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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수기] 중국 영화를 물들이다
작성일
2022.01.07

체험수기 - 우수상

중국 영화를 물들이다

박 상 수 [중국]


나는 베이징에서 중국 영화의 후반작업을 하는 막 불혹을 넘긴 보통의 한국 남성이 다. 다른 이들과 달리 나의 중국 생활은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한국에서 2005년 영화과를 졸업한 후에 바로 입사한 회사가 영화의 색감을 디지 털로 보정하는 자그마한 영화 후반작업 업체였다. 당시 영화 디지털 색보정이라는 일 자체가 전 세계적으로 태동기에 있었기에 영화가 산업적으로 발전한 국가만이 독점 적으로 할 수 있던 첨단 분야에 속해 있었다. 한국에서 3년여간 100여 편의 한국영화 에 참여하면서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감독과 같은 세계적인 감독과 작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일 년에 100여 편 내외의 작품만이 제작되는 시 장 환경은 한국에 모든 산업이 그러하듯이 산업이 확장될수록 출혈경쟁을 피할 수 없 는 상황이었다. 다른 산업과 같이 나도 해외로 눈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영화인들은 꿈이 영화제 수상이거나 영화산업의 꽃 할리우드 진출이다. 영화 산업계에 있는 나로서는 당연하게도 나의 기술로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것이 목표였 다. 하지만 디지털 색보정 분야 자체가 미국에서 컴퓨터 특수효과의 한 부류로 시작 된 시작점 자체가 미국인 분야였다. 생각 끝에 회사를 설득하여 아시아권 분야로 눈 을 돌려 보자고 했다. 2000년대 중반 아시아권에서 영화가 발달된 것으로 분류된 일 본, 대만, 홍콩 등이 조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시장조사 결과 일본은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영화가 산업적으로 발달하지 않았으며 보수적 성향 때문에 협업이 매우 힘들 어 보였다. 대만과 홍콩은 중화권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간 상당한 문화적인 차이가 있 었으며 두 국가 중에 하나만 선택하기엔 시장규모가 한국보다 더 작았다.

대만과 홍콩 시장조사 기간 중 코트라나 영화진흥위원회, 콘텐츠 진흥원 등의 세 미나에 참석하면서 중국 ‘본토’영화가 산업적으로 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 었다. 하지만 세계의 공장으로 분류되고 있던 신흥국 중국에서 중산층의 문화 소비인 영화가 산업화되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베이징의 중 관촌에 있는 메가박스에 방문하면서 그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금요일 저녁 영화표 는 80위안, 당시 환율로는 15000원이었고 극장은 만원이었다. 수도권에 중심가에 있 는 극장임을 감안해도 당시 한국의 평균 극장표가 7000원에서 8000원, 그리고 대부 분이 통신사 할인 등의 프로모션을 통해 5000~6000원임을 비교하면 세배에 가까운 차이가 있었다. 당시에 한국은 3000개 내외의 극장과 적게는 1억에서 많게는 2억 명 의 연인원이 관람하는 시장이었고 중국 극장은 5000개를 넘긴 해도 14억의 인구에 비하면 성장의 가능성이 열려 있어 보였다.

중국 진출로 가닥을 잡은 후 1년여의 구체적 시장조사에 들어갔다. 봉이 김선달처 럼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각종 세미나와 한중합작 영화인들을 통해 귀동냥을 했고 회사 및 디지털 색보정이라는 분야에 대한 홍보를 시작하였다. 중국 진출의 로드맵은 한국 제작을 위주로 시작하여 장기적으로 중국지사 설립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 하는 것으로 세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로드맵은 첫 시장조사를 시작하자마 자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산업화의 단계를 아직 시작하지 않은 중국에선 사회주의 국가에서 영화를 보는 관 점이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바로 영화를 선전도구로 보며 문화적인 자산인 영화를 산 업의 영역이 아닌 문화의 영역으로서 보전해야 한다는 관점이었다. 따라서 당시 필 름이라는 매체로 촬영하던 영화가 해외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합작영화라는 허 가가 필요했으며 합작영화 인가를 받더라도 해외 반출 시 편집된 필름이 아닌 촬영된 모든 필름을 반출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규정이 있었다. 필름을 편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국가의 자산이라는 측면에서 가공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황당한 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빠르게 방향을 틀어 한국 문화원이나 영화진흥위원회를 통해 국가지원 사업으로 필름을 디지털화할 수 있는 디지털 스캐너를 중국에 도입하여 필름을 디지털화하여 한국으로 전송하는 방법을 물색하였다. 이것이 성공하면 중국 영화들을 한국에서 색 보정 작업 후에 필름으로 다시 전환하여 중국에 수출하는 길이 열릴 것 같았다. 문제 는 작업한 필름을 어떻게 다시 중국으로 가져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다행히 필름을 포함한 특수품목을 수출입하는 업체를 찾아내서 접촉을 시작하였고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났다. 하지만 내가 다루는 분야는 단순한 물품의 수입 수출이 아니고 영화라 는 콘텐츠였고 개봉 시기가 아주 중요한 품목이었다. 만일 필름의 수입이 예상시간보 다 길어질 경우에는 영화의 개봉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한 번의 사고가 회사의 존폐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게다가 전 세계 영화 모두 마찬가지로 영화는 창작자가 마 지막 순간까지 수정을 하기에 해외 작업의 경우 창작자의 수정 요구에 능동적으로 대 처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도 들었다.

장고를 거쳤다. 중간 결론은 그럴 바에는 한국에서 디지털 작업만 하고 중국에서 필름의 디지털 작업과 작업된 디지털파일을 다시 필름으로 리코딩하는 과정을 담당 하지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로 사업 계획을 작성해 보았다. 관세를 제외한 투자금 액은 대략 20억 내외였다. 그럼 처음부터 중국에서 지사를 설립하는 비용도 산출해 보았다. 대략 30억이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생각은 복잡해졌다. 의외로 작업을 분리 해서 하는 비용과 지사 설립의 차이가 크지 않았고 하나의 작업을 두 개의 국가에서 나누어 하는 것 자체가 효율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였다. 중국에 지사를 설립하자!

나의 첫 직장이었던 회사는 한국에선 1위 업체였지만 현금이 많은 회사도 아니었 으며 경영진이 해외 진출에 대한 생각 자체가 강하지 않았다. 단순히 사업영역 확장 으로 일 년에 3~4개의 중국 영화를 수주하자는 목표가 전부였다. 하지만 중국에 회 사를 설립하자고 결심한 나에게 있어서 3~4개의 중국 영화는 너무나 부족해 보였다.
중국 출장 시마다 맺은 인맥과 부산영화제, CJ엔터테인먼트 등을 통해서 안면을 튼 중국의 감독, 제작자들을 통해 대략 첫해에 작업할 수 있는 영화를 10편 정도 모아 투 자자를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한국 회사에서는 자금력이 부족하니 중국 자체에서 투 자자를 찾아보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후에 회사를 설립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영화라는 문화콘텐츠 회사를 설립할 경우에는 외국인 지분 자체가 49%를 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디지털 색보정의 영역을 넓혀보자고 했던 노력은 1년 여 만에 한중 합작회사 설립으로 중간결론이 났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로 몇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회사에서 나의 존재였다. 입사 2년 만에 말도 안되게 해외 진출이라는 가능성을 가져온 신입사원은 회사에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동대표 중에 한 명만이 해외 진출에 동 의하고 개인투자만이 허용되었으며 나머지 대표는 참여를 거부했다. 두 번째 문제는 언어였다. 카투사를 제대한 나는 모든 소통을 당시까지만 해도 영어로 진행하였으나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중국어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통역이 문제가 되었다. 단시간에 중국어를 배워서 놀랍게 투자를 이끌어 내는 것은 말 그대로 영화에서나 가 능한 일이다.

공동대표의 스물여섯 젊은이에게 내려진 의구심 짙은 지원으로 한 달에 한 번꼴로 중국 각지에 투자자를 찾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베이징영화학교 출신의 통역 도 찾아 동행하였다. 처음 투자자를 찾은 곳은 베이징이었다.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 의 나라에서 문화의 중심은 당연히 수도였으며 중국도 마찬가지로 영화의 중심은 수 도 베이징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베이징엔 화롱이라는 국영업체, 미국과 합작회사 스 덴, 호주와 합작회사 사운드펌이라는 세 개의 회사가 초창기 디지털 색보정을 하고 있었다. 이들 업체 또한 2년 미만의 신생업체로 디지털 색보정이라는 분야 자체가 초 창기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었다. 기회와 한계가 명확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베이징은 한계점이 더 명확해 보였다. 이미 해당 분야에 미국과 호주라는 중국 입장 에서 선진국이 분명한 업체와 합작회사가 있는 상황에서 그보다 못한 한국에서 온 업 체와의 합작회사 설립에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고자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 49%의 지분 모두를 현금으로 납입하기를 원했다. 공동대표가 얘기했던 기술 지분은 인정 받지 못했고,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베이징 투자자도 기술 지분 인정부 분에 들어가면 불편한 기색이었다. 베이징에서의 반응을 공동대표에게 보고한 후 동 시에 10억 내외의 현금출자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그의 장고 끝에 가능하다는 대 답을 들은 후 제2의 도시 상해로 출장지를 변경하였다.

상해에 대한 목표는 확고했다. 중국에서 가장 국제화된 도시이지만 영화에 있어서 는 두 번째로, 첫 번째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 지점을 노리기 로 했다. 상해미디어그룹 산하의 상해현상소가 목표였다. 그들과의 만남과 결정은 일 사천리였다. 상해 사람들 자체가 상당히 합리적이고 결정이 상당히 빨랐기에 첫 만남 에서 투자 가능성과 향후 발전가능성에 대해 열린 자세로 3시간여를 토론하였다. 하 지만 그들이 보기에도 영화의 새로운 후반작업만을 상해에서만 진행하기에는 그들도 역량이 부족해 보였고 우리 또한 부족했기에 그 자리에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협상 과정에서 재미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통역 과정에서 베이징과 동일한 내용의 통역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알고 보니 상해 사투리를 베이징 출신 통역이 거의 이해하 지 못했다는 점이다. 통역을 통해서 중국 각 지방 사투리는 한국과 달리 서로에게 외 국어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통해 왜 중국 영화에 중국어 자막이 반드시 들어 가야 하는 규정이 생긴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통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음 투자자 찾기는 한국인이 가장 많은 도시 칭다오에서 이루어졌다. 현재 완다의 대규모 촬영소가 있는 황다오라는 지역이 당시에는 미개발 지역이었는데 칭다오시의 퇴역 장군이 황다오에 문화기지를 건설하고자 한다는 소식 을 듣게 되었다. 퇴역 장군과의 만남을 위해 점심부터 칭다오 맥주를 비서들과 마시 며 기다렸다. 상해와는 달리 또 민간인과 달리 정부 관계자와의 만남이기에 다소 고 압적이고 딱딱한 자리였다. 중국에는 관료들이 하는 관용어가 따로 있는데 역시나 제 대로 된 통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가 보기에는 내가 하는 일 자체가 그에게는 이 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헐리우드를 모방한 찰리우드가 목표였던 그에게는 지엽적인 사업이었던 나의 영역은 너무 미미해 보였을 것이다. 훗날 그 퇴역 장군의 역량이었는지 시정부의 추진력이었는지도 몰라도 해당 부지는 완다를 통 해 대규모 영화촬영소 및 휴양지로 개발되었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10년 가까이 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촬영지를 제외하고는 자생하지 못하고 있다.

세 번의 실패 끝에 간간이 연락하던 중국의 사운드 전문가 친구가 베이징에서 업체 를 세우는 조건으로 닝보라는 지역의 은행장이 관심이 있다는 연락을 해왔다. 칭다오 투자자 또한 이 친구의 소개였기에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집요하게 투자자의 정체를 물어본 나에게 장모라는 얘기를 들려주자 오히려 믿음이 갔다. 가족관계를 중요시하 는 중국에서 투자자가 장모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해 보였다. 그와 함께 닝보로 날아 갔다. 이번에는 공동대표도 함께 닝보 투자자 회의에 참석했으며 일사천리로 나의 사 업계획서에 적힌 1400만 위안, 대략 25억의 절반을 넘는 720만 위안의 투자를 약속 받았다. 동시에 사위인 중국 친구와 나는 부사장 자리를 약속받고 그 자리에서 그동 안 생각해 둔 회사명을 포함한 회사 설립을 위한 전반적인 결정이 이루어졌다.

나는 한국 회사를 퇴직하고 약혼녀를 중국으로 불러드려 2009년 2월을 기점으로 베이징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중국의 한인촌 왕징 근처이자 예술단지 798근처에 자리를 트게 된 첫 회사는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투자 단계에서 한 국 측 문제가 먼저 발생하는 잡음이 발생했다. 약속된 680만 위안은 100만위안의 최 초 납입금 이후에 차일피일 미뤄졌고 부대표인 내가 중국측에 대한 협상력을 떨어뜨 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분기가 지난 후 한국에서 중고장비를 현물 납입형태로 들어 와서 모양새는 맞추었지만 중국투자자에게는 성이 차지 않았다. 중국 측은 재무 권한 을 가져가는 등 실권을 장악했으나 투자 단계의 문제를 신경 쓰기에는 실질적 운영자 인 나에겐 능력밖에 일이었다. 설립전에 약속되었던 영화들이 하나 둘 미뤄졌으며 결 과적으로 설립 후 반년이 지난 후에야 첫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반년이 지나는 동안 좌판을 벌여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우선 디지 털 색보정이라는 분야를 각 영화제작사에 홍보하는 일과 회사 내부의 작업공정 및 인 력 교육을 시작하였다. 반년의 기간 동안 준비는 충분하였으나 실제 계약에 이뤄진 영화는 내가 설립 전에 체결한 세네 작품뿐이었다. 하지만 반년의 기간 동안 홍보효과로 작업에 대한 문의는 넘치고 있었다. 중국 측에서도 같은 노력으로 영화를 하나 둘 수주하고 있었으나 한국의 공동대표는 홍보 담당을 선임하고자 했다.

두 나라 간의 협업을 진행할 시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처음에는 통역, 나중에는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외부 영입 인사일 것이다. 중국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 고 영입했던 한국인 홍보담당은 중국에서 한국스탭을 연결하는 일을 하던 사람이었 다. 그 또한 내가 하는 업무 자체가 새로웠고 본인의 이익에 부합하다고 생각하여 적 극적으로 개입하였다. 하지만 그의 홍보 업무는 본인이 기존에 하던 업무를 홍보하는 게 주목적이었고 회사의 홍보는 부업에 가까웠다. 당연히 어느 정도는 회사 홍보에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가 가져가는 월급 및 보너스 그리고 개인 비용처리 문제가 불거 졌다. 홍보담당자 입장에서는 명성과 업무에 맞는 보상이라 여겼겠지만 나로서는 초 창기 회사에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을 넘어서는 보상으로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 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업자가 아닌 잉여인력으로 판단되었다. 하지만 나의 의견은 묵살되고 중국 측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일 년 반이나 그와 회사는 불편한 동거를 이어갔다.

일 년 반 만에 회사는 업계 1위 업체로 성장하였고 넘치는 작품으로 확장의 기로에 서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약속된 투자금을 납입하지 않는 한국 측에 중국 측은 신뢰를 보내지 않았고, 재투자는 없음을 시사하였다. 결국엔 이익금 재투자의 방법밖에 남지 않았는데 확장에 필요한 500만 위안의 이익을 거두기엔 시간이 부족 해 보였다. 그 기간 중에 한국 회사에 문제가 생겼던 한국인 공동대표는 한국을 정리 하고 중국에 정착하여 회사를 같이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투자금에 대한 중국 측 압박이 달갑지 않았는지 동시에 다른 기회를 찾고 있었다. 당시 작업했던 영화감독의 친구인 중국의 푸얼다이, 즉 재벌 2세가 문화 사업에 투자하고 싶어 했고 우리 회사 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분투자형식을 생각했던 그는 본인의 관점에서 적었던 투 자금을 듣고 회사 핵심인력을 차출해서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자는 한국 측 공동대표 의 제안을 수락하여 3000만 위안의 투자를 바로 집행하였다. 20대 초반의 혈기 넘치 는 재벌 2세와 50대가 가까운 자본력은 없고 자존심이 강한 한국 공동대표의 협력은 초반부터 문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문제점이 불거지기 전에 핵심인력이었던 나는 이미 내가 주동 적으로 설립한 회사를 가장 먼저 퇴사하고 새로운 회사 설립의 실무를 진행하고 있었 다. 뜻밖에 20대 투자자와 50대 공동대표의 문제는 장비 발주와 회사 부지 설정이 되 자마자 불거졌고 공동대표는 회사에 대표나 운영진이 아닌 프리랜서 작업자로만 참 여하는 것으로 매듭이 졌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디지털 색보정으로 중국에 진출하 고자 한 단순한 생각으로 출발한 내가 타인의 결정으로 중국인을 배신하고 내 스스로 실업자가 될 위치에 서게 된 것 같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되돌릴 수는 없었다. 마지막 남은 기회라 생각하고 20대 투자자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 노력해서 1년
만에 다시 회사를 업계 1위로 만들어 놓았다. 주변의 평가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회사가 잘 돌아가자 공동대표는 이전 홍보담당자와 함께 조 금씩 회사 요직을 노리고 있었다. 둘 다 프리랜서 신분이었지만 경력이 부족한 나보 다 문제를 일으켰지만 보기 좋은 경력의 그들을 어쩔 수 없지만 신뢰하는 분위기였 다. 자존심이 상했다.

중국 시장이 목표가 아니라 영화가 목표였던 나는 미국으로 시선을 돌려 아이맥스 대표에게 개인신분으로 입사 지원을 했다. 중국 영화 산업의 성장과 함께 아이맥스는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기술과 영어, 한국어가 가능했던 나는 적합한 인재였 다. 작업 차 한번 미국 아이맥스에 방문한 이후 휴가 기간에 한 번 더 아이맥스에 방 문했고 LA에 있는 유사업체에 방문해 보았다. 생각보다 인종차별이 심각해 보였고 중국에서 느꼈던 활기를 의외로 느낄 수 없었다. 체계적이진 않아도 불가능을 가능하 게 할 수 있는 열정이 있었던 중국에 비해 LA에 위치한 헐리우드에서는 좋게 말해 체 계적 나쁘게 말해 보신주의만을 느꼈다. 다시 시작할까? 고민의 시간은 길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 모험과 도전을 택한 나에겐 중국이 오히려 모험과 도전에 적합한 나라로 보였다. 중국에 돌아가 두 번째 회사를 정리하고 내가 원했던 개인작업실 을 열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의 존립과 이익을 위해 원하지 않던 영화를 하는 것보다 소규모 인원과 소규모 투자를 통해 선별해서 작업하자는 판단이 들었다.

회사에 먼저 퇴직 의사를 밝힌 후 1달간의 인수인계 기간을 요청받았다. 영화편집을 전공했던 나에겐 편집과 디지털 색보정, 그리고 영화의 예고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투자금은 대략 300만 위안(한화 5억) 정도가 필요해 보였다. 장비와 장소, 그 리고 대출을 알아보던 중에 중국에서 두 번째로 작업했던 영화의 제작자를 회사 작업 실에서 만나게 되었다. 안부를 묻던 도중에 내가 퇴직한다는 것을 알게 된 그에게 대 략적인 나의 계획을 말했다. 그는 깜짝 놀라며 나를 말렸다. 당시까지 중국에서 100 여 편의 영화 후반작업의 경험이 있는 내 경력이 아깝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일에 본 인이 투자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300만 위안의 투자비는 내가 마련할 수 있었고 동시 에 잇따른 동업, 협업 실패에 지쳐 있던 나는 제안을 거절했다.

1주일이 지나고 한국에 마지막 휴가를 나가 있던 나에게 그 제작자에서 연락이 왔 다. “지금 너의 인생은 재미있니?”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나 스스로는 몰랐지만 적어 도 중공업 회사를 상장시키고 50이 다 돼서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재미있어 보였다.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재미있는 일이라며 중국 입국하면 가볼 곳이 있다고 하였다. 그게 지금 나의 회사 IMAGE FORESTT의 부지였다. 버려진 창고 부지를 예술단지 로 만들고자 하는 토지개발업자가 당시로는 상당히 저렴한 임대비로 영화 후반작업 을 할 수 있는 위치를 추천하였고 그 제작자는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맞길 요량이었다며 1500평의 부지를 보여줬다. 벌써 3번째였다. 앞서 언급하지 않았 지만 부산의 영화 후반작업 기지의 건설과 장비 발주에도 참여했던 나는 회사설립에 지쳐 있었다. 하지만 “재미있을 거야” 그의 표정과 이 한마디가 마음을 움직였다. 나 를 괴롭히던 동업자도 협업자도 주변엔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재무적 투자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일 자체에 집중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마지막이라 생각하 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고 내 회사를 시작했다. 위치를 제외한 거의 모 든 것이 나의 결정으로 이루어졌고 3개월 만에 회사가 완공되었다. 인력 교육부터 회 사 홍보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경험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2013년에 IMAGE FORESTT가 설립되었다.

2021년 현재까지 100여 편의 영화를 상영시켰으며 역대 박스오피스 10위권에 세작품을 올려놓았다. 베니스, 베를린, 칸느 등 3대 영화제 등 다수의 영화제에 IMAGE FORESTT에서 작업한 작품들이 수상하였다. 하지만 회사는 아직 17명의 소수정예로 견실하게 운영되고 있다. 사업적인 큰 꿈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는 생각에서 영화 디지털 색보정 분야에만 매진하고 있으며 중국 영화인으 로 베이징, 하이난, 퍼스트 영화제 후원 업체로 중국 영화 발전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인생이 원하는 방향으로 목표하는 방향으로만 흐르면 좋겠지만 막 40줄에 올라선 나 는 아직까지는 딸깍발이처럼 하나의 전문적인 일을 세월이 지나도 꾸준히 할 수 있다 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금전적인 성취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닐지언정 영화에 있어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마지막으로 10여 년간 중국 생활에서 깨달은 것은 그들의 받아들임이다. 늘 생각해
본다. 만약 일본인이 한국 영화에 주요한 업무를 담당한다면 한국 영화인들은 그들에 게 지속적으로 일을 맡길 것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린 어쩌면 아직도 새로운 문물 을 삐딱한 자세로 받아들였던 조선 말기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 을 열고 받아들인다면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누군가가 한국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을 더 한국답게 만드는데 기꺼이 아름다운 조역이 되길 자처할 것이다. 마치 중국의 나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