것을 탁 빼앗았다. 담배도 안 피우는데, 과자 한 봉지도 맘대로 못 먹느냐면 왜 비싼 수입품을 먹으려 하냐고 되물었다. 나중에 한국 친구에게 그 이야 기를 했더니, 그가 갑자기 나가 맛동산을 5봉지나 사 와서 나에게 맘껏 먹으라고 했 다.

아내는 콩나물도 안 사고 풀무원 두부도 비싸다고 절대 사지 않았다. 재래시장 가 면 채소가 천지인데 왜 비싼 수입품을 사느냐고 난리였다. 그렇지만 교민이 만든 두 부는 맛이 없어도 서로 도와야 한다고 사서 먹었다.

하루는, 코리아 식품점에서 전복을 판다는 신문 광고가 났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나는 그것을 사러갔다. 다섯 마리만 사려는데 주인이 12마리밖에 남지 않았으니 떨이 를 하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러마라고 할 때 옆 목덜미가 싸늘했다. 아내가 매 서운 눈길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집에 와서 전복을  먹자고 하니 아내가 안 먹었다. 다섯 마리만 사면 될 것을 12마리씩이나 사서 화가 난 것이다. 나도 화가 나서 집을 나와 버렸다. 집 앞에 멍하니 앉아있자니 내 신세가 처량하기도 하고, 아내가 측은하 기도 했다. 1시간 후 들어가 둘이 앉아 아무 말 없이 전복을 먹었다.

멕시코 이민 8년 만에 처음으로 칸쿤에 갔을 때다. 무료 호텔 뷔페 한 끼를 먹지 않고 재래시장 노점상에서 해산물을 꼴랑 800페소 어치 사 먹었다가 밤새도록 세 부자 가 무릎 꿇고 아내에게 정신교육을 받았다. 아이들이 울면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나서야 끝난 그 사건은, 지금도 아내의 위대성을 되새기는 에피소드가 되고 있다.  
내 곁에 이런 아내가 있어 든든하고 고맙고 사랑스럽다.


신의 한 수
아들들은 우리가 멕시코에 이민 온 것이 신의 한 수라고 이야기한다.

작은 아들이 멕시코에서 대학을 나와, 미국 학비에 1/4밖에 안 들었으니 그것만도 행운이라는 것이다. 또, 한국에서는 서른다섯 살이나 되어야 딸 수 있는 전문의를 멕 시코에 왔기 때문에 스물여덟 살에 땄다는 것이다. 큰아들도 거들었다. 자기는 멕시 코에 안 왔으면 반 건달이 되었을 거란다. 여기서 가족이 모여 함께 공부하니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 여기서 다닌 AMERICAN SCHOOL 덕에 군대에서 스 페인어 통역병으로 잘 지냈고, 한국 대학이나 회사 다닐 때도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큰아들이 한국 회사에서 배운 기술로 여기서 내 사업을 이어가니 나 역시 멕시코 이 민에 감사한다. 두 아들에게 취업하면 소득의 1/10을 부모에게 보내라는 각서를 받아 두었는데, 현재까지 입금이 순조로워 노후 걱정이 없으니, 나와 내 아내에게도 멕시
코 이민은 신의 한 수이다. 아내의 병, 단 한 가지만 뺀다면......


벼랑 끝에서 다시
2020년 8월에 인천공항에 도착한 나는 살얼음판을 딛는 불안감 속에서 한국 생활 을 시작해야 했다.

2019년,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65세 넘은 나는 아들의 만류로 집에서 쉬었다. 시장통에서 전투하듯 살아온 아내도 새 아파트에서 살림만 하는 ‘요새가 신 혼’이라며 모처럼의 여유와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2020년 6월에 처남이 코로나19에 걸렸고, 닷새 만에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처남 장례 후 아내는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시름 앓더니 기침을 심하게 했다. 검 사 결과 코로나 확진. 바로 입원했지만 특이 증상이 없어 곧 퇴원하리라 믿었다. 그러 나 며칠 후 새벽에 불길한 전화가 왔다. ‘갑자기 패혈증 쇼크가 왔고 다른 장기 손실 이 오면 사망할 수 있다. 폐 섬유화가 진행되어 도무지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가슴 이 무너져 내리며 아내와 함께한 38년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스무 살의 꽃 같은 나이에 뽀오얀 얼굴로 다가와, 친정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매 맞아가며 강행한 결혼, 별난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았던 모진 시집살이 10년, 짧은 미국 이민 실패 후 지하 마켓에서 장사하며 고생했던 시절, 멕시코 이민 초기에 겪은 수모들... 그 세월을 이겨냈으니 이제 은퇴하고 여행 다니자 했건만, 일만 하다 가는 불쌍한 아내를 어떡하나 저절로 통곡이 나왔다.

에크모 치료를 하면 일단 연명할 수 있으며, 몬테레이에 폐 이식 전문병원이 있다 는 것을 알게 되어 그곳으로 옮겼다. 폐 이식 성공 수술 사례가 3회밖에 안 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폐 섬유화가 100% 진행되어 수술밖에 방법이 없다지만, 언제 알맞은 폐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들 둘과 상의해서, 이곳은 병원비도 비싸지만 의술을 믿을 수 없으니 무조건 한 국으로 가자고 했다. 병원과 에어 앰뷸런스를 알아보려고 백방으로 뛰었다. 작은 아 들은 S병원에, 큰아들은 A병원에 긴급 연락을 했다. 큰아들은 ‘저의 어머니를 살려주 세요.’라는 메일까지 보냈다. 그 내용이 절절했는지, A병원에서 먼저 의료기록과 환 자 사진을 전송하라는 연락이 왔다. 작은 아들은, 엄마가 50페소 아끼느라 좋아하는 망고도 안 사 먹으며 자기를 공부시켰다며 엉엉 소리 내어 울었고, 나는 밤새 한국으 로 가게 되기를 기도했다.

믿을만한 에어 앰뷸런스 회사와 연락이 닿아, 금요일 오전에 앰뷸런스 회사 소속 응급의사와 병원 측 의사를 태우고 아내의 한국행 이송작전이 펼쳐졌다. 악천후와 긴 비행시간을 견뎌내고 아내가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긴장이 풀리며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그리고 나는 이튿날 한국으로 떠났다.

한국에 오려고 아내 방에서 소지품을 챙기는데, 보석도 액세서리도 없이 옷가지도 단출하고 너무 소박하였다. 얼마 전에 작은 아들이 사준 외투와 핸드백만이 소위 명 품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아내 옷을 챙기는데 주머니마다 돈이 나왔다. 양 말에도, 바지 여덟 벌에서도 돈을 숨겨 놓았다. 또다시 울음이 터졌다. ‘바보 같은 사 람, 이 돈 다 쓰지 뭐 할라꼬 숨겨놓았나. 그렇게 발발 떨고 아끼기만 하더니 고생만 하다가 가는구나.’

현금이 없어 수모 당한 트라우마 때문일까, 카드를 쓰면서 현금이 많이 필요하지 않아도 아내는 유난히 현금에 집착했다. 아내는 한국에 가면 부모 형제, 친척에게 두 루 인심이 후하다. 고향을 한 바퀴 순례할 때는 돈 봉투 여러 개를 만들어 친척들에게 꼭 용돈을 드리고 왔다. 친구들에게 밥도 잘 사건만, 자기 것은 청바지 하나를 살 때 도 여러 번 망설이는 결정 장애가 있다.

“니 엄마 잘못되면 유품을 정리할 때 옷은 버리지 마라. 추억으로 아버지가 간직할 란다.”  ”네, 아버지. 저도 못 버려요.”

한국으로 돌아와서 나는 줄곧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내를 살려주십시오, 아내를 살려주십시오, 아내를 살려주십시오!’

아내가 두 달 만에 수면상태에서 깨어나 중환자실에서 영상통화를 했다. 파리한 얼 굴이나 반가웠다. 한국에서도 알맞은 폐를 만날 확률이 5%라는데, 아무 진전 없이 3 주가 흘러가자 초조하고 불안했다. 아내 소식을 알게 된 언론에는, '코로나를 이긴 멕 시코 사모곡‘, ‘12,000km 지구 반대편 메일 한 통의 기적’, ‘엄마 살려달라. 멕시코서 고국행 에어 앰뷸런스 띄운 효심’ 등 여러 매스컴에 아내 기사가 실렸다. TV에는 큰 아들과의 인터뷰도 방영되었다.

2020년 9월 11일, 아내가 입원한지 40일 만에 10여 시간에 걸친 대수술이 이루어 졌다. 결과는 대성공. 장기기증자는 30대 남자, 뇌사자라니 고마우면서도 가슴이 아 팠다. 그날부터 날마다 하루를 시작할 때 맨 먼저 그분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우리 의 여생을 그분 몫까지 가치 있게, 베풀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반야보리 사에 계셨던 B스님께 기도를 청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모든 종교에서 아내를 위해 기 도해 주었다. 절 식구와 스님은 물론, 기독교 홍 사장 내외, 천주교 다니는 루피노 내외, 천도교도 종환 형, 장맛비 속에 굿을 해준 아내 친구들... 그분들의 간절한 기도 가 하늘에 닿아, 아내는 2020년 12월 8일 6개월의 병상생활을 끝내고 퇴원했다. 그 리고 지금 열심히 재활하며 회복 중이다. 기적이었다. 너무 너무 감사했다.
내가 병실에서 간병하며 기저귀를 갈 때마다 아내가 쑥스러워 했다.
“살아줘서 고맙다. 뭐가 부끄럽노? 살기만 한다면 당신 똥을 먹어라 해도 먹겠다.” 그건 잃을 뻔한 아내를 되찾은 나의 진심이었다.


에필로그
내가 만 21년 2개월을 살아온 멕시코는 내 인생의 1/3을 보낸 제2의 조국이다. 나 는 그곳에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도 시켰다. 기후 좋고 물가 싸고, 고생 끝에 돈도 벌었다.

내가 그곳에 가기 전, 멕시코 하면 떠오르는 건 콧수염과 챙 넓은 모자에 담요를 덮 어쓴 사람들과 사막, 선인장, 강도, 지진, 치안 불안이었다. 그러나 멕시코는 알면 알 수록 큰 나라였다. 테오티오아칸, 마야, 아즈텍 3대 문명에 걸쳐있는 풍부한 문화유 산과 광대한 국토, 베사메무초로 등 친숙한 대중음악과 뛰어난 시인과 화가들이 있 다. 국민들은 조그마한 일에도 까르르까르르 잘 웃고 낙천적이며 쾌활하다.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지 않고 용감하게 잘 산다. 평균 연령이 낮고 인구가 계속 늘어난다. 경 제적으로는 어렵지만 배울 것이 많은 나라이다. 코로나만 아니면 정말 살기 좋은 곳, 아내가 회복되면 다시 가고 싶은, 젊은이들이 도전해 볼 만한 나라이다.

오랜만에 돌아오니 우리나라는 어느새 일류국가가 되어 있었다. 의료기술이 세계 최고이며 의료 수가도 아주 저렴하다. 복지 혜택도 어느 나라 부럽지 않은 선진국이 다. 아내를 살려준 따뜻한 조국 품에 안겨 노년을 보낼 수 있으니 깊이깊이 감사드린다.  

시멘트 담장을 오르던 인동초에 하얀 꽃이 흐드러졌다. 느티나무에서는 새소리가 들린다. 바람과 햇살조차 향기로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