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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우주에서 보낸 한철1)
작성일
2022.01.07

체험수기 - 우수상

우주에서 보낸 한철1)

유 재 원 [중국]


칭다오 류팅공항에 내리자 우주복 속에 표정을 감춘 우주인들이 나를 맞는다. 마 치 국제적, 아니 우주적 요주의 위험인물이라도 된 듯 삼엄한 감시 속에서 정해진 경 로를 따라 걷자니, 낯선 시공간으로 이동하는 묘한 느낌이다. 중국어를 사용하는 우 주인들은 이상 생물체를 대하듯 사뭇 진지하게 나에게 핵산 검사를 시행하고, 그 샘 플과 함께 분석을 위해 어딘가로 보낼 신선한 피를 넉넉히 뽑아낸다. 조금 전까지 나 의 일부였던 붉은 액체가 작은 병에 담겨 우주인의 손놀림에 바코드를 두르고는 멀어 져간다. 저들이 무언가를 내 몸에 주입하는 것보다는 내 것을 조금 내어주는 것이 낫 다고 생각하며 공항 건물을 빠져나오자, 바깥 공기를 느낄 여유도 없이 대기 중이던 버스에 오르라 한다. 10년을 넘게 살았던 이곳 칭다오에 멀쩡히 살던 집을 두고도, 이 순간 나는 오늘부터 14일간 묵을 숙소는커녕 격리 지역조차 모른 채 버스에 오른다. 지정된 여러 격리 장소 중 랜덤 배치. 이것이 목적지에 대한 정보의 전부이다. 더 자 세히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거니와, 나름 수고하는 우주인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싶어 굳이 묻지 않기로 한다. 그렇다, 방역을 위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무장한 저 복 장을 나는 우주복이라 부른다. 그것은 이 세계와의 철저한 차단과 차이에의 선언이 고, 코로나19 비상사태 속에서 안전을 보장받는 특별한 공간의 상징이 아닌가. 그렇 게 내게는 방송이나 사진을 통해 우주복이 먼저 있었고, 전혀 달갑지 않게도 이제 직접 우주인들을 마주하고 있다. 그가 누구이든 우주복 속에 들어가면 우주인이 된다. 나는 이제 어떤 공간으로 들어가는 걸까. 하지만 정작 코로나로 인해 인생의 경로가 완전히 뒤바뀌게 된 것은 내가 아니라 아들이다. 신장 50cm, 체중 2.75kg의 조그마 한 아기로 태어나 어느새 중3의 나이가 되고, 아빠의 키를 훌쩍 넘어버린 아들. 불과 한 달 정도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올 줄 알았건만, 지금 나 는 아들을 서울에 남겨 둔 채 혼자 이곳에 와 있다.

중국에서의 첫 도시 장쑤성 난통, 한국에서 준비해 온 테스트기를 통해 내 몸 안 에 새 생명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2005년 8월 15일, 광복절 아침이었다. 덕분에 아들의 태명은 ‘광복’이가 되었다. 당연히 한국에 가서 출산할 것으로 생각하 는 남편에게 나는 현지에서 출산하겠다고 간단하게 잘라 말했다. 당신이, 아빠가 해 야 할 몫을 서울의 친정 식구들에게 맡기고 싶지 않아. 애 낳는 데 최신 설비가 필요 한 것도 아니고. 출산의 과정에 아빠도 함께해야 한다는 그럴싸한 이유는, 어쩌면 나 를 이 낯선 땅으로 ‘유배’시킨 남편에게 부리는 심술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중국에 들어온 지 3개월쯤 된 나는 중국어를 전혀 못 했고, 간단한 장보기조차도 남편의 동 행이 필요했다. 예정일은 2006년 4월 초. 3월 초에 친정엄마가 산후조리를 돕기 위 해 오셨다. 난통 시내의 괜찮다는 병원을 찾아 집에서 3, 40분을 택시로 오가며 다니 던 병원 담당 의사와의 갈등이 깊어 가던 때였다. 이미 한국에서 자연분만의 중요성 이 강조되던 시절, 매번 문제가 없다던 담당 의사는 예정일을 두 달쯤 앞둔 때부터 이 런저런 이유를 대며 수술을 종용했고, 그 이유라는 것들을 나름대로 연구하고 알아본 결과 나는 자연분만에 문제가 없다고 확신했다. 의사도 나도 서로 다른 외길을 고집 했고, 그렇게 의사는 내게 조력자가 아닌 적장이 되어 있었다.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 게 된 데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양수가 적다며 자연분만을 하려면 입원해서 조 절해야 한다기에, 한국에서는 이런 이유로 입원까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열 악한 병원 시설에 일주일 정도 입원하라는 말을 곱게 따랐다. 놀랍게도 입원 중 목격 한 것은 그곳에서 태어나는 아기 열 명 중 아홉이 제왕 절개 수술로 태어난다는 것이 었다. 나머지 극소수의 자연분만은 수술 예정일 이전에 진통이 와서 갑작스레 조기 출산하는 경우였다. 이때부터 나는 의사를 적으로 간주하고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리 기 시작했다. 아니, 나 혼자는 아니었다. 광복아, 의사 선생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 을 것 같구나. 이제 엄마랑 광복이랑 둘이 해내야 하는 거야. 자신 있지? 친정엄마가 오시기 전, 남편이 출근하고 필요 없이 넓은 집에 홀로 있는 시간이면, 거의 종일 뜨 개질을 하며 광복이에게 꽤 많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남편과 나눈 대화보다 훨씬 많 은 대화를 광복이와 나누었기에, 광복이는 모든 상황을 잘 이해한다고 믿었다. 출산 을 위한 운동으로 소통할 수 없는 거리를 홀로 걸으며 수없이 말했다. 광복아, 엄마는 광복이가 세상에 나오는 길에 그들이 칼을 들이대지 못하게 할 거야. 그런데 광복이 도 도와줘야 해. 조금 힘들지도 몰라. 그때만 해도 33살의 첫 출산은 노산이었다. 더 구나 예정일보다 2주나 늦어지면서 의사는 거의 협박에 가깝게 겁을 주었고, 그것은 오히려 나의 오기를 발동시키면서 통역하는 아가씨가 난감해할 정도로 격하게 맞서 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여러 차례 병원에서 내미는 각서에 사인해야 했다. 다시 생각 하면 미안할 만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안해하는 남편과 친정엄마는 뒷전이었다. 오 히려, 가서 산파 한 명 구해 봐, 나 집에서 애 낳을 거야, 또는, 다 돈 때문이잖아. 의 사한테 돈 좀 갖다줘 봐, 라며 남편에게 생떼를 쓰곤 했다. 누구에게 뒷돈을 쥐여주고 어떤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간 그날도 의사는 진통은 진통대로 다 겪고도 결국은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다며 어깃장을 놓 았다. 무시하고, 다시 각서에 사인하고, 분만실에 들어가기 전, 남편에게 다시 다짐을 받았다. 내가 직접 당신 붙들고 수술하겠다 하기 전에는 수술 동의서에 절대 사인하 지 마. 다행스럽게도 분만실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전쟁터 같은 병원에 비밀스럽 게 작은 천상의 공간이 숨겨져 있었고 그곳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친절하고 온화 했으며, 양수가 좀 적지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말했다. 그간 의 담당 의사가 아이를 직접 받지 않는 단지 영업하는 의사였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었다. 2006년 4월 25일, 진통으로 병원에 도착한 지 12시간, 분만대에 오른 지 1시간 만에 광복이는 엄마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세상으로 들어오는 데 너끈히 성공했다. 비록 살집 없는 연약한 체구였지만 건강에 이상은 없었다. 장하다, 광복아, 아니, 아들! 중국은 태아의 성별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 불법이었기에 그간 내 안에 있 던 광복이가 아들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독특한 것은, 병실로 이 동하는 침대에 오르자 이불 위 엄마의 다리 사이에 강보에 싸인 아들을 올려 두고 그 렇게 함께 이동하게 하는 점이었다. 안고 얼굴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다리에 느껴지 는 약간의 묵직함과 연약한 꼬물거림, 그리고 그 작은 온기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벅찬 감동이었다.

블랙홀이다. 버스는 그나마 익숙했던 공항 주변을 벗어나고, 도시를 벗어나고, 점 점 낯선 곳으로 들어간다. 비포장도로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낡은 교외 외곽 도로 에 키 큰 가로수가 길고 촘촘하게 끝없이 늘어서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관광 중 이라면 근사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를 풍경이, 지금은 나를 삼키고 또 삼키며, 너는 저 항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호텔을 상상하며 4성급일까, 5성급 으로 배치되기도 한다던데, 하는 은근한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 도착한 곳에는 ‘청소 년 축구 훈련원’이라는 명패가 아주 크게 걸려 있다. 올 것이 왔구나. 함께 온 같은 대 학 소속의 동료인 황 선생님도 암담한 표정이다. 자국민은 이곳에 내려주고 외국인은 다른 호텔로 이동시킬지도 몰라. 실낱같은 기대는 매몰차게 된서리를 맞고, 같은 비 행기에 탑승했던 인원 전체가 예외 없이 이제 이곳에서 2주간의 격리에 들어가는 상 황. 건물 앞에서 지정된 플랫폼에 접속해 온라인으로 신원 정보 입력을 마치는 순서 대로 방을 배정받고 건물로 들어간다. 몹쓸 바이러스 덩어리라도 만난 듯 우주인이 나의 짐과 몸에 소독액을 뿌려댄다. 우주인들이 감시하는 ‘수용소’에서 내게 배치된 방은 905호. 9층에 오르자 커다란 QR 코드가 중국의 메신저인 위챗을 통해 9층에 격 리되는 사람들을 하나의 단톡방으로 묶는다. 905호에 들어서자마자 wifi부터 확인한 다. 신호가 없다. 아직 어수선한 복도에 다시 나와 우주인과 소통을 시도한다. 나와 옆방의 황 선생님은 산둥S대학교의 교수이며, 우리는 격리 중에도 대학생을 대상으 로 화상 수업을 해야 하므로 반드시 인터넷이 필요하다고 다급하게, 또한 최대한 힘 을 실어 말한다. 무색하게도, 모든 요구 사항은 단톡방에 올리라는 간단한 답. 단체, 이것이 공산당 통치의 비법 중 하나인가 보다. 단체 속에서 개인은 쉽게 지워지는 듯하다. 방으로 들어와 메시지를 올리고는 방을 둘러본다. 온통 하얗다. 벽도, 타일 바 닥도, 침대의 이불도. 음, 화이트홀이군. 때가 되면 웃돈을 주며 더 머물겠다 해도 나 를 토해낼 것이다. 킹사이즈 침대와 그만 한 침대 하나를 더 놓아도 넉넉하게 남을 넓 은 공간, 중국의 널찍한 호텔 방 중에서도 이 정도로 큰 방은 본 적이 없다. 단체를 위 한 숙박 시설인 탓이리라. 커튼이 드리워진 전면 유리 너머로 예상치 못했던 베란다 가 있다. 커튼을 열고 역시나 널찍한 베란다로 나서니 시원스레 천정까지 닿아 있는 유리창 밖으로 낮은 공동 주택 단지가 반듯반듯하게 가꾸어 놓은 논이나 밭처럼 펼쳐 져 있다. 도로변으로는 5층 정도의 신식 연립주택 단지가, 그 너머로는 1층짜리 중국 의 구식 공동 주택 단지가, 희뿌연 대기가 감추어 버린 지평선을 배경으로 잘 ‘심어져’ 있다. 근처에서 이곳이 가장 높은 건물인 듯싶다. 그리 근사한 풍경은 아니지만, 창밖 으로 시야를 막는 건물이 없어서 다행이다. 앞으로 2주간, 단 하나의 창으로 단 하나 의 풍경만을 내다볼 수 있다. 2주, 저 하나의 풍경을 나는 얼마나 읽어낼 수 있을까? 이 창은 해가 뜨는 쪽일까, 해가 지는 쪽일까? 아직 해질 시간은 아닌데 뿌옇고 탁한 공기가 그림자들도 지우고, 먼 풍경도 지우고, 해도 감춘 것 같다. 매년 그랬듯이 작 년, 20년도에도 겨울 방학을 맞아 3주 정도의 일정으로 왕복 비행기표를 끊고 아들 과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2020년 1월 17일 한국 입국, 그 직후 코로나라는 비상사태 가 발생하면서 1년하고도 두 달을 우리집 없는 고향에서 떠돌다가 이제 타국의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의 어느 지점에서 또 다른 어딘가로 소환되어 격리되어 있 다. 이것은… 독특한 안정감. 충분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이 방만큼은 현재 온 전히 나만의 공간이고, 적어도 이 기간에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필요 가 없다. 아주 많이 오랜만이거나, 혹은 처음인, 완벽한 ‘머물기’이다. 이것이 구속인 지 자유인지 헷갈린다. 하지만 안정이라고 하기엔 아직 너무 소란스럽다. 궁금해하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답하고, 그리고 9층 단톡방 알림이 계속해서 울려 댄다. 관리 측의 각종 통지문이 올라오고, 방마다 자신의 공간에 필요한 것들을 갖추 기 위해 요구 사항들을 올리고, 기타 질문과 대답 등등이 끊이질 않는다. 중요한 통지 를 놓쳐서는 안 되기에 알림을 무시해 버릴 수가 없다. 어느새 나와 상관없던 그들과 ‘우리’가 된다. 우리가 탄 비행기가 한국발 비행기임에도 불구하고 단톡방 관리 측에 서는 한국어에 대한 배려는커녕, 외국인이 있든 없든 전혀 관심도 없는 듯하다. 하긴 의외로 중국 국적이면서도 중국말을 거의 못 하는 교포들도 몇몇 눈에 띈다. 우는 아 기 젖 주는 질서 속에서 언어가 안 되면 울기조차 못하는 소리 잃은 아기가 된다.

병원에서 이번에는 아들의 황달을 문제 삼으며 아이는 입원시키고 나만 퇴원하라 한다. 7형제 중 다섯째인 나는 형제 중 가장 늦게 출산을 경험하는 터라, 그간 조카들 의 황달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으며 아들의 황달은 입원할 만큼 심 각한 상태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4월 말, 난방 시설도 없는 난통의 병원 실내는 습하 고 찬 기운이 가득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모유 수유였다. 아들, 힘들어도 엄마 젖 을 빨아야 해. 좀 더 힘을 내 봐. 생후 3, 4일이 지나도록 아들은 힘겨운 듯 젖을 제대 로 빨지도 못했고, 그래서 또한 아직 젖이 돌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 엄마와 떨어져 병원의 우유병에 적응한다면, 아들은 다시 엄마 젖을 빨려고 하지 않을 것이 뻔했고, 모유 수유는 실패할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적으로 논란이 되는 와중 에 중국 분유를 먹일 수는 없었다. 한국이나 다른 외국 분유를 조달한다 해도 탐탁지 않았다. 무조건 함께 퇴원하겠다고 우겼다. 또다시 각서에 사인하고, 결국 아이와 함 께 퇴원했다. 다시는 이 병원 근처를 쳐다도 보지 않겠다 다짐하면서. 다행히 아들은 집에 온 후 별 이상 없이 황달을 가볍게 넘겼고, 엄마 젖에 적응하면서 젖도 적당히 돌기 시작했다. 젖을 못 빠는 동안 우유병을 절대 물리지 않는 독한 딸 때문에 숟가락 으로 떠주는 보리차만으로 버텨야 하는 갓난쟁이를 보며 안타깝게 마음 졸이시던 엄 마. 젖몸살로 피고름이 맺힌 젖꼭지를 두려움에 떨며 아이에게 물리는 나를 보며 안 쓰러워하시던 엄마. 물을 끓여 뜨거운 수건으로 정성껏 찜질해주시는 엄마에게, 그 래도 이렇게 아픈 게 말도 못 하는 아들이 아니고 나라서 다행이라고 했더니, 고집쟁 이 막내딸이 엄마가 되긴 됐나 보다, 하신다. 출산이 늦어져 산후조리 한 달 반 만에 엄마는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영상 통화는커녕 스마트폰도, 카톡도 없던 시절, 이 낯선 땅에 나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갓난아이와 단둘이 남겨진 듯했다. 남편은 남 편대로 한국인 상사와 중국인 직원들 사이에서 감당하기 벅찰 만큼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산후우울증이 오는 것 같았다. 엄마와 언니들, 가족, 친구들이 못 견디게 그 리웠다.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의 불안을 감지했는지 점점 예민해져서는 곤히 자다가 도 비닐봉지의 바스락 소리나 상수도 물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결국 생 후 석 달이 채 안 된 아들을 안고 남편을 뒤로 한 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부 터 양쪽에 집을 두고 두 달 간격으로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아들은 비교적 건강하고 밝게 무럭무럭 성장해갔다. 중국은 유난히 어린 아이들에게 관대했다. 공항에서는 아 이를 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줄을 서게 하지 않고 우선으로 통과시켰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그런 특혜가 없었다. 더운 여름날임에도 아이에게 양말을 안 신기면 어떡하냐 는 둥, 집을 나서면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게 손짓 발짓 해가며 나보다 더 아이를 걱정 하는 듯한 중국 어르신들을 쉽게 만나곤 했다. 제법 재잘재잘 말을 하기 시작하던 어 느 날, 한국 TV에서 마침 중국어가 나오는 것을 보며 아들이 물었다. 여기는 한국인 데 왜 중국말을 해요? 그 나이에 한국어와 중국어를 구분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곳 은 한국이지만 중국 사람은 중국말을 한다고 말했더니 불쑥, 그럼 나쁜 사람은 무슨 말을 해요? 묻는 아들. 글쎄..., 라는 내게 간단하게 답한다. "나쁜 사람은 나쁜 말을 하죠!" 어른은 종종 아이들에게 배울 필요가 있다. 허난성 낙양을 거쳐 중국에서의 세 번째 도시인 산둥성 칭다오에 이르러, 아들이 만 세 돌을 넘기고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자, 우리는 한국과 중국 중 어디에서 유치원을 보낼지 결정해야 했다. 그간 막연히 곧 다시 한국으로 가겠다던 남편은 본격적으로 중국에서의 정착을 결심했고, 그렇게 한국 집을 정리해서 국제이사를 하면서부터, 한국은 비록 가족들은 있으나 더는 ‘우 리집’은 없는 곳이 되었다.

우주로 공간 이동 중 식음료 서비스 일체 불가.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으로 인해, 비 행기에 오르면서부터 물도 한 모금 구할 수가 없는 여정이 될 것을 고려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아침을 거르고 나왔다. 12시경 인천공항까지 배웅해준 언니들이 내미는 햄 버거와 음료를 안 먹었더라면 격리되기도 전에 저혈당 쇼크가 올 뻔했다. 방 안에는 550mL 생수가 상자째로 비치되어 있다. 오아시스에 갇힌 기분이다. 목을 축이고 둘 러보니 이 건물은 지은 지 몇 년 안 되었거나, 사용을 얼마 하지 않은 것 같다. 새집 냄새는 없었지만, 방과 가구는 물론 전자제품 등등이 사용 흔적을 느끼지 못할 정도 로 새것에 가깝다. 더구나 중국의 훈련원이라는 곳에 바닥 난방이 들어오다니, 놀라 운 일이다. 인터넷을 해결해 달라는 요구에 관리자 중 하나가 친구 신청을 하더니, 개 인톡으로 곧 공유기를 보내주겠다 한다. 개인톡? 웬 특별대우지? 아하, 공유기는 우 는 아이에게만 주는 젖이었군! 옆방의 황 선생님 공유기까지 해결하고 나니 조금 마 음이 놓인다. 우리는 당장 내일부터 정규 시간표대로 수업해야 한다, 오늘 이동하느 라 하지 못한 수업의 보충까지 포함해서. 위치를 찍어보니 이곳은 교주, 황다오구에 있는 우리집에서 북서쪽으로 46.2km 떨어진 곳이다. 이름은 많이 들었으나 처음 와 본다. 칭다오 격리에 대한 정보에 의하면 격리 시설 중 이곳 교주까지는 그래도 시설 이 괜찮은 편이고, 더 외곽으로 나가면 훨씬 열악한 환경이라고 한다. 똑똑, 노크 소 리. 우주인이 문 앞에 놓고 간 첫 식사는 예상보다 깔끔하고 푸짐한 중국식 백반 도시 락이다. 꾹꾹 눌러 담은 조밥에, 만터우(馒头)와 중국식 만두가 하나씩, 반찬으로는 갈치구이, 셀러리감자볶음, 버섯닭조림, 토마토계란볶음, 그리고 별도로 흑미죽 한 그릇과 사과 하나, 나로서는 반도 채 다 먹지 못할 법한 양이다. 맛도 그런대로 괜찮 다고 생각하며 식사를 하는데, 도저히 못 먹겠다며 단톡방에서 몇몇이 불평을 한다. 중국에서 살아본 경험으로 봤을 때, 도시락이 이 정도면 괜찮은 수준인데…. 저들은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밤이 되어서야 아들이 사촌형과 함께 다니기 위해 희망하던 중학교에 3학년으로 무사히 배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확인하게 되었다. 어제 아침, 한 국 주소지 관할 교육청에 어렵게 준비한 서류를 접수하고 아들에게 결과를 받으라고 당부한 채 출국한 터였다. 감사하게도 하루 만에 결과가 나온 것이다. 아, 이제 그 독 특한 안정감을 좀 누려도 될 것 같다. 난생처음 격리라는 걸 경험하며, 50을 앞둔 나 이에도 새로운 고통과 새로운 기쁨이 있다고 새삼 나 자신을 환기한다.

중국에서의 정착을 결심한 후에도 아들은 유치원부터 이동이 많았다. 세 살, 먼저 황다오구 내에 있는 한국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3, 4일 낯설어하다가 금 방 적응하는가 싶더니 1년쯤 지나자 유치원에 가기 싫어했다. 이유를 물으니, “친구 들이 있어졌다, 없어졌다 해요.” 이 나이 또래의 자녀를 둔 이곳의 한국 아빠들은 이동이 잦았다. 또는 타지에서의 육아가 힘들어 기러기 생활을 택하며 아이와 함께 한 국으로 돌아가는 엄마들도 있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한두 달씩 한국을 다녀오거나 하는 등등의 이유로 그나마도 인원이 많지 않은 한국 유치원 아이 중에 꾸준히 머물 러 있는 아이들은 몇 안 되었다. 정을 붙일 만하면 ‘없어지는’ 친구들, 그리고 아파트 의 집 한 채를 빌려 운영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그것도 서너 살을 한 반으로 묶어 이 미 배운 과정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한국 유치원에 아이는 이제 싫증이 난 것이다. 네 살 여름이 끝날 무렵, 중국 유치원 구경을 해보기로 했다. 아파트에 바로 이웃해 있 던 비교적 시설을 잘 갖춘 유치원에 아들과 함께 갔다. 유치원을 둘러본 아들은, 엄 마, 이 유치원은 엄청나게 좋은 유치원이에요. 저 오늘부터 다니면 안 돼요? 하며 좋 아했다. 아이는 자신에게 좋은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그때부 터 아들은 중국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정착하고 살 고 있던 거의 모든 엄마는 아이를 5살 여름까지 한국 유치원에 보내고, 중국 학교 적 응을 위해 초등학교 입학 전 마지막 1년만 중국 유치원에 보내는 것이 공식처럼 되어 있었다. 5살도 안 된 아이를 중국 유치원에 보내는 나는, 어느새 주변 한국 엄마들에 게 아이를 소통도 안되는 곳에 보내 힘들게 하는 가혹한 엄마가 되어 버렸다. 사실 아 들은 네 돌이 될 무렵부터 중국 아이들이 다니는 태권도장에 보낸 것 외에 달리 중국 어를 접하거나 배운 적이 없어서 거의 중국어를 하지 못했다. 하루는 아들에게 조용 히 물었다. 유치원 선생님 말 못 알아들어서 힘들지 않니? 아들은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저 못 알아듣는 거 없어요! 다 알아들어요!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이 생각 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다. 아들은 선생님이 하는 말에 자신의 상상을 더해 다 알아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섯 살이 되면서, 그간 극구 반대했던 남편이 아 들과 나의 호주행에 동의했다. 호주 멜버른에는 일찍부터 셋째 언니가 이민을 가 있 었고, 우리 형제의 2세들은 고교 졸업 이전에 1, 2년씩 호주로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우리의 경우 영어는 둘째 문제였다. 아들을 중국 현지 학교에 입 학시키기로 하면서 가장 염려되는 것은, 아들이 한국 외에, 중국을 다른 세계의 전부 로 받아들이고 그 사상까지 흡수해 중국 아이가 되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한국의 정서나 문화를 짧은 기간에 온전히 습득하게 할 수 없는 대신, 중국 문화나 교 육도 다양성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경험적 배경을 깔아주고 싶었다. 해서 입학 전에 반 년만 호주 교육을 경험하게 하자고 설득하던 끝에 다섯 살이 마지막 기회라고 으름장 을 놓았더니 남편도 마침내 동의한 것이다. 2011년 3월, 아들과 나는 하늘 파랗고 녹 색 우거진 멜버른에 도착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하늘만큼 환경만큼 맑고 푸르지 못했다. 늘 그래왔듯 여러 곳을 함께 돌아보며 아들에게 유치원을 선택하도록 했는데, 몇 곳을 싫다던 아들이 선택한 유치원의 담당자는 우리 아이를 받아줄 수 없 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세 가지를 말했다. 먼저 아이 비자가 여행 비자라는 것, 그 리고 원비의 상당 부분을 정부에서 지원하는데 우리는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 마지 막으로 예방 접종 기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눌한 영어로 여행 비자 규정 에 의하면 기간 동안 아이의 나이에 맞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과, 당연히 정 부 지원금 적용 이전의 전액을 지불할 것이며, 예방 접종 기록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고 설명했으나, 우리 아이가 들어오면 그만큼 현지 아이가 들어올 수 없게 된다며 다 른 곳을 알아보라고 했다. 말로만 듣던 인종 차별이었다. 부당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아들이 원하는 곳에 다닐 수 있기를 바랐다. 그 길로 언니 집으로 돌아와 밤새 단어와 문법을 찾아가며 이메일 편지를 썼다. 담당자가 제시한 문제와 우리의 답을 세세하게 적고, 모두 해결이 가능한 것들이며, 아이가 정당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호소하 는 편지였다. 그렇게 작성한 이메일을 낮에 만났던 담당자와 유치원 원장, 그리고 관 할 구역 정부 행정관리국 등 세 곳에 동시에 발송했다. 그리고는 행정관리국에 찾아 가 관련 책임자에게 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다시 한번 호소했 다. 책임자는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것 같았다. 최대한 돕겠다고, 그런데 사설인 그 유 치원에서 계속 거부하면 강제할 방법은 없다며 걱정스러워했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무력감과 피곤함에 지쳐 길고 길게만 느껴지는 하루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등원을 허 가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제야 한 개인의 인격 문제를 일군, 혹은 그 나라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여 해석했던 건 아니었나 싶었다. 그 후 아들이 그곳에 다니는 동안 다 시 그런 차별을 느낀 적은 없었다. 아이를 직접 대할 때만큼은 감사하게도 모두가 천사였고 훌륭한 교사였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잘 적응하고 밝게 생활하는 아들이 대 견하고 고마웠다. 아들의 일정이 어느 정도 안정된 후 나는 한국의 S대학교 평생교육 원 온라인 교원양성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렇게 호주에 있는 6개월 동안, 공정하면서 도 개성을 살려주는 선진적인 교육을 실감하면서 아이뿐만 아니라 나도 얻은 게 많았 다. 하지만 이미 중국에 적응한 탓인지, 단 한 번 뼈저리게 느꼈던 차별 대우의 후유 증인지, 호주는 여행 정도면 충분하겠고 살기에는 중국이 편하다고 생각하며 고향으 로 돌아가듯 한국을 들러 칭다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격리 2일째, 예상대로 한국을 떠나오기 전보다 한결 평온해졌다. 이제 좀 방 안이 눈에 익는다. 친하게 지내자, 나에게 이곳이 난데없는 화이트홀이듯 너희들에게도 나 는 이방인이고, 혹은 원치 않는 불청객일지 모르겠지만, 우린 2주간 헤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거든. 어쩌면 이곳이 그리워질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여긴 호텔이 아닌데…, 중국서 외국인은 외국인 투숙 허가를 받은 호텔에서만 숙박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곳은 아마도 일부러 다시 찾아와도 나를 받아줄 수 없을 것이다.
5일째, 카톡이 안된다. 첫날 잠깐 되더니 이후 계속 들어오는 메시지를 볼 수는 있 는데 보낼 수 없고, 사진이나 음성, 파일 등은 받는 것도 안된다. 그들의 대화에 참여 할 수 없고 단지 대화를 읽을 수만 있는 상태, 저세상으로 간 이들이 우리 주변을 맴 돌고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어쩌면 우리는 살면서 이미 충분히 죽음을 연습하고 있 는지도 모른다. 인식하든 못하든 순간순간 속에서. 그렇다면 그것은 그리 두려워할 것은 아니리라. 아무래도 이 방에서는 뜨는 해도, 지는 해도 볼 수 없는 것 같다. 주택 단지 지붕에 늘어선 태양열 집열판이 모두 나를 향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래도, 밤에 달도 별도 볼 수 없다니... 이곳을 나가기 전에 한 번도 못 보는 걸까?

7일째, 단체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처음 들어올 때의 날카롭고 예민하고 또한 경계하던 냉기와 긴장이 사뭇 부드러워졌다. 요구사항에 응답을 받으면서 감사의 인 사를 전하고, 서로를 칭찬하고, 인정이 오간다. 개인톡이 가능한 직원에게 이곳에 대 한 정보를 좀 얻어낸다. 이번 우리 비행기 일행은 85명으로 비교적 적은 인원이라고 한다. 관리 직원은 두 부류로, 자신처럼 훈련원 소속 직원이 7~8명, 정부 소속 직원이 10명 정도란다. 단톡방에서 응답하는 이들은 방역 구역 밖에 있다고 하니, 우리에 게 물건 등을 전달하는 우주인들은 그들의 지시만 따를 뿐 우리와 직접 소통할 수 없 고, 소통해 봐야 결과를 얻을 수 없는 시스템이다. 단톡방을 통해 통지 형식으로 요구 하는 것들이 있다. 이곳에서 지켜야 하는 매일매일의... 예를 들면 꼬리물기(중국어接 龙) 형식으로 하루 두 번 체온을 재서 올리고, 다음 날 먹을 끼니별 도시락 숫자를 올 리고,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이나 방의 비품 등등. 핸드폰 조작을 못 해서 이들이 요 구하는 형식에 따르지 못하는 이들이 여럿 있다. 그들은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린 아이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저런 것을 습득하고 학습하고 성인이 되면 독립이 가능하게 된다. 교육의 목표는 '독립'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 런데... 나이가 들어 다시 홀로 서지 못하는 때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독립을 위 해 그 많은, 나와 남의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 결국 다시 그 모든 것들을 놓고 어린 아이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추하게 마냥 남의 도움을 기다려야 한다면, 더구나 그것 이 자연의 순리라면, 이제는 독립을 포기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걸까? 오랜만에 순간 순간을 느끼고 붙잡으려는 나날을 보낸다. 코로나는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발생했는 지도 모른다고 상상해본다. 다른 여러 가지 신호를 보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나 를 위해, 강제적으로 환경을 만들어야 했기에. 그것은 사실 나뿐 아닌, 우리 인류를 향한 메시지이고, 우리는 그것을 해독하고 인정하고 변화해야 할 것이다. 맞은 편 라 인에 묵는 사람의 위챗 모멘트(일종의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사진을 보며, 그쪽 풍경 엔 물도 있고, 푸른 잔디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거기엔 일출과 일몰도 있으리 라. 내게 그 풍경이 허락되지 않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만 바라볼 때가 아니라는 것 같다. 아름답지 않은 것도 똑바로 보아야 했던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이 못 견디게 그리운 것도 겪어보아야 했던 것이다. 잿빛 풍경 속에서 한 점 색을 잃지 않은 것들을 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내겐 할 일이 많다, 못 다 한 일 또한.

한 달쯤 전 중국의 소속 대학교로부터 입국하라는 통보를 받고 비자를 신청하려 던 중, 코로나로 인해 작년 11월경부터 중국의 비자 정책이 바뀌면서 취업자 본인 외에 동반 가족 비자 발급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 었다. 현재로서는 아들이 다시 중국으로 가려면 유학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그때까 지 적을 두고 있던 중국 중학교는 유학 비자를 내줄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지난 1 년 동안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현지에서 교실 수업을 하는 시간, 아들은 서울에서 혼 자 실시간 온라인 수업 중계를 들었고, 그나마도 중간, 기말 정식 시험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더는 그 상태로 마냥 기다릴 수 없는 나이였다. 아들은 의외로 담담하게 중국 에서 전학하느니 그냥 한국 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비자 신 청서는 넣어보자는 말에, 그거 어차피 안 되는 거잖아요, 그냥 엄마 혼자 가요, 저 여 기서 형하고 같이 학교 다닐게요, 라는 아들. 코로나라는 거대한 운석이 아들의 삶에 충돌하면서 12년 특례를 바라보던 장기적인 계획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며칠 후에는 형들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며, 만약 중3으로 못 들어가면 검정고시를 보겠다고까지 하던 아들. 서둘러 국내 입학 서류를 준비했다. 방학 기간임에도 중국의 담임 선생님 은 성심껏 서류 발급을 위해 애써 주었고, 다시 현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영사관 인장 을 받고, 또 한국에서 번역 공증을 받아 서류를 갖추기까지 한 달이 걸려 출국 전날에 야 겨우 접수할 수 있었다. 학교만큼은 해결하고 아들의 새로운 담임 선생님도 만나 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나마 여러 사람의 수고로, 이제 아들도 정식으로 한국의 동갑내기들 속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처음에는 아들 인생이 잘못되기 라도 하는 것 같은 충격으로 느껴지던 것이, 다시 생각하니 전화위복이 될 것도 같았 다. 아들은 중국어와 영어가 유창한 편이었지만 정작 모국어의 빈 구멍이 크고 그 대 책은 묘연하기만 했다. 외국어 능력은 절대 모국어 수준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언 어를 배우고 가르치며 누구보다 절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이제 한국에서 그 빈자리를 어느 정도나마 채운다면, 그간 아들 안에 파편적으로 떠다니던 이국 언어와 사고 능 력이 조각을 맞추어 가리라.

11일째, 단체가 생기면 그 안에서 자연히 각자의 포지션이 생기듯, 개인 간의 관계 도 생겨난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 몇몇이 이런저런 계기로 위챗 친구가 된다. 단톡방 에 올린 내용을 보고 내게 무엇을 가르치냐며 말을 걸어온 909호 위엔보(가명)님은 11일째, 단체가 생기면 그 안에서 자연히 각자의 포지션이 생기듯, 개인 간의 관계 도 생겨난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 몇몇이 이런저런 계기로 위챗 친구가 된다. 단톡방 에 올린 내용을 보고 내게 무엇을 가르치냐며 말을 걸어온 909호 위엔보(가명)님은 한국 남자와 결혼한 내 또래의 중국 여인이다. 남편도 자신도 각각 이혼 후 늦게 만난 사이라고 한다. 내년쯤부터 황다오구에서 살 거라고, 그러면 맥주 한잔하자 한다. 과 연 만나게 될까? 인연이란 모를 일이다. 902호 김춘화(가명)님은 핸드폰 조작을 못해 서 힘들어하길래 개인톡으로 몇 가지 가르쳐드린 분이다. 나이가 좀 많으신 교포 여 자분인데, 서너 차례 간단한 조작법 등을 가르쳐 준 것에 무척이나 고마워하신다. 내 가 교사인 걸 안 후에는 그 감동이 더욱 커진 모양이다. 이미 여러 차례 감사 인사를 하셨으면서도, 띄어쓰기 한 칸 없는 빼곡한 한글로 거의 예찬에 가까운 장문의 감사 메시지를 다시 보내온다. 이곳에 격리된 이들 중에 위챗의 간단한 기능, 예를 들면 친 구추가조차 못 하는 사람이 여럿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김춘화님이 간단한 조작을 배우면서 무척 감동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냥 일회성의 도움 때문이 아니라, 그 간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새로이 할 수 있게 된 것에 스스로 놀라운 것 이리라. 배움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 있을 텐데, 나는 언제까지 배움 을 계속할 수 있을까? 더는 탐구하고 배우고 익히고 연습할 수 없을 때가 되면, 그때 는 뭘 해야 할까, 캄캄하다. 얼굴 없는 그들과 이웃이 되어간다. 새삼, 단톡방에 꼬리 물기로 보고한 다른 이들의 체온을 살펴본다. 비슷하다. 저 낯선, 아니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나와 같은 체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닮은꼴의 모래알처럼 뭉쳐지지 않고 우리는 서로 스쳐 지나갈 뿐이다.


13일째, 친구 신청이 또 들어왔다. 한국에서 일한 지 17년이 되었다는 교포, 925호 박중남(가명)님. 단체방에 한글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몇 글자를 올렸길래, 혹시 도움 이 필요한가 싶어 한국어로 질문을 올렸더니 친구 신청을 한 것이다. 중국어를 쓰지 못하는 것 같아 한국 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중국어도 한국어도 쓰지 못하는 문 맹이었다니. 한국어는 겨우 읽어내는 정도라고 한다. 이 시대에 비행기로 국경을 넘 나드는 이들, 특히 우리 동포 중에 아직도 문맹이 있고, 내가 대화를 섞게 될 거라고 는 상상도 못 했다. 생각해보니 이곳에 함께 격리 중인 이들 대부분이 교포이고, 그중 글이나 핸드폰 조작이 미숙한 이들이 상당수인 것 같다. 교포들은 비자를 위해서 내 키지 않아도 중국을 방문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친구 신청을 수락하자마자 음성 통화가 걸려왔고, 박중남님은 42분 49초 동안 쉬지 않고 말을 했다. 특별히 도움을 청하 는 것도 아닌, 그저 대화에 굶주려 쏟아져 나오는 말들. 그에게서 내가 모르는 세계가 들려온다. 한국 대림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오전에만 120명을 검사했고, 내내 줄을 선 끝에 자신은 오후에 검사를 받았는데, 병원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 서 추위에 떨며 줄을 서서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화장실도 허락되지 않은 채, 가격은 18만 원. 믿기 어려운 말이다. 한국에서 고객을 이렇게 대하는 병원이 있다니, 그것도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이라니. 나의 경우 경희의료원에 예약하고 가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친절까지는 몰라도 정중한 대우를 받으며 검사를 받았고, 모든 절차는 실내 에서 이루어졌다. 가격은 25만 원. 가격의 차이 때문일까? 한국 사람이 18만 원짜리 를 받아도 그런 대우를 받았을까? 그는 위챗도 처음 써본다고 했다. 그래서 단체방에 서 거의 벙어리, 장님으로 지냈던 것이다. 내가 칭다오에서 알고 지내는 교포분들과 는 전혀 다르다. 나는 이 세계 사람들과 어디까지 소통할 수 있을까. 결국 내가 나서 그의 말을 끊고 만다. 그의 한국어는 종종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한국어도 중국어도 모두 어설프고, 한국에도 중국에도 그야말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 나와는 차원이 다른, 저 깊은 밑바닥의 디아스포라. 다른 대부분의 사람 눈에는 보이 지도 않는 곳에서 그들은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중국에는 국적 외에 아무것도 없어 환전해온 현금만을 사용하는 박중남님은, 원래 고향은 옌볜이지만 칭다오에 머물다 비자가 해결되는 대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한다. 그래도 한국이 좋아요, 작 년에 비자가 만료되었는데 나가라고 안 해서 얼마나 고마워요, 한다. 가족들 모두 한 국에 나와 있는 그의 국적은 아직도 중국이었지만 중국인들은 그를 내국인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저렇게 떠돌며 시대와 문명을 따라가지 못한 채 낯설고 어려운 여정을 겪어야만 한다니. 그 삶은 현대적 정보화 시대의 삶과 괴리가 커서, 자신의 권리가 무 엇인지,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그저 17년 전에 얻었던 것을 계속 유 지할 수 있기만을, 그는 간절히 바랄 뿐이다.

14일째, 자정 지난 22일 0시 55분. 껐던 노트북을 다시 켰다. 베란다에 나갔다가 반달을 보았기 때문에 일기에 몇 줄을 더해야 했다. 북서쪽 하늘에 높지 않게, 아주 예쁜 반달이 비스듬히 느긋하게 누워 있다. 그 따갑지 않은 달빛이 격리 중인 내 창에 인사를 온 것 같아 참으로 반갑다. 쉽게 보려 하지 말라고, 교주의 마지막 밤이 되어 서야 마중을 해준다. 어디에 가든, 이 모든 것들과 나는 함께인 것이라고 속삭이는 듯 하다. 내일은 또 다른 낯선 곳에서 저 달을 보거나, 혹은 못 볼 것이다, 늘 그곳에 있음에도.

칭다오로 돌아와 다니던 유치원을 졸업하고, 아들은 무난히 중국 현지 공립 초등 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무난히’란, 중국 아이들과 달리 한국 돈 약 350만 원 정도 의 기부금을 내고 입학 허가를 받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의미이다. 말이 기부금 이지 학교에서 금액을 제시하고, 전액 현금으로 교장실에 가서 직접 전달해야 했다. 전년도 입학생은 이것의 반, 그 전년도는 다시 그것의 반액을 요구했었다고 한다. 당 시 이미 중국의 대도시에서는 현지 공립의 외국인 입학이 전면 불가능했기에 이렇게 라도 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바로 가까이 칭다오 시내만 해도 불가능한 일이 고, 이곳 황다오구도 점차 그렇게 가는 추세였다. 사실상 아들은 이 학교의 거의 마지 막 외국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입학하고 얼마 후, 친구 많이 사귀었느냐는 질문에 남 자 친구 10명, 여자 친구 10명을 사귀었다면서, 중국어를 섞어 가며 불쑥 묻는다. ‘엄 마, 근데 外国是什么国家(외국은 어떤 국가예요)? 어떤 여자애가 我喜欢外国男孩 (난 외국 남자애 좋아해)라고 했어요.’ 한국어로 ‘외국’을 모르는 아이가 아니었다. 이 정도의 중국어 실력으로 중국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3학년쯤 되자, 정작 문제는 한국어였다. 3학년 어느 날의 대화, 엄마, 저 요즘 사춘기인 것 같아요. 그래? 왜 그 렇게 생각하는데? 음, 요즘 엄마가 잔소리하면 막 화가 나기도 하고…, 잠깐만요, 책 에 있어요, 하며 가서 why 책 시리즈 중 ‘사춘기와 성’ 편을 가져온다. 사춘기 증상을 설명한 부분을 펴고는 이야기하다가 ‘성적 호기심이 높아진다’에서 아들에게 너도 그 런 것 같냐고 물었다. 아들 왈, ‘네! 전에는 학교 성적에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은 좋 은 성적도 받고 싶고 그래요!’ 한국어 교육을 위해 그간 해온 것이라고는 4살에 한글 을 뗀 후부터 꾸준히 한글 그림일기를 쓰게 한 것이 전부이다. 한국에서 국어 교재를 사와 지도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내가 직접 지도하다가는 관계만 망치겠다 싶어 놓고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4학년쯤부터 다른 몇 명의 한국 형, 누나들과 그룹을 만들 어 논술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6학년에 올라가면서 담임 선생님이 바뀌고 얼마 지나 지 않아 아들에게서 전과 다른 뭔가 불안정한 낌새가 보였다. 하루는 학교에 관해 묻 다가 앞뒤가 맞지 않게 말을 바꾸는 아이를 집요하게 추궁했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 렸다. 설움에 복받친 울음은 아이가 말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연 아이는, 얼마 전에 담임 선생님이 저는 한국 애니까 이곳 고등학 교 시험도 볼 필요 없으니 공부를 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선생님은 신경 쓰 지 않겠다고…. 아이는 다시 울컥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학기 차이로 사실상 한국이 었으면 5학년인 나이였다.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왕따 문제보다 나은 건지 모르겠으 나, 타국에서 자라는 아들의 정신적 부담을 나는 얼마나 헤아려 주었던가. 보통 이전 의 한국 엄마들은 뭐라도 들고 선생님을 먼저 찾아가곤 했었는데, 나는 학기가 끝나 는 날에만 아들을 통해 작은 감사의 선물을 하곤 했다. 아들에게는 말 그대로 ‘미움받 을 용기’ 관해 이야기하고, 며칠 지나 화장품 한 세트를 들고 담임을 찾았다. 이야기 를 하다 내가 대학교 교사라고 하자 태도가 바뀌는 듯했다. 중국에서는 아직 교사라 는 직업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이후 담임의 태도는 달라졌고, 아들은 다시 즐겁게 생 활했지만, 1학기를 마친 후에 다시 불쑥 호주로 가게 되었다. 아들보다 한 살 많은 넷 째언니의 둘째아들은, 한국에만 가면 붙어 다니는 아들의 단짝이었다. 호주 유학에 대해 내가 물었을 때는 싫다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사촌형이 간다는 말에 자 기도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호주 셋째언니의 아이들에 대한 열정은 놀라울 정도이다. 나라면 사실 그렇게 여러 조카가 계속해서 장기적으로 다녀가는 것을 받아주고, 더구 나 내내 같은 정성으로 보살피기는 어려웠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였던 이들이 목적지’별’로 흩어져 다시 실려 간다. 황다오구로 이동하는 나와 황 선생님은 다른 2명의 여자분과 함께 황다오구 비교적 외진 곳, 대주산 아래의 4 성급 호텔로 들어간다. 이제 문제의 바이러스 감염 의혹을 어느 정도 벗었는지, 마스 크와 장갑 정도만 착용한 이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다시 이것저것을 작성하고, 단톡 방에 가입하고, 방으로 안내되어 격리되고 나니 저녁 시간이다. 교주에서 마지막 검사를 받은 게 그제인데, 다시 혈청 검사와 채혈. 한국에서 받은 한 번의 검사를 포함 해 여섯 번째이다. 내일 이곳을 나가도 남은 일주일 추가 격리 마지막 날 혈청 검사, 격리 해제 후 취업증 갱신을 위한 신체검사 중 채혈이 아직 더 남아 있다. 이참에 ‘피 갈이’가 되겠다 싶다. 내겐 덜어 내어도 되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가 보다. 교주 925호 박중남님이 불쑥 음성통화를 걸어온다. 자신이 들어간 곳에서의 일정에 관해 물으신다. 그분의 목적지는 공항 근처인 청양구이기에 그곳 관할 구에서 어떤 기준 이나 일정을 적용하는지는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쪽에 문의하셔야 한다 고 답한다. 그분과는 이미 다른 세계에, 나 또한 다시 낯선 곳에 와 있다. 한국에서 일 상을 회복하시기까지 순조롭기만을 빌 뿐이다. 우주 질서에서 계획과 어긋나는 이변 을 맞닥뜨리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이상이 없으면 학 교 기숙사로 이동한다 했는데, 검사 결과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우리 네 명 중 누구 에게 문제가 있는지, 어떤 문제인지는 알 수 없고, 재검사를 받아야 하니 대기하라고 학교 국제교류처 담당자가 통보해온다. 호텔 쪽에 알아보니 재검사가 아니고 재분석 이란다. 검사 결과에 이상이 없다는 5번째 통보를 받은 게 어제인데, 6번째 검사에서 문제라니. 공간 이동 중 세포들이 변이를 일으켜 분석이 안되는 모양이다. 누구의 문 제인지 모르지만 같은 차로 이동한 4명 모두 대기 상태로 하루를 더 묵는다. 밤 12시, 개인톡을 신청해 나름 친절하게 안내해주던 간호부 직원이 재분석 결과는 이상 무라 고 귀띔을 해준다. 그래도 다음 일정에 대해서는 통지를 기다려 달라면서. 다음날, 구 에서 파견한 차량으로 드디어 학교로 향한다. 함께 이동하는 다른 한국 분과 대화를 해보니 자신은 집으로 간다고, 자가 관찰 기간 일주일 남았다고 한다. 관찰 기간에는 사람 많은 장소가 아니면 외출도 가능하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 사는 황 선 생님과는 달리, 나는 아들의 등하교 등의 이유로 외부에 살았기 때문에 기숙사 격리 는 결코 자가 격리가 아니다. 우리는 대학교 소속인 관계로 학교 관리권 내에 있어야 하고, 외출도 전면 금지인 채 다시 일주일을 격리해야 한다. 학교 담당자는 나도 집으 로 가면 안 되느냐는 말에 규정에 따라 달라고 구슬리며, 대신 나름 깔끔하고 정성껏 준비해둔 기숙사 사진을 보내온 터이다. 하긴 담당자에게 무슨 죄가, 무슨 권리가 있겠는가. 중국에서는 결정권을 가진 사람을 대면하기가 매우 어렵거니와, 누가 결정권 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시스템이 대부분이다. 오랜만에 들어서는 학교 교정에 봄꽃이 만발해 있다. 그리고 그 꽃들과 학생들이 이루는 풍경으로부터 차단된 공간에 다시 갇힌다.

아들이 호주로 가면서 나 또한 자연스레 가족들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당시 남편 은 중국 연길에 머물면서 그곳의 한국 회사에 출근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4학년이 되면서부터 이곳 대학교에 출근하기 시작했고, 아이의 비자도 아빠의 동반 비자가 아 닌, 내 취업 비자의 동반 비자로 전환한 상태였다. 호주에서 아들은 엄마와 있을 때보 다 한층 더 날개를 펴고 있었다. 아들에게 나는 결코 유일한 정답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렇게 1년이 훌쩍 흘러 호주에서 초등학교 졸업식을 하고 돌아왔지 만, 아들은 다시 다니던 초등학교에 복학해야 했다. 1년 손해를 감수하기로 하고 떠난 유학이었다. 중학교 입학은 초등학교 때만큼 녹록지 않았다. 여러 공립 중학교에 알 아봤지만, 외국 아이를 선뜻 받아주겠다는 학교도 없었고, 입학 가능한 학생들의 고 유번호가 자동으로 넘어오는 것 외에 따로 입학 허가를 받는 과정을 아는 곳도 없었 다. 현지 교육국에 문의하니 외국인의 입학을 규제하지는 않는다며 학교로 연락하라 고 하고, 학교는 모른다고 하고…. 결국 중국 사립 학교로 방향을 돌렸다. 처음에는 구경이나 해 보자고 아들과 함께 갔는데, 공립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우수한 시설과 환경에 아들은 대번에 이곳에 다니겠다고 했다. 사실 중국 사립의 학비가 그렇게 비 싼 줄 알았더라면 다른 방법을 더 모색했을지도 모른다. 순수 학비만 학기당 한국 돈 약 300만 원 수준이었고, 급식 등 제반 비용을 합하면 1년에 약 1천만 원을 들여야 했 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 마음을 둔 아들에게 다른 말을 하기도 미안했고, 게다가 이제 다시 다른 곳을 알아보기에는 너무 지친 상태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들은 운이 참 좋 은 셈이다. 공립에 갔더라면 코로나로 등교를 못 하는 지난 1년 내내 아들 한 명을 위 해 실시간으로 온라인 수업 중계를 해주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입학한 학교 는 기숙사 생활과 등하교 생활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기숙사 시설도 깔끔하 고 괜찮은 편이었으나 아들은 등하교를 선택했다. 중국의 중학생들은 한국의 고등학생 수준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고등학교가 아직 의무 교육이 아닌 데다가, 학교가 턱 없이 부족해서 약 6~70%의 학생만이 대학교 입학이 가능한 일반 고교로 입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고등학교마다 등급이 있어서 성적에 따라 해당 등급의 학교로 입학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아들은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오전 7시에 등교해 서 밤 9시에 하교하게 되었다. 그나마 사립이라서 야간에 학교에서 숙제 등을 마치게 하는 것이고, 일반 공립 학생들은 6시경 집에 돌아와 밤 11시, 12시까지 엄청난 양의 숙제를 스스로 해내야 하는 게 현재까지도 일반적이다. 덕분에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등하교를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아들 혼자 못 다녀서가 아니라, 스쿨버스나 일반 버 스로 가게 하면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이었다. 성장기에 이 정도 의 일정이 무리가 되겠다 싶으면서도, 나는 아침마다 아이를 흔들어 깨워주는 엄마 가 아니었다. 이미 호주에서부터 아들은 알람을 두고 혼자 일어나는 생활을 했고, 초 등학교 때도 아침에 한 번 이상은 안 부른다는 게 나의 원칙이었다. 덕분에 지각도 종 종 했지만 겪어야 할 과정이라 여겼고 나머지는 아들의 몫이었다. 중학교 첫 학기, 교 우 관계나 학업 등, 아들은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고 제법 유쾌하게 생활했고, 큰 금액 은 아니라도 장학금도 받으며 학기를 마쳤으나, 막상 한국에서 오후 2~3시면 하교하 고 숙제도 거의 없는 형들을 보며 많이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리 간단히 한 국에서 공부하겠다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들의 선택은, ‘자유롭다’가 결코 ‘쉽다’의 동의어가 아님을 깨닫는 과정의 시작인 것을….

1년 2개월 15일 만의 귀가. 드디어 모든 여정을 마치고 일상 세계에 안착한다. 다 시 삶으로 떠오르기!2) 1년 넘게 비워 둔 집에 1년 넘게 한국에서 생활하며 생긴 짐을 바리바리 들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격리 기간 중 친구의 도움을 받아 미 리 집을 청소해 둔 터라 그나마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선다. 우리집이라는 공간도 공 간이지만, 내가 들어온 저 문으로 언제든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 24일간의 격리를 마 친 내게는 감격스럽고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격리 해제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이 후 2주간 온라인 수업을 계속하고 그 이후부터 대면 수업을 시작하라고 한다. 학생들 과 교실에 대한 그리움이 충분히 무르익도록 기다리라 한다.


아들이 한국에서 첫 시험인 중간고사를 마친 지 일주일쯤 지난 날, 한국을 떠난 후 처음으로 아들에게서 음성통화가 걸려온다. 항상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 했고, 그나 마도 답장이 너무 늦어 1시간 초과할 때마다 용돈에서 1000원씩 차감하겠다는 벌칙 까지 정한 상태다. 음성통화는 예약을 해야 하는 수준이었는데 불쑥 통화라니. 얼른 전화를 받는다. 엄마, 저 이거 이미 여러 날 동안 생각하고 말하는 건데요, 하며 사뭇 진지하게 운을 뗀다. 그래, 뭔데? 말해 봐. 저… 자취하면 안 돼요? 순간 가슴이 철렁 했지만 태연한 척 이유를 묻는다. 공부하고 싶은데 환경이 아닌 것 같아요. 호주에서 1년 동안 컴퓨터나 개인 휴대폰 없는 생활을 하고 돌아온 후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 프로게이머의 꿈을 갖고 틈만 나면 게임에 몰두하던 아들, 한국에서 중학교 3학년생 이 되어서도 중간고사 전까지 학교 수업이 다 쉽고 모르는 것이 없다며 별도의 과외 나 학원도 거부하고 설렁설렁하던 아들이다. 사실상 엄마와 떨어져 한국에서 ‘한국 유학’을 시작한 아들은, 비록 요리 솜씨 좋은 넷째이모 집에서 환대를 받고 있긴 해도 아직 자신의 책상 하나 없는 처지이다. 원래는, 코로나 이전인 재작년부터 서울 근교 에서 직장에 다니는 아빠와 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 생활할 계산이었다. 하지만 아빠 는 강북에서 부천까지 2시간의 출퇴근 거리는 무리라며 주말에만 볼 수 있다는 상황 이다. 임시로 머물기로 했던 이모 집에서 계속 다녀야 하는 것이다. 집에 도둑이 들어 자신의 장난감을 훔쳐 가지나 않을까 걱정하던 시절, 사촌형과 아옹다옹할 때면 빨리 중국 집에 가자며, ‘이 집에 내 꺼는 하나도 없어!’ 하던 아들. 내가 이제 막 끝낸 ‘우 리집’ 없는 생활을 아들은 다시 시작하고 있다. 나 또한 이 시점에서 직장을 포기하고 중국 생활을 정리해 귀국해야 하는지 고민 중이기는 하나, 아들의 이 두 번째 독립이, 어쩌면 너무 이른 영원한 독립이 될지도 모른다. 아들의 태명은 광복절과 연관이 있 을 뿐 실은 廣福의 의미였건만…. 어떻든 계속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아들, 그야말 로 사춘기가 왔는지 ‘성적’ 호기심이 높아졌다!


특별히 수난이 많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여정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변 했을 줄 알았는데, 바로 어제 만난 듯 여전한 현지 친구들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이 칭 다오를 떠나던 날에서 중간을 건너뛴 채 오늘로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져 버렸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꾸다 깨어난 듯 어리둥절하다. 하긴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나의 여정 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모험은 생애 처음 겪는 격리 기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 은 이미 작년에 한국에 갔던 날부터 시작된 것이었고, 어쩌면 중국에 처음 오던 그때 부터, 혹은 성인이 되면서부터, 아니, 이미 오래전 엄마의 몸에서 분리되어 이 세계로 들어오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삶은 뿌리박기나 안착하기가 아니라, 랭보의 그것처럼 ‘떠오르기’인 듯하다. 그리고 설혹, 인터넷 등 모든 통신이 끊긴다 해도, 완 전한 격리란 불가능할 것 같다.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생활해내고 있다면, 그 힘은 어 딘가에 있는 누군가를 향한, 또는 그들이 보내오는, 시공을 초월하는 에너지일 것이 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