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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꼰대기
작성일
2022.01.12

단편소설 - 가작

꼰대기

박 용 석 [사우디아라비아]


1. 꼬인 군번
저는 젯다의 꼬인 군번입니다. 아, 저는 군인이 아니니 군번이란 말이 적절해 보이 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저의 상황을 표현하는데 꼬인 군번이란 말보다 더 좋은 단어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제가 꼬인 군번이란 말을 처음 들은 것은 갓 대학을 입학했 을 때였습니다. 그때 마침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던 한 선배가 막 제대를 해서 3 월에 복학을 했습니다. 그는 1학년 때 이수하지 못한 한두 과목을 우리와 같이 듣기 도 했는데 그 덕분에 우리와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같이 밥을 먹거나 시 간이 남아서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옹기종기 앉아 있을 때 가끔 자기 군대 시절 이야 기를 하면서 자기가 꼬인 군번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때가 제가 처음으로 제 인생에서 꼬인 군번이란 말을 들은 때입니다.


말인즉슨, 이 선배가 자대에 배치를 받고 보니 자기 바로 위에 선임들은 많은데 그 위에는 고참들이 별로 없어서 군 생활의 거의 절반이 가까이 오기까지 새로운 신병을 못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소대의 만년 신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죄다 자기가 도맡아서 한 일이며 손글씨를 잘 쓴 죄로 행 정병으로 뽑혔는데 훈련이 있을 때마다 셀 수도 없는 보고용 차트를 매직으로 쓰느라 고 며칠 밤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일이며 그 외 군대에서 겪은 크고 작은 힘든 일들을 하소연하듯이 풀어내곤 하였습니다. 행정병 일이 바빠서 첫 휴가도 같이 입대한 훈련소 동기들 보다 한참 후에나 나올 수 있었노라고 푸념할 때면 군대 관련 경험이 라고는 초등학교 때 위문편지 보낸 것, 그리고 고향이 전방에 가까운 관계로 학교로 가는 길에서 행군 훈련하는 군인들에게 건빵 얻어먹은 것이 전부인 저에게도 꼬인 군 번이란 말이 당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힘들 수 있겠는지 짐작이 되었습니다.


대충 10여 년 넘게 잊고 지내던 꼬인 군번이라는 단어가 제 입가에 다시 오르내리 게 된 것은 90년대 말에 제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젯다라는 도시에 정착하게 되면서부 터입니다. 젯다는 사우디아라비아 서부 지역의 중심 도시로 홍해를 면한 항구도시입 니다. 저는 도착하자마자 기존에 거주하고 있던 교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건 제가 인간적으로 잘나서가 아니라 거기에는 그럴만한 젯다 교민사회의 특수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젯다에 온 지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근무하느라 바쁜 관계로 아직 주변 지역의 지리도 잘 몰라서 한국 식당 두 곳과 숙소 그리고 근무지만 겨우 다니고 있었 는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교민회의 사무국장이 제가 일하는 사무실로 전화를 해 왔습 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사무국장의 목소리는 약간 수줍은 듯했습니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조금 망설이다가 그가 약간 더듬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음, 저는 젯다 교민회 사무국장인데요, 젯다에 오셨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생활 하는데 불편한 것은 없으시고요?”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8월도 덥긴 하 지만, 정말, 이곳의 8월 날씨는 듣던 것보다 훨씬 덥네요. 완전히 노천 사우나인데요”


“그래서 말인데 오늘 저녁 특별한 일 없으시면 회포도 풀 겸 한 7시쯤에 우리 집에 서 저녁이나 같이 하면 어떨까요?”


“저야 좋죠. 감사합니다. 제가 댁을 잘 모르니 아리랑 식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6시 30분에 거기서 뵙겠습니다.”


약속 시간에 딱 맞춰서 탱크 엔진 같은 굉음을 내는 각진 디자인의 86년식 진회색 시보레 카프리스를 몰고 온 사무국장은 40대 중반의 온화한 인상이어서 타고 있는 8 기통 미제 차만큼이나 믿음이 갔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처음 보는 손님 둘이 먼저 도 착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마 사무국장이 혼자 이야기하기 밋밋해서 분위 기를 띄우려고 초대한 것 같았습니다. 한 명은 다부진 덩치에 어깨가 넓어서 한 번에 봐도 운동으로 다져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한 명은 줄곧 다소곳한 자세로 앉 아 있었는데 선비 다운 점잖은 기품이 흐르는 것이 함부로 대할 사람은 아니라는 인 상을 받았습니다.


저녁상을 기다리면서, 어색한 침묵이 부담스러운 듯 사무국장이 좌중에 대한 소개 를 시작으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저기, 이 분은 교민회 부회장이시면서 건설업 하시는 김 사장님이시고 이 분은 무 역업을 하시는 박 사장님이세요.”


“아, 저또한  박 씨입니다.”  


종씨를 만난 반가움에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왔습니다.


“아니, 가만히 보아하니 양반가 자제 같은데 남한테 자기를 소개할 때는 박가입니 다 해야지 박씨가 뭐요? 나는 청나라 시조 누르하치하고 종씨인 김 명근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정색을 하며 화를 내는 듯이 시작한 말투에 순간 긴장했던 저는 떡 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체격의 외모와 다르게 누르하치와 종씨라고 말하며 익살스럽게 마무리하는 김 사장의 말 솜씨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르하치가 정말 신 라 왕족의 후손인지는 차치하고 이분의 재치 있는 한마디에 어색했던 분위기는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좌중은 박장대소를 하였습니다. 갑자기 우리는 30년 지기 친구처 럼 격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농담이 아니고요. 우리 역사에서 광해군이 그냥 계속 왕을 하고 여진이 명나 라 정벌하려고 할 때 후금하고 같이 한편 먹고 거래를 했어야 했어요. ‘같이 명나라 정벌한 다음에 중원은 너희가 차지하고 만주는 우리 주라’ 하면서 말이죠. 아, 막말 로, 고구려, 발해 주민들이 상당수가 말갈 즉, 여진이었는데 만주 땅 원주인이 우리라 는 것은 우리도 알고 지들은 더 잘 알았을 것이니, 중원하고 바꾸자고 하면 그렇게 했 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동북아 역사가 바뀌고 우리나라도 지금 세계 2-3등 하는 강 국이 되었을 텐데. 하, 생각하니까 또 아쉽네”


“에이, 그거야 지금 지나온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그 시대 를 살다간 사람들은 언감생심 감히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겠어요. 더군다나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 도움도 받았는데요.” 그 사이에 안면을 좀 텄다고 제가 반론을 폈습니다.


“아, 누가 뭐래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그러나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우리나라가 잘 되는 방향으로 모든 정책 결정을 해야 돼요. 우리가 오늘 결정한 일이 후손들 인생을 바꿀 수 있다니까요.”


“지금 보니 청와대에서 외교정책 보좌관 정도 하셔야 되는 인물이신데 여기에 잘못 계신 것 같은데요.” 제가 추켜세우자 신이 났는지 누르하치 사장님은 저에게 다짜고 짜 오늘부터 형님 아우로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저야 사람을 알아서 손해 볼 것이 없 었기에, 더군다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역만리 사고무친한 도시에서 형님 아우 하 자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특히 공신력 있는 한인 조직인 교민회의 부회장이라면 나 쁘지 않은 일처럼 보여서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곧 남자들 넷을 위한 저녁상이 차려지고 젯다에 도착한 지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한식을 그것도 집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의미 없는 이야기가 오가고 상에 있 는 음식이 천천히 없어져갈 즈음 사무국장이 입을 열었습니다.


“오늘 미스터 박을 부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뭐 좀 부탁할 것이 있어서 그래요.”


“무슨 부탁을 하시려고 그러시죠? 저야 여기가 처음이라 부탁은 오히려 제가 드려 야 할 것 같은데요?”


“아우는 타자 좀 칠 줄 아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르하치와 종씨라고 하는 김 사장이 대뜸 물었습니다. 다짜고짜 타자를 칠 줄 아냐고 하니 무슨 맥락에서 하는 말 인지 의아해서 저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느라고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시절은 기계식 타자기는 거의 사라져 가고 문서 편집은 컴퓨터를 통해서 하던 시 절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갑자기 타자를 칠 줄 아냐고 하니 모른다고 하기도 그렇 고 안다고 하기도 애매하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서무실에 수업료 내러 갈 때 서무 실 여직원 누나가 한글 타자기를 치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그걸 사용해 보거나 심지 어 만져본 적도 없었습니다.    


“타자기는 못 칩니다만, 컴퓨터 자판은 좀 칩니다. 워드나 아래 한글로 문서 편집도 좀 하고요.”  


“아, 잘 됐네. 그러면 충분하지 뭐.” 사무국장이 안심이 된다는 듯이 환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무슨 문서 편집을 할 일이 있으신가요?”


“네, 우리가 교민 회보를 매월 발행하고 있는데 편집할 사람이 필요해요. 지금 편집 하시던 분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편집을 못 하게 되었어요. 원고는 여기 계신 사무국 장이 월 말 즈음에 드릴 테니 그것을 컴퓨터 자판으로 치고 출력해서 인쇄소에 가서 복사하고 제책하면 됩니다. 제책은 인쇄소 직원들이 해 주니 편집하고 출력만 하면 돼요. 분량도 얼마 안 되고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부탁해요.”


지금까지 밥 먹는 내내 거의 몇 마디 안 하던 박 사장이 일장 연설에 가까운 긴 말 을 쏟아내자 그 말에 압도되어 저는 저도 모르게 “예. 알겠습니다.” 하고 선뜻 승낙을 해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저에게 누가 무슨 부탁을 하면 처음부터 너무 쉽게 들어주지 말고 일단은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정중히 말하면서 즉답을 피하고 부탁받은 그 일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인지, 또 해서 손해 보는 일은 아닌지 계 산을 해 본 다음에 천천히 답변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쉽게 승낙을 하면 상대도 감사한 줄 모르고 제게 받은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저를 아무 때나 부탁하면 들 어주는 쉬운 사람으로 깔볼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박 사장의 ‘부탁해요’ 라는 마지막 말에 저의 머릿속은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갑자기 하얗게 되었습니다. 대답 조심하라는 어머니의 조언은 기억에도 없다는 듯이 곧바로 “예.” 하는 대답이 어 떤 종류의 메뉴가 있는가 찬찬히 알아보지도 않고 대충 누른 자판기의 원하지 않는 커피처럼 자동으로 쏟아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생각도 안 해보고 너무 경솔하 게 교민 회보 편집인의 일을 맡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번 하 겠다고 한 말을 못 하겠다고 즉시 번복하는 것도 너무 체면을 구기는 일이라 이러지 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불현듯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회보 편집 일은 잘 알겠는데요, 그 일을 꼭 제가 해야 되나요? 제가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교민회에는 저보다 능력 있고 더 젊은 친구들이 많을 듯합니다. 그런 것은 이제 온 지 얼마 안 된 신참인 저보다는 여기에 몇 년이라도, 하다못해 1년 이라도 거주하신 분들이 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도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근데 교민사회에 젊은이가 없어요.”

박 사장이 말했습니다. 그 말을 이어서 사무국장이 부연 설명을 했습니다.


“80년대 후반부터 사우디의 건설경기는 퇴조하기 시작했고 91년도에 일어난 걸프 전의 여파로 그 전쟁 비용을 감당하느라 사우디 정부의 재정이 건전하지가 않아요. 거기다 말이야, 설상가상으로 국제유가는 사우디 정부가 균형 예산을 세우는데 필 요한 가격에서 한참 아래에서 형성되어서 최근에 새로 발주한 건설 프로젝트가 하나 도 없다니까. 완공하고도 아직 건설비 잔액 못 받은 현장도 있다고 하더라고. 벌써 이 번 달만 해도 우리가 철수하는 교민들 송별회를 세 번이나 해줬어요. 한국 건설회사 에 식료품하고 건설 자재 납품하던 사람 중에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두바이나 쿠웨이트로 건너간 사람도 있어요. 그나마 젊은 사람은 상사 주재원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바빠서 교민회 일을 못해요. 그리고 2-3년 후에는 본사로 귀임하기 때 문에 자기가 젯다 교민이라는 소속감도 별로 없어요.”


“아니 그래도 편집할 사람 한 명 정도는 있지 않나요?” 저는 가능하면 편집 일을 안 해볼 요량으로 못 믿겠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니까. 지금 교민회는 한국 가서 적응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들은 벌 써 귀국했고 인근의 다른 나라로 갈려고 하는 사람들은 빠져나가는 중이고 여기는, 그러니까 버리자니 아깝고 계속 유지하자니 잘 안되는 사업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 이 남아 있어요. 다들 나이가 사십이 넘었고 컴퓨터는 잘 몰라. 아우가 적임자라니까. 아마, 여기 젯다에서 거주 경력이 제일 짧은 사람도 최소 10년에서 15년은 될걸. 우리 가 남은 이유는 그래도 중동에서, 좁게 잡아도 GCC 안에서 인구적으로나 영토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강국이고 언젠가는 예전 같은 황금기가 다시 오지 않을까 하는 희 망 때문이지.” 누르하치 사장님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말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주재하던 한국 지상사도 많이 철수하고 덩달아 거주 교민들도 살 길을 찾아서 귀국을 하거나 형편이 좀 더 나은 이웃 국가로 떠나는 형국이라 교민사회는 침체되어 있었고 교민들 숫자도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동 붐으로 흥청대 던 80년대가 지나가고 잔치가 끝난 연회장 마냥 손님 다 떠나고 먹다 남긴 음식 찌꺼 기와 빈 그릇만 남은 썰렁한 사우디의 90년대가 스산한 가을 저녁처럼 쓸쓸히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단순 방문도 아니고 앞날이 창창한, 채 서른이 안된 제가 젯다에 살 겠다고 사우디에 입국을 했으니 사람들은 저의 입국 사유가 궁금하기도 했겠지만 우 선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나 봅니다. 같이 일할 교민회 집행부의 실무 임원을 하나 확 보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저는 알았습니다. 젯다 교민사회는 바로 윗선 임만 드글드글해서 군 생활의 거의 반이 다 되도록 신병을 받지 못한 제 선배의 소대 처럼 기형적인 인구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요.


2. 교민회

그날의 저녁 식사 후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며칠 후 저녁, 교민회 회 장단과 상견례도 할 겸 회보 편집에 대한 모임을 교민회 사무실에서 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사무국장 댁에서 저녁을 먹던 날 저를 태우고 집으로 가던 사무국장이 아 리랑 식당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한국학교를 보여주며 저 안에 교민회 사무실도 같 이 있다고 말해 주었던 탓에 저는 교민회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교민 회 사무실은 한국학교 운동장 끝 북쪽 담벼락 옆에 컨테이너를 개조해서 만들었는데 내부는 제법 공간도 넓고 탁자며 책상이며 전화기와 컴퓨터도 놓여 있어서 사무실 같 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날카로운 눈매에 머리를 올 백으로 빗은 박 회장이란 분이 앉아 있었는데 그의 눈매 때문에 저는 그의 얼굴이 마치 초등학교 시절 교실에 걸려있던 을지문덕 장군의 초상화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들어가자 예의 누르하치 김 사장과 사무국장이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이 분은 박동천 교민회장님이시고 이 분은 새로 회보 편집을 맡은 미스터 박입니 다. 서로 인사하시죠.”


사무국장이 간단히 소개를 하자, 박 회장은 유쾌하게 껄껄 웃으며 말했습니다. “교 민 회보 편집을 하기로 했으면 홍보위원이시군요. 어이구 고맙습니다. 근데, 우리 뭐 라도 먼저 먹고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니야. 손님도 오셨는데. 저기, 사무국장! 아리랑 에 전화해서 짜장면이나 시키지그래? 곱빼기로.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잘 먹어야지.” 날카로운 눈매와 다르게 그의 말투에서는 정감이 넘쳐났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가 회보를 만들고 있는데 너무 내용이 간단하고, 거주 한인들이나 교민회의 사정에 대해서 소상하게 적은 기사가 별로 없어요. 보시면 알겠 지만 교민회장 동정하고 행사 안내문, 체육 동호회 경기일정 안내가 거의 다라니까. 난 말이죠, 이 교민회보가 우리 젯다 한인사회의 역사기록이라고 생각해요. 젯다 한 인사회에 대해서는 본국에 있는 어떤 유명한 신문이나 잡지보다 우리 회보가 더 월등 할 수 있거든요. 먼 훗날 사우디 교민 진출사를 어느 역사가가 연구한다고 할 때 정부 문서도 중요한 자료가 되겠지만 우리가 발행한 교민회보도 정부 공식 문서와는 또 다 른 가치를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거야 그렇겠죠. 교민 회보야 주로 쓰는 내용이 거주 한인들의 이야기 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회보의 내용을 채워야 할까요? 우리가 무슨 전문 기자도 아 니고 젯다 한인 사회가 엄청나게 커서 써야 될 기사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요. 사무 국장님이 기사를 쓰신다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생업이 있는 분이라 쉽지 않을 것 같습 니다.” 제가 뜨악하게 말을 받자,


“아이고. 우리 회장님 또 저 이야기하시네. 미스터 박, 너무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 할 것은 없고 그냥 소박하게, 한번 슥 보고 버리는 회보가 아니라 한인들이 그래도 최 소한 흥미를 가지고 읽고 교민회가 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만 하면 되 죠. 우선은 그 정도를 목표로 잡자구요.” 저에게 부담감을 안 주려는 양으로 사무국장 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말은 같은 말을 쓰더라도 읽는 사람이, 어, 뭐냐, 여기 살지 않는 독자가 읽더 라도 젯다 한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상상이 되도록 좀 자세히 쓰자는 거예요. 없는 이야기를 쓰자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지난 3월에 우리가 야유회를 갔는데, 여기 봐봐. ‘3월 25일 많은 교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야유회를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준비에 수고해 주신 부녀회원님들 감사합니다.’하고 달랑 두 문장이잖아. 그렇게 하 지 말고, 야유회는 어디로 갔는지, 준비하느라고 교민회 부녀부에서는 어떤 수고를 했는지 이런 것도 쓰고 또 가서 어떻게 놀았는지도 좀 쓰고 말이야. 생활 상식이나 사 우디 시사 정보도 좀 넣고.” 박 회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이건 제가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사무국장님과 협의를 해야 하고요, 교민 회원 중에서 글쓰기에 관심 있는 분들을 모아서 명예기자단 같은 것을 만들면 좋겠습 니다.”


“그래요. 그럼 이 문제는 이제 홍보위원이 되는 미스터 박하고 박 사무국장하고 나하고 셋이서 차후에 다시 논의를 해 봅시다. 그러고 보니 쓰리 박이네. 이참에 3P라 고 회사 하나 차릴까? 3M이 시비 안 걸라나? 허허허.”


박 회장이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오늘 회의에서 회보를 편집할 것도 아니고 전체적 인 편집 방향에 대한 논의만 할 것이었으므로 편집회의는 자연스럽게 끝이 났습니다.


회보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될 무렵 주문한 짜장면이 배달되어 왔습니다. 교민회장 말로는 아리랑의 조 지배인의 부친께서 한국에서 중국집을 하셔서 어릴 때부터 짜장 면을 먹어 온 조 지배인은 짜장면에는 일가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랑의 짜장면은 한국의 웬만한 중국집보다도 맛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누르하치 부회장의 말에 의하면 조 지배인이 직접 손으로 면을 뽑는다고도 했습니다.


“젯다 교민사회가 축소되고 침체되어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인물도 많고 있을 것은 다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놀랍다는 듯이 말하자, 사무국장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렇지요, 부자가 망해도 3년 간다고 우리 교민회도 잘 나갈 때 마련해 둔 설비들 을 아직도 다 가지고 있어요. 코리아나 슈퍼 뒷마당에는 떡방앗간도 있고, 그것을 제 일김치 김 사장님이 자원봉사로 관리해 주시는데, 그 양반 월남에서 일한 기술자 출 신이라 떡도 잘 뽑고 고장 나면 기계도 잘 고쳐요. 자동차도 손보실 줄 안다고 하던데 뭐. 저기, 카미스라고 여기 사우디에 우리나라 대관령 같은 고산 지대가 있는데 거기 는 우리나라 배추와 무를 재배하는 한국 분도 계셔요. 그래서 우리가 한국 김치를 먹 을 수 있는 거예요. 사우디가 사막만 있는 것 같지만 산맥도 있고 1년 내내 물이 흐르 는 계곡도 있어요. 워낙 땅이 크다 보니까 아주 다채로운 경치를 가지고 있는 곳이 사 우디예요. ”


짜장면을 먹으면서 한 번 더 제가 회보 편집을 할 자격이 있는지, 정확히는 홍보위 원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회장님, 제가 편집은 할 수 있겠는데요. 정말 홍보위원을 맡아도 되나요? 홍보위원은 교민회의 임원인데 저는 이제 막 젯다에 온 사람이잖아요. 모양새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저기...... 김 부회장이 정관을 보고 임원의 자격이 어떻게 되나 설명을 좀 해봐.”  
“음, 교민회 정관에 있는 운영위원의 자격을 보면 제1항에 사우디 거류증을 가진 20세 이상의 성인이라고 나와 있어요. 아우는 두 가지 다 결격사유가 없으니까 홍보 위원 하는데 문제가 없지.”


“아, 그렇게 문서로 보장되어 있다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하겠습니다.” 대답을 하 면서 김 부회장이 건네주는 교민회 정관을 보니 과연 저 같은 신참도 운영위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운영진과 이사진이 서로를 견제하도록 만들어진 상당히 조직적인 정관이었습니다. 회장 밑에는 부회장 2인과 사무국장으로 이루어진 회장단이 있고 그 아래에는 교민회의 실무운영을 보좌하는 운영위원들이 있었습니 다. 또 회장과 운영위원회를 견제하는 이사회가 있었는데 이사회는 당연직인 회장단 과 한인사회의 각종 친목단체의 장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친목단체는 지역 구이고 친목단체의 장은 국회의원 같은 셈이었습니다.


“이 정관은 말이야, 처음에 젯다에 주재하는 한 타이어 회사 지사장이 만들었는데 그 양반 법대 나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조직적으로 잘 되어 있어요. 여기 젯다 교 민회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이 교민회 부지만 봐도 말이야 부지는 애초에 정부가 대 사관 지으려고 샀는데 대사관 건물 건설하기 전에 대사관이 수도 리야드로 이전하면 서 한국학교를 지었지. 그런데 건물은 그 당시 한 건설회사가 무료로 지어주었어요. 저기 보이는 야외 농구장과 애들 놀이터도 우리가 지었고 이 앞에 그늘막은 한 4,5년 되었는데 그 당시 한인 회장이 사비로 지었어요. 저 유치원 건물은 교민들이 십시일 반으로 모금해서 지었고. 물론 뭐 재외동포재단에서 조금 지원도 해 줬지. 재동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사람들 매년 얼마씩 교민회에 지원해 주거든. 그게 돈을 받아서가 맛이 아니라 이런 게 다 사람 살아가는 정이야. 아, 우리 정부가 우리를 잊지 않고 기 억해 주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박 회장이 자부심에 차서 묵직한 목소리 로 말했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누르하치 부회장이 말을 받았습니다. “아우야, 사람들이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역사적인 장소로 생각하잖아?”


“그렇죠.” 하도 당연한 이야기를 해서 저도 무심하게 대답했습니다.


“여기 젯다 교민회 사무실이 그런 곳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청사에는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여기도 우리나라 경제 발전사에 있 어서 어느 정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라니까. 사람들이 파독광부나 간호사들은 엄청나게 생각해 주잖아. 그분들 월급을 담보로 독일에서 차관을 가져왔다고. 물론 그분들 고생한 것과 희생을 잊을 수가 없지. 그런데 여기 젯다 교민사회도 그에 못지 않은 기여를 했어요. 파독광부나 간호사들이 우리 경제 발전에 마중물 같은 역할을 했다면 사우디 교민들은 수로의 역할을 했어. 정주영 회장님 회고록만 읽어봐도 주베 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하고 선수금이 들어왔을 때 우리나라 외환 보유고에 숨통이 트 였다고 외환은행장이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는 대목이 있어. 여기 계신 박회장님은 그 주베일 산업항 공사할 때 현장에 있었던 분이고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는지 눈으로 보신 증인이라니까. 그때는 뭐 안전 관리 이런 것에 대한 개 념이 아직 없을 때였으니까. 다들 공기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지. 광부들 중에도 돌아 가신 분들이 있었겠지만 월급을 실제로 차압 당하신 것도 아니고 우리처럼 희생이 크 진 않았을 거야. 최소한 거긴 선진국인 서독이었고 노동자들 안전에 있어서는 여기보 단 철저했을 테니까.”


듣고 보니 어린 시절 아저씨뻘 되는 친척분이 중동에 일하러 갔다가 불의의 심장마 비로 공사현장에서 돌아가셔서 온 동네가 슬퍼한 것을 본 적이 있는지라 이 말도 일 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민회에 있는 한국 사람들의 대부분은 예전에 건설회사에서 근로자로 근무 하다가 계약기간 끝나고 정착한 사람들이 많아요. 제일김치 김 사장님처럼 어떤 분들 은 베트남 전쟁 후에 이란으로 갔다가 팔레비정권 무너지고 여기로 오신 분들도 계시 고요.” 사무국장이 마무리를 했습니다.


회보 편집을 위한 모임은 갑자기 교민회 임원 자격의 시비를 다투는 교민회 정관 이야기로 흘렀다가 교민 정착사로 이어졌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나름 탄탄한 조직을 갖춘 교민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앉아 있는 사람들 면면을 보니 이건 보통 꼰대들이 아니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국가관이 투철한 사람들이었고 나쁘 게 보면 지나치다 싶을 만큼 국가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하긴 그래서 무보수 봉사직인 교민회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하는가 싶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한인회의 일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3. 부흥을 위하여
박 회장은 갑자기 바빠졌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무총리가 사우디를 방문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총리는 수도 리야드에서 국왕을 면담 후 사우디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 은 젯다에서 만나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외환 위기 이후에 젯다에 있던 우리 총영사관이 철수하는 바람에 교민회는 갑작스럽게 대사관과 협력 의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물론 방문 일정의 대부분은 대사관에서 준비했지만 총영사 관이 없는 젯다에서 교민회는 대사관 직원들에게 있어서 이 대신 잇몸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민회는 이것저것 대사관 직원들이 요청하는 자질구레한 필요들을 채 워주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조용한 한인 사회에 활력이 도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 런 분주한 나날 속에서 박 회장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우리 정부관 료들의 최우선 방문 목적이 그러하듯이 이번 방문의 제일 우선순위도 양국 간의 경제 협력이었습니다. 총리는 대규모 경제 사절단을 대동하고 왔는데 박 회장은 그들을 눈 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젯다 교민회가 다시 옛날처럼 부흥하기 위해서는 한인사 회가 건설 관련 사업에만 매달리지 말고 일반무역으로 지평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하 고 있었습니다.


박 회장은 총리가 주최한 한인들을 위한 만찬에서, 총리와 함께 주빈들을 위한 테 이블에 같이 앉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자기와 총리의 고향이 똑같이 포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타향에 가면 고향 까마귀도 반갑다고 하는데 이역만리에서 교민회장을 하고 있고 더구나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고향 사람을 만났으니 총리는 신 이 났음에 분명합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자기가 젯다 교민회에 도움을 줄 수 있겠는 가 물었고 박 회장은 젯다 교민회가 우수한 우리 중소기업의 사우디 진출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총영사관의 철수와 함께 무역관도 대사관 이 있는 리야드로 옮긴 상태였기 때문에 그 제안은 상당히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총리의 방문 일정이 끝나자 박회장은 자비를 들여서 젯다 시내에 사무실을 냈습니 다. 귀국한 총리가 무역협회의 경기지부와 교민회를 연결시켜 주었기 때문이었습니 다. 박 회장은 사무실 한 켠에 무협 회원사들의 카탈로그며 회사소개 책자들을 모아 서 작은 전시실 비슷한 것을 꾸미고 본격적으로 사우디 수입업자와 한국 회사들을 연 결시켜주는 사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교민 사회의 친구들을 모아서 일종의 협동조합 비슷한 공동 사무실을 낸 것이었습니다. 사무실의 회원들은 평소에는 자기들의 본업을 하다가 연 결된 중소기업의 제품들 중에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우디 바이어들과 맞는 제품이 있 으면 두 회사를 연결해 주는 식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습니다. 우선 영문으로 된 카탈로그를 제대 로 구비한 중소기업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떤 회사들은 국문으로 된 제품 소개 책자 를 보냈는데 이런 자료는 판매 상담을 위해서는 사용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한 회사는 강아지 옷 같은 애완견들을 위한 패션용품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개 는 이슬람에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동물이라 사우디 사람들은 거의 애완용 개를 키 우지 않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건설 관련 일들만 했던 회원들이 새로이 일반 무역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이어 발굴과 시장조사에서부터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만 했는데 이는 시간과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 참여 하는 회사들이 어느 정도 소액이나마 비용을 보전해 주거나 빠르게 실적이 나지 않는 이상 오래 지속하기가 힘든 구조였습니다.


결국 이 사업은 1년여를 끌다가 사무실 임대료와 책상 같은 비품 구매비만 날리고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사업의 종말과 함께 때마침 임기를 마친 박 회장도 교민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별 변화 없는 교민 사회에 무심한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교민회는 두어 번의 새로운 교민 회장을 맞았고 새로운 이민자들이 오지 않는 교민사회에서 저는 홍보위원으로 때로는 문화 위원으 로 때로는 사무국장으로 한인회의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며 젯다의 꼬인 군 번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장기 침체된 한인회가 새로운 활기를 찾은 것은 2010년대 초반에 불어닥친 세계적 인 원유 가격의 상승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이 시기는 80년대에 건설한 사우디의 사 회 간접자본들이 수명을 다 해서 새로 보수를 하거나 그동안 늘어난 인구로 인해 발 전소나 담수공장 같은 설비들을 새로이 대대적으로 확충해야 할 때였습니다. 수요가 확실한데 국제유가의 상승으로 재정이 넉넉해지니 중동의 산유국들은 앞다투어 건설 프로젝트들을 발주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사우디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갑자 기 젯다로 출장 오는 건설사 직원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우리나라의 대기업 건설회사들이 젯다에 지사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덩달아 서 젯다 한인사회는 사우디에 진출한 한국 건설회사에 건설자재를 납품한다거나 장 비를 임대한다거나 식재료를 공급하면서 오랜만에 활력을 찾고 있었습니다.


회장직에서 물러나서 교민회의 고문으로 봉사하고 있는 박 회장에게도 여러 사업 제안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언제나 젯다의 한인사회를 활성화시켜야겠 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사업을 통해서 더 많은 한인들을 젯다에 정착시키고 그들이 사우디 경제계의 주류사회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를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기적인 개인들이 자기 유익을 따라서 자기에게 가 장 이득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들은 정리가 된다고 저 는 믿고 있었습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꼭 가격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나 사회 구조 그리고 그들이 정착해서 살아가는 장소도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순응해서 때로는 흩어지기도 하고 때 로는 모이기도 하면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먹을 것 구하기 쉽고 살기 편한 강변에 고대 문명이 발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수 출과 해상운송에 효율적인 바닷가 근방에 공업단지가 들어서는 것이 또한 자연스러 운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박 회장은 일부러 젯다 교민사회를 부흥시키려는 것 같 아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한때는 말이야, 연말에 한인 축전을 하면 이 테니 스 코트 3개는 물론이고 저 끝에 있는 한국학교 교문 옆에 있는 배구장까지 사람으로 꽉 찼었어. 한국학교도 학생들로 늘 시끌벅적하고 말이야.”


“아니, 교민사회가 부흥하는 것을 회장님께서 책임 지실 필요는 없잖아요? 사람 살 기 편하고 돈 벌기 쉬우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두바이 좀 보 세요. 회장님이 교민 회장하실 때는 젯다하고 비교가 안되었는데 지금은 우리보다 얼 마나 더 커졌습니까?”


“아니 내가 뭐 억지로 교민사회를 활성화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다 보면
나도 잘 살고 한국에서 나 기다리고 있는 마나님한테도 잘 해 줄 수 있고......” 박 회 장은 한 발짝 물러나서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그는 이상하게 교민사회의 활성화에 대 해서 강박 같은 집착을 변함없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박 회장에게 한 번은 젯다에 기반을 둔 한 사우디 건설회사가 엄청난 제안을 해 왔습니다. 자기들이 사우디 정부 발주 공사를 수주했는데 시공 능력이 없어서 한 국의 기술력 있는 회사를 소개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거래가 성사되면 많은 한 국 교민들에게 일거리가 생기고 박 회장이 그토록 원하던 한인사회에 물질적으로 기 여할 기회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일이 잘 되려고 했는지 사우디 회사는 자기들은 약간의 수수료 정도만 챙기고 공사는 한국 회사가 다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신에 시공회사의 재무적 능력을 담보하기 위해서 1천 오백만 리얄 정도를 자기 회사에 예치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대략 한화 45억에 해당하는 거금이었습니다. 수주한 공사를 검토한 한국 회사는 기꺼이 이 보증금을 예치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우디 회사는 자 기들이 약속한 기간 안에 공사의 시작을 하지 못해서 그간 사우디 정부 당국의 두 번 에 걸친 경고를 받았고 한 번의 경고를 더 받으면 수주 자체가 철회된다는 사실을 숨 겼습니다. 이는 엄연한 사기였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던 한국 회사는 예치금만 입금한 상태에서 3번째 경고를 받고 공사 자체가 무효가 되었습니다.


불은 박 회장의 발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필사의 노력으로 예치금의 반환을 위해 뛰었지만 이 회사는 천만 리얄은 반납했지만 나머지 5백만 리얄은 상황이 좋아지면 돌려주겠다고 여유를 부렸습니다. 다급해진 박 회장은 사우디 변호사를 고용하여 소 송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변호사는 수임료를 먼저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비용 은 돌려받을 금액의 3%인 15만 리얄이었습니다. 박 회장은 수표는 발행하되 수표의 현금화는 소송에서 이긴 후에 가능하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변호사는 이를 수용했습 니다. 신용을 무엇보다 중시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하는 박 회장은 자기 이름 으로 15만 리얄의 수표를 발행했습니다. 그러나 사건은 더 어렵게 꼬이고 있었습니 다. 변호사는 소송도 시작하기 전에 약속한 말과 다르게 은행에 가서 수표를 현금화 했습니다. 계좌에 그만한 잔액이 없었던 박 회장은 사우디 상법상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한동안 모르고 있었습니다. 워낙 강직한 박 회장 이 자기의 어려운 상황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젯다의 교민 선후배들이 모금을 하여 수표 금액을 지불한 덕분에 그는 출옥할 수 있 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딴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한인 사회에 나오지 않고 조용히 지내 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성품을 아는 한국 건설회사들과 교민들이 그를 도와서 그는 한 건설회사에 자재를 납품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박회장을 만난 것은 이런 사건이 생긴 얼마 후였습니다. 하도 연락을 안하고 지내서 얼굴이라도 볼 심정으로 전화를 드렸는데 새로 옮긴 사무실이라고 하면서 주 소를 알려주었습니다. 마침 우리 아이의 등굣길에 있는 건물이라 아침에 학교에 아이 를 데려다주고 출근 전에 박 회장의 사무실에 들렸습니다. 안부를 묻고 나서 사무실 을 둘러보니 워낙 작고 누추해서 장난삼아 농담하듯이 한마디 던졌습니다.


“아니 회장님, 요즘 젯다에서 건설업 하시는 분들은 차도 바꾸고 집도 더 큰 데로 이사하시던데 회장님 사무실은 더 작아지신 것 같습니다?”


“아, 내가 좀 일이 있어서 사무실을 줄였어.”


 “아니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그는 그간에 일어난 일들, 수표 이야기며 감옥 이야기를 남의 말 하듯이 무표정하 게 이야기하더니 한마디 더 붙였습니다.


“사람들이 도와 줘서 다시 일을 좀 하고 있는데 지난 라마단에 입금된 공사비를 찾 아서 직원들 월급 주려고 은행에 갔다가 말이야 돌아오는 길에 에티오피아 애들한테 강도를 당했어. 현금으로 한 20만 리얄 되는데 현금 가방 채 다 빼앗기고 얼굴도 한 대 맞아서 지금도 이렇게 퍼렇게 되었잖아,”


자세히 보니 얼굴에 멍 자국이 보일 듯 말 듯 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내가 누군가? 돈 가방은 빼앗기면서도 강도들이 타고 온 차량 번호는 봐뒀 지. 그 번호를 추적해서 경찰이 범인을 잡았는데 차량을 운전한 젊은 애만 하나 잡고 나머지는 못 잡았어. 이 녀석이 통 불지를 않는다는구먼.”


“그래서 그 돈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어떡하긴 뭐? 그냥 적선한 셈 치는 거지. 근데 말야 오늘 경찰서에서 오라고 해서 갔더니 담당 경찰이 그러더라고 이 사건은 조직범죄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합의해 주 지 않으면 사형도 내릴 수 있대. 사우디에서는 범죄조직을 만드는 것은 가중처벌 된 대요. 돈은 못 찾아도 가해자에게 사형으로 앙갚음을 하라고 하더라고. 근데 내가 그 럴 수가 있나? 그 운전했다는 녀석 얼굴 보니 한 열 대여섯이나 되어 보이던데 앞길 이 구만리 같은 애가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어? 또 내가 그깟 돈 20만 리얄 잊어버 리는 것이 낫지 어떻게 생목숨을 죽이라고 해. 그래서 합의해 주고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글하나 써주고 왔어.”


“잘 하셨네요. 복 받으실 겁니다.”


박회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도대체 이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 습니다. 잘 하셨다고 긍정은 했지만 한없이 다른 사람만을 위해서 사는 인생 같아서 속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말 나온 김에 도대체 왜 그 렇게 한인사회 활성화에 욕심이 많은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뭐 하려고 그렇게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서 애를 쓰세요?”


“내가 무슨 발전을 위해 애를 쓴다고 그래. 근데 난, 이런 생각은 있어. 박 홍보위 원.” 박 회장이 저를 홍보위원으로 부를 때는 그가 교민회장 시절을 간절히 그리워할 때였습니다.


“나는 말야, 여기 사는 우리 교민들이 다 그렇겠지만 우리나라가 한번 세계에 대해 서 큰소리치는 나라가 되는 것을 보고 싶어.”


저는 또 아, 이 양반 또 꼰대스러운 말씀 시작하시네 하는 마음이 들어 빨리 자리를 뜰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지난번 IMF 때도 말이야 200억 불이 없어서 그 환난을 당했다잖아. 근데 우리 해 외 한인들이 인구 규모가 지금의 4-5배가 돼서 한 2, 3천만이 밖에 살고 또 경제적으 로 잘 살고 있다면 한 명당 천 불씩만 국내로 송금하면 해결될 문제였지. 5인 가족 이 라 치고 가구당 5천불 보내면 충분했지”


“사우디도 석유가격 따라서 경기가 출렁출렁 하기 때문에 이 나라 정부도 탈 석유 화하려고 애를 쓰잖아. 우리 한국 사람들 똑똑하니까 여기서 이 사람들하고 협력해서 같이 공장도 하고 유통도 하고 하면서 같이 잘 살면 좋겠어. 누르하지 김 회장이 말한 대로 만주를 먹어야만 강해지는 게 아니라 해외에 우리 한인들이 많이 살면서 그 나 라 주류 인사들과 교류를 잘 하고 그 나라를 친대한민국 국가로 만들면 그게 만주 땅 10개 얻는 것 보다 훨씬 낫지.” 더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오전에 잡은 약속도 있어 서 출근을 핑계 대고 자리를 떴습니다. 꼰대들은 답답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야기를 하면서 알아갈수록 아름다운 면이 많이 보였습니다. 사무실로 차를 몰면서 저는 문득 우리말의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알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는 글을 읽은 것 이 떠올랐습니다. 하긴 흉악범도 나도 알고 보면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세상이긴 하 지만 그 주장이 꼭 틀린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예쁨’에 있지 않고 ‘아는데’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말에 들어 있는 조상들의 철 학과 문화가 다시금 놀랍다는 생각과 박 회장이란 인물도 알아갈수록 아름다운 사람 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꼰대를 위한 애가

잠에서 깨어난 박 회장은 몸이 평소와 같지 않은 것을 느꼈습니다. 팔에 힘이 없고 움직일 수 없었으며 팔뚝 근육은 마치 물처럼 부드러웠습니다. 그는 겨우 일어나서 움직이는 다른 손으로 가장 친한 홍 사장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하는 그의 얼굴 도 반은 움직이지 않아서 전화하는 내내 침을 질질 흘리며 불분명한 목소리로 집으로 와달라는 말만 겨우 하고 끊었습니다.


전화를 받고 한숨에 달려온 홍 사장은 김 회장 집의 잠긴 문을 박차고 들어갔습니 다. 박 회장은 반신마비가 왔는지 오른쪽 반신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김 회장은 병원에 입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곧 온 젯다 교민사회에 퍼졌습니다. 그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한 교민회 임원들은 조를 짜서 그가 입원한 중환자 실에 번갈아 가면서 병문안을 갔습니다. 저도 서너 번 그가 입원한 병실에 가봤습니다. 중환자실은 하루 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만 방문이 허용되어서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 다. 한 번 방문하면 병문안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서 병문안 시간은 그동안 잘 만나지 못했던 한인들을 만나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열악한 사우디 의 의료수준 때문인지 아니면 박 회장의 병세가 워낙 심해서 그런지 차도가 없자 우 리들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쯤 되자 다들 전문의가 되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느니 저렇게 하는 것이 좋다느니 하면서 설왕설래가 많았는데 결국 박 회장 을 한국으로 이송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우디의 건설경기 활황으로 잠시 개통된 대한항공 직항을 타고 박 회장은 한국으 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리야드를 지나지 못하고 리야드 승객을 태우기 위해 잠시 착륙한 사이에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의 꼰대 기질도 사라 졌습니다. 그의 생각에 제가 다 동의할 수 없지만 그의 생각만큼은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아름답고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