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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한민족 한마음 한의학 진료소가 만들어진 사연
작성일
2022.01.07

체험수기 - 대상  

한민족 한마음 한의학 진료소가 만들어진 사연

송 영 일 [우즈베키스탄]



“할머니 좀 어떠셨어요?”

토요일 아침은 본래 달콤한 늦잠과 느긋한 하루를 기대하는 법인데, 요즘에는 아침 일찍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만남을 가져야 하는 바쁜 요일이 되었다.
“일 없소. 일 없소. 댕기기가 좀 바쁘지.”
언뜻 들으면 구직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의 하소연으로 들린다. 일해서 돈 벌고 싶은 데 도통 일이 없다는 푸념과 일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느라 바쁘신 고생스러움을 토로 하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할머니가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괜찮아. 괜찮 아. 걸어 다니면 좀 아파.”이다. 한국 사람이 쓰는 단어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시 는 이분들은 바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살고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그리고 우 리는 이분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같이 오던 까짜할메이 있자에요. 오늘 못 왔지”
“왜요?”

“바자르(시장)에 갈 일이 있다 했지. 그래서 오늘은 나 혼자 왔지. 내 아침부터 다 블레니아(혈압) 올라갔소. 갈라바(머리)아프지, 춧춧(조금) 우스탈라스트(피곤)하단 말이요. 깔레나(무릎)는 계속 바쁘지. 나를 좀 고쳐주겠소?”
김 폴리나 할머니는 아픈 무릎을 쓰다듬으며 활짝 웃으셨다. 할머니의 고려 말은 통역을 거치지 않고도 다 알아들을 수가 있다.

고려인 어르신들의 고려 말은 함경도 방언에 속한다고 한다. 러시아어 단어가 중간 중간 섞여있지만 익숙해지면 이해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 우즈베키스탄에서 60-70 년을 넘게 러시아어만 말하며 살아오셨기에 러시아어가 더 편하실 텐데도 한사코 고 려 말을 고집하신다. 고려 말을 모르시는 분들은 크게 부끄러워하시는 경우도 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내 고려 사람이지만, 고려 말이 서툰데 그래도 다 알아듣소?”
자신의 고려 말에 자신 없어하시는 분도 계시고, 어쨌든 고려 말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하시는 분도 계신다.
“로샤(러시아)말 말고 고려 말 합소. 같은 고려 사람끼리”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그분들의 얼굴에 안도감과 미소가 보인다. 그리 고 한국에 가서 일하고 있는 자식들 이야기와 한국에 다녀온 이야기들은 빠질 수 없 는 자랑거리다.
“딸도 아들도 다 한국 있지. 한국에서 신발도 보내주고 그리하지. 내 한국에도 시번 (세번) 댕겨왔지”
고려인 할머니들의 자식 자랑은 한국 할머니들하고 레퍼토리가 똑같다. 어쩔 땐 내 가 있는 곳이 우즈베키스탄이 아니고 한국 시골 어딘가쯤인 것 같다.  

내가 우즈베키스탄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지 어느덧 도합 8년이 넘었다. 한국 국제협력단 국제협력의사로 3년, 이어서 글로벌 협력의료진으로 5년 넘게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에게 의료지원과 현지 의료인 교육을 해오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130여 개 민족이 모여 사는 다민족 국가다. 우즈벡 민족이 가장 많은 비율(약 84%)을 차지하고 있다. 그다음으로 타지크 민족, 러시아 민족, 카자흐 민족 등이 살고 있다. 그중 고려 인은 1%도 안되는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내가 고려인 동포 어르신들만을 위한 특별한 의료봉사를 결심한 것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도 그렇지만 보람차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2018년 여름이었 다. 우즈베키스탄은 한여름에 섭씨 45도가 기본이다. 가끔 50도가 넘는 폭염과 싸워 야 할 때도 있다. 더위가 심상치 않던 어느 날 아침 7시쯤, 시원한 마룻바닥에서 뒹굴 며 출근 전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때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도 다 양한 사람들로부터 치료를 원하는 상담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 당시에는 러시아어가 익숙하지 않아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출근시간 전이었 다. 하지만 나는 그 전화를 받았다. 아마 중요한 다른 일이 있어, 그와 관련된 전화이 겠거니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진료 여부를 묻는, 통상적으로 내 가 귀찮아했던 유형의 전화였다. 나는 전화를 건 사람의 러시아어를 잘 이해하지 못 했다. 간신히 내가 이해한 바로는 지금 진료를 하고 있느냐는 뜻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다고만 짧은 러시아어로 대답했다. 우리의 통화는 그렇게 짧게 끝났다. 그날 진 료하면서 알아본 바로는 아침에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방문하지 않았다.
‘전화를 했으면 와야지. 물어보기만 하고 안 오다니.’ 그런 서운한 마음이 잠깐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이날은 휴진일이었다. 휴진일에는 보통 오전에는 강의 준비를 하고 오후에 강의를 한다. 폭염 속에 에어컨도 없는 내 진료실에서 강의 준비에 지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축 처져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반가운 미소를 띤 얼굴이었지만 처음 뵙는 고려인 아저씨였다. 한국어를 전혀 못해 통역 선생님을 불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바로 어제 전화를 걸었던 그분이었던 것이다. “어제 전화하셨으면 어제 오셨어야죠. 왜 오늘 오셨어요?” 나는 강의 준비에 방해를 받았기에 타박하듯이 말했다.
“어제 전화하고 택시 타고 오늘 아침에 오셨다”라고 하네요. 통역 선생님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이건 무슨 소린가?’
진료부를 보니 주소가 카라칼팍스탄 쿤그랏이다. 쿤그랏은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1300km 이상 떨어진 곳으로 택시로 1박2일에 걸쳐 와야 하는 곳이다. 그 먼 길을 왜 오셨나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제발 나한테 치료받으면 다 나을 것 같아서라는 부담스 러운 이유 때문은 아니라고 대답하셨으면 했다.
“선생님한테 치료받으려고 오셨다고 하네요.” 통역 선생님도 어이없는 눈치였다. 큰 기대를 가지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이미 여럿 있었다. 내가 죽은 사람도 살린 다는 화타나 편작도 아닌데 나를 왜?
“쿤그랏에도 병원 있고 의사도 많은데 그리고 가까운 큰 도시 누쿠스도 있는데…” 나는 아저씨가 다른 일로 수도에 오신 김에 들렀다는 이야기를 하셨으면 했다. 그 래야 내 마음이 조금 편해질 것 같았다.
“같은 까레이쯰(корейцы)라서   오셨대요.”
아저씨가 말하는 러시아어는 간단했기에 나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대답을 마친 아저씨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이어서 하신 말씀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마야 파밀리야 김(내 성은 김이요).”

같은 까레이쯰(корейцы). 우즈베키스탄에서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까레예츠(кореец, корейцы의 단수형)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곧 바로 местный? из южной или северной? 라고 다시 물어본 다. 현지 고려인? 남한? 북한? 이냐고 묻는 것이다. 여태껏 질문에 수백 번 답하면서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고 절대 북한 사람도 고려인도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더 나아가 그들과 나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고 여겨왔다. 내가 우즈베키스탄에 귀화한 것도 아니 고, 내 친척이 북한에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다 1박2일간 택시를 타고 나를 만나러 왔다는 김 아저씨의 ‘같은 까레이쯰(корейцы)’ 라는 말에 오랜 시간 품 어왔던 의문이 풀렸음을 깨달았다.

김씨 아저씨 말고도 수많은 고려인 동포 어르신들이 나를 찾아왔었다. 러시아는 물 론이요 인접 국가인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에서 택 시, 기차, 비행기를 타고 진료를 받으러 오시는 분들도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 온 자 제분들을 데려오시는 경우도 있었다. 스웨덴에서 살고 있는 따님을 데려오셔서 따님 진료상담을 하셨던 아주머니도 계시고, 벨기에에서 일하고 있는 자제분의 부축을 받 고  오셔서 딸 치료를 부탁하신 할아버지도 계셨다.

이런 우리 동포 할머니, 할아버지를 진료하면서 품어왔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진 료 후에 그분들의 미소와 안심하는 웃음소리를 마주하다 보면 그분들은 나를 바라보 면서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나를 통해 무엇 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굳이 나를 만나서 확인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고향이 그리워서 나를 찾아오신 걸까?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한국이 아닌 러시아 연해주가 그 분들의 고향이 된다. 조금 더 범위를 넓히자면 북한 지역이 고향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니 내가 고향을 대신하진 못할 것이다. 게다가 고려인 동포들은 마음만 먹으면 러시아는 물론 북한도 자유로이 갈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일까? 고려인 어르신 들이 한국에서 온 한의사인 나를 신뢰하고 멀리서 오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나에게 치 료받길 원하는 것은 쉽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먼 이국 땅에서 만난 같은 민족, 서로가 다른 언어를 쓰고, 국적도 다르지만 그 모든 것을 하 나로 묶어내는 원류(源流)의 힘이 우리 마음속에서 계속 흐르는 것만은 분명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게 항상 궁금했었는데, 김 씨 아저씨의 방문으로 이분들이 한민족 이라는 정체성을 확인받고 기뻐하셨던 것이구나라고 어림잡아 헤아릴 수 있게 된 것
“멀리서 오신 수고로움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진료하겠습니다”
김 씨 아저씨의 거친 손을 잡고 치료실로 안내하면서 드린 말씀이다.
그 후로도 김 씨 아저씨는 일 년에 한두 번 전화를 거신다. 그 사이 나도 러시아어 가 많이 늘어 통역 없이도 아저씨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 택시 탑니다. 내일 진료합니까, 독토르 송?”
“오신다면야 시간을 내서라도 봐드려야죠. 조심해서 오세요” 어느새 김 씨 아저씨와는 친척처럼 푸근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고려인 어르신 모든 분들과 진료실에서 마주 앉아 괜스레 손을 맞잡고 싶어 졌다. 80여 년 전에 강제 이주 역사를 가진 고려인 어르신들은 사실 친근한 우리 동 네 할아버지, 할머니나 마찬가지 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어로 кореец, 영어로는 korean이다. korean은 남한 사람만을 의미하 지 않는다.  남한 사람, 북한 사람, 고려인, 조선족, 미국계 한국인 등 우리는 우리를 세세하게 구별하고 나누지만 모두가 korean, кореец, 한민족이다. 우즈베키스 탄의 고려인 동포는 3개의 조국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몸이 태어난 곳인 우즈베키스 탄, 생각을 지배하는 언어의 조국인 러시아, 민족의 조국인 남한 혹은 북한. 그 어디 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그분들이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곳. 그곳은 바로 같은 핏 줄인 한민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한국일 것이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 온 나와의 만 남은 그분들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달콤하면서도 선명한 향수(鄕愁)에 젖는 순간일 것이다.  

고려인 어르신들이 진료를 마치고 병원 문을 나서실 때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이 있 다.
“아슴차이요!”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어르신이 숨이 차고 가슴이 불편하시다는 이야기로 이해하 고 긴급하게 통역을 불러 심각한 표정으로 병력을 캐물었었다. 조금 후에 본 뜻을 알 게 된 나는 너털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아슴차이요’는 ‘고맙습니다’란 뜻으로, 그 기원을 따라가다 보면 조선 초기 육진이 위치한 곳에서 사용되던 방언 중 하나라 고 한다. 그 말이 낯설고 선뜻 이해가 안 되지만 결국 우리말의 사투리로 이해하면 되 는 것이다. 경상도 사투리, 전라도 사투리처럼 말이다.

고려인 어르신들과 더 많은 만남을 준비해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이왕이면 내가 항 상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서서 그분들을 기다리면 나를 찾아오시기가 한결 수월하 실 거라 믿었다. 하지만 결심만 섰을 뿐이지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할지는 쉬이 판가 름이 되지 않았다. 본래 일하던 장소에서 의료봉사를 진행하기에는 방해요소가 많았 다. 일하는 장소가 봉사 장소가 되는 순간 두 영역에서 모두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새로운 장소를 물색해 보았지만 나 역시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외국 인이다 보니 허가받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의료봉사이지 않은가.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뒷감당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지지부진하던 중에 우즈베키스탄 고 려문화협회 박 빅토르 회장님이 치료차 나를 찾아오셨다. 우즈베키스탄 국회 하원의 원이기도 한 박 회장님은 치료를 받으시다가 조심스레 이런 말씀을 하셨다.

“독토르 송. 혹시 우리 협회에 와서 우리 고려인 할머니, 할아버지들 정기적으로 치 료 좀 할 수 있나요? 다른 건 다 내가 준비 할테니 독토르 송은 진료만 해주시면 돼 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협회에 찾아와 치료받고 싶다고 성화를 부려서 힘드네요”
내원환자가 많아 오랜 대기시간 끝에 치료를 받으시게 되어, 과연 바쁜데 그런 일 을 해줄까란 의구심과 어쩔 수 없는 부탁이라 그런지 미안함이 말씀에 섞여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이것은 매우 반가운 제의였다.  
“네? 그럼요! 저도 준비하던 일입니다.”
흔쾌한 응답에 박 회장님이 오히려 놀란 눈치였다.

그렇게 박 회장님과 의기투합해서 진료소를 만들기로 했다. 진료소가 들어설 장소 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한국문화예술의 집으로 결정되었다. 한국문화예술의 집 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동포들이 주축이 되어 대한민국과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지 원으로 만든 대규모 공연장과 전시장을 갖춘 문화센터 성격의 공간이다.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의 우즈베키스탄 방문 시 양국 두 정상이 직접 개관식에 참여해 축사를 했을 만큼 양국 우호의 의미가 큰 장소이다. 진료소를 만들기로 결정했으니 진료소 이름을 정해야 했다. 진료소 이름에는 3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 째,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분들의 범위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둘째, 진료소 가 추구하는 목표나 성격을 나타내야 한다고 보았다. 셋째, 어떠한 의료 진료를 제공 할지 표시하기로 했다. 김 씨 아저씨의 방문을 떠올리며 ‘한민족’이라는 말은 꼭 넣고 싶었다. 진료소에 오시는 분들은 주로 고려인 동포 어르신들일 테지만 우리 진료소는 한민족 모두에게 열려있는 곳이고 싶었다. 우즈베키스탄 거주 한인들도, 우즈베키스 탄에 있는 탈북민도, 잠시 부모님을 방문하러 온 유럽 어느 국가의 시민권을 가진 고 려인 후손들도 나는 다 포용하고 싶었다. 그렇게 진료소의 주요 방문자를 한민족으로 정하고 나서 우리 진료소의 성격과 목표 같은 것을 이름에 넣고 싶었다. 거창한 정치 적 구호인 민주, 평화, 통일이라는 말은 애초에 이 진료소에 쓰기에 부적절하다고 생 각했다. 이 진료소는 아주 작은 진료소일 뿐이고, 어느 정치적인 단체의 후원을 받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어르신들이 나를 보고 느끼시는 마음이나, 내가 어르신들을 진 료하면서 느꼈던 마음이 결국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분들이 나를 바라보 고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깨닫는다면, 나 역시 고려인 어르신들을 진료하면서 우리 가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지만 우리는 결국 한마음이라는 생각으로 진료소 이름에 한마음을 넣게 되었 다. 마지막으로 한의학 진료를 하니 한의학을 꼭 넣을 필요가 있었다. 고려인 어르신 들에게 한의학은 단순한 의학이 아니고 한민족을 상징하는 의학이다. 1937년 스탈린 의 명령으로 약 18만 명의 한인들이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할 때도 한 의학은 항상 그분들과 함께 했으며, 힘든 정착 과정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한의학을 공부하는 고려인 의사들도 많았 고, 현재 우즈베키스탄에서 침 치료 잘하기로 유명한 의사들은 대부분 고려인과 그 후손들이다. 이렇게 ‘한민족 한마음 한의학 진료소’란 긴 이름을 짓고 진료소를 준비 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2021년 4월 3일. 한민족 한마음 한의학 진료소를 열게 되었다. 처음 문을 열 때, 이미 많은 어르신들이 문 앞에 진을 치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반가운 얼굴도 있고, 처음 뵙는 분도 계셨지만 우리는 모두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나눴 다. 처음 진료를 시작하면서 통역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말로 다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나도 오랜 시간 내가 생각했던 봉사활동을 기다 려왔지만, 이분들도 긴 시간 동안 나를 기다려 왔음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진료를 하다 보니 진료소가 대공연장 바로 옆이라서 대공연장의 소리가 벽을 통해 들려왔다. 하지만 시끄럽다기보다는 정겨운 상황이었다. 다름 아닌 한국 노래가 흘러 나왔기 때문이었다. 한국문화예술의 집은 고려인 동포들이 그리운 한국 문화를 만나 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한국의 춤, 노래, 연극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체적인 전통을 가지게 된 고려인들의 춤과 노래, 연극 연습이 항시 있다. 자신의 문화를 보존하고 더 아름답게 만들려고 하는 부단한 노력은 나를 만나러 오신 김씨 아저씨의 마음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한민족 한마음 한의학 진료소가 한국문화예술 의 집에 생기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것도 대공연장 바로 옆에 말이다.

합창단원으로 활동하시는 임 스베타 할머니, 연극 극단 감독이신 허가이 세르게이 할아버지도 토요일에는 나를 만나러 오신다. 누워서 침 치료를 받으시다가 노래도 한 소절씩 하시는, 흥이 충만한 스베타 할머니는 자기 마을 ‘뽈리따젤’ 자랑을 하셨다.
“선생님. 내 뽈리따젤에서 왔소. 뽈리따젤 가봤소? “잘 알죠. 제가 전에 거기서 봉사활동하곤 했어요”

14년 전에 우즈베키스탄에서 근무할 때 고려인 마을인 뽈리따젤 보건소에서 봉사 활동했던 게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한국에서 온 같은 동네 사람을 만난 것 마냥 반가웠다.

뽈리따젤은 구 소련 시기에 가장 생산성이 좋은 집단농장으로 뽑혀, 구 소련을 방 문하는 외국 귀빈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곳이었을 만큼 유명하고 고려인들에게 의미 깊은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고려인 동포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

할머니는 ‘뽈리따젤’ 마을 이름이 ‘도스틀릭’이라는 우즈벡식 이름이었다가 최근에 ‘황만금’으로 바뀌었다고 알려주셨다. ‘황만금’은 뽈리따젤의 지도자였던 분의 이름이 다. 그는 막대한 생산성 증대 업적을 인정받아 1957년에 소련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 장을 받은 바 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마을 이름을 한민족의 한 사람 이름으로 바 꿔주었다는 이야기에 할머니와 같이 환호성을 지르며 손뼉을 치며 같이 기뻐했다. 한 민족이라면 같이 기뻐해야 할 자랑스럽고 가슴 뭉클한 사건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 다.

다음 순번으로 접수된 할머니를 모시고 진료를 시작하는데 할머니가 불쑥 이야기 를 꺼내셨다.
“내는 중국에서 왔소. 내가 5살 때. 그래서 내 이름은 러시아 식이 아니요.” “아. 그래서 이름이 한자식 이름이네요. 중국 어디에서 오셨어요?”
“지시라고 하얼빈에서 더 가야 있지. 우리가 8남매인데, 어릴 때 아버지가 다 데리 고 우즈베키스탄으로 왔지.”
이제 정말 진료소에 한민족이 다 모이고 있다. 어디에서 태어났든, 어디에 살든, 어 느 언어를 쓰던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곳에서 서로를 보듬고 이해 하고 삶의 큰 바탕을 공유할 수 있게 되어 안정감을 유지했으면 좋겠다.

진료를 끝마치고 인사를 나누시려는 어르신들께 내가 먼저 고개숙여 “아슴차이요” 라고 말했다.
다들 깜짝 놀라시며
“선생님. 고려 말도 알고 있소?” “당연히 알죠. ‘고맙습니다’잖아요.”
고맙습니다는 뜻의 이 말은 고려 말이지만, 함경도 방언이면서 전라도 방언이기에 결국엔 한국말이다. 그리고 한국인인 내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살고 계신 고려인 어르 신들과 주고받는 말이기에 이제는 한민족의 말일 것이다.

이번 주에도 “안녕하세요”로 활기차게 시작해서,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어르 신들과 “아슴차이요”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다음 주에도 우리는 다시 만나 한민족 한 마음을 확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