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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수필] 뿌리 얕은 나무
작성일
2022.12.12

일반산문 부문(수필) 가작


뿌리 얕은 나무

정 은 시 (캐나다)


밴쿠버의 나무는 옆으로 뿌리를 뻗어나간다. 굳이 땅속 깊이 뿌리 내리지 않아도 쉽게 영양분을 얻기 때문이다. 강우량이 많고 온화한 날씨 덕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 때문에 나무가 강풍에 자주 쓰러진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큰 나무가 바람에 맥없이 쓰러지는 광경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뿌리가 얕아서 그렇다는 말은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거대한 나무의 뿌리가 어떻게 얕을 수 있단 말인가.

2012년 봄, 나는 은색 쏘나타에 이불, 냄비, 그릇 등 간단한 살림살이와 옷가지 몇 벌을 쓸어 넣어 캐나다 중부에서 서부 태평양 연안까지 2,300킬로미터를 달렸다. 이민 2년 10개월 만에 전 재산 4억을 말아먹은 뒤였다. 우리 가족은 잠시 전시체제에 돌입해 각자의 임무를 위해 흩어졌다. 허허벌판에 내가 의지할 것이라곤 ‘나타야’ 라고 부르는 자동차가 전부였다. 한국의 열일곱 배에 달하는 광활한 프레리를 달리며 심정이 어땠을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길은 프레리(대평원)라는 이름답게 정말이지 편평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자동차의 트레블 코드를 작동시킨 채 엑셀레이터와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시속 백 킬로미터의 속도로 한두 시간은 거뜬히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길이든 삶이든 굴곡진 건 못 쓴다’고 하시던 할머니의 말이 생각나 울었다. 프레리 지역을 지나 로키산맥에 가까워질수록 길은 점점 구불구불 험난해졌다. 눈 내리는 한계령을 넘을 때처럼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눈물이 바싹 말랐다. 호수와 협곡을 빼곡하게 에워싼 침엽수림을 관통해 평지에 내려왔을 때 결심했다. ‘다시는 쓰러지지 말자. 깊숙이 뿌리를 내리자.’
그러기 위해선 먹고 사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튿날, 나는 지역신문에서 ‘영어 가능자, 추천서 불필요, 당장 일할 수 있음’ 이라고 적힌 구인광고를 보고 보틀디포(Bottle Depot)라는 곳을 찾아갔다. 당시 내 상황을 고려해볼 때 완벽에 가까운 일자리였다. 문제가 조금 있었다면 뭘 하는 곳인지 모른다는 거였다. 나는 보틀과 디포라는 단어로 빈 병 정리 창고쯤으로 가볍게 유추했다. 아주 틀리진 않았다. 가볍다는 단어가 완전 빗나가긴 했지만.
주차장에서 픽업트럭에 쌓인 맥주 캔을 카트로 옮기는 백인 아저씨 옆에 간신히 차를 세웠다. 활짝 열린 자동문을 기웃거리는데 족히 육십은 넘어 보이는 여자가 상냥스럽게 “헬프?” 하며 물었다. 송 여사였다. 내가 구인광고를 보고 왔다고 하자, 주사기로 뽑아낸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서 과장된 상냥함이 사라졌다.
“코리안?”
예스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송 여사는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대뜸 한국어로 말했다.
“그 몸으로 어디 힘쓰겠어요?”
무례함의 채찍으로 매질을 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반말 아닌 게 어딘가. 그녀는 나보다 체구가 더 작고 호리호리했다. ‘가뿐’까지는 아니어도 당신 정도 넘길 힘은 있어요. 이런 오만한 생각이 들자, 이력서를 내미는 손이 저절로 공손해졌다.
“이런 거 다 필요 없고.”
송 여사는 마귀할멈처럼 여차하면 올라탈 기세로 손에 쥐고 있던 대걸레를 불쑥 내 품에 던졌다. 걸레 자루가 내 키보다 길었다. “홀 청소부터 해요.”
네 개가 세트인 싱크대가 다섯줄로 배치된 홀은 주말 오후의 대형마트처럼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마트와 다른 게 있다면 형언할 수 없는 냄새였다. 곰팡내, 쩐내, 썩은 내, 쓰레기 냄새 등이 교묘하게 락스로 포장되어 코를 강타했다. 지독한 냄새는 코를 베어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솔과 걸레와 물에 희석한 락스를 들고 다니며 싱크대와 바닥의 각종 오물을 닦아냈다.
손님들은 병, 캔, 팩 등 재활용 용기를 헹구지도 않고 가라지에 묵혀 두었다가 한꺼번에 가져왔다. 그들은 용기를 싱크대에 펼쳐놓고 직사각형의 파란색 플라스틱 통에 담아 카운터에 주고 몇 불, 몇 십 불, 많게는 몇 백 불까지 챙겨 갔다. 용기 한 개당 가격이 5센트, 10센트인 걸 감안하면 대단한 양이었다.
송 여사는 카운터에서 보틀(재활용 용기를 총칭함)을 받고 돈을 내주었다. 그녀는 와인, 위스키, 맥주 등 술병이 가득 담긴 플라스틱 통을 번쩍 들어 컨베이어벨트에 옮겼다. 나는 그녀가 평생 이 일을 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이놈의 보틀 땜에 골병들었어.” 송 여사는 옆구리를 주먹으로 톡톡 치며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표정에서는 자부심이 뚝뚝 흘렀다. 왜 아니겠는가. 홀몸으로 자식 셋을 키우고 가르치고 엄청난 부까지 축적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백만 불이 넘는 보틀디포 세 곳과 임대료가 나오는 땅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송 여사의 뿌리는 아주 깊고 튼실해 보였다. 토네이도가 와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나는 청소와 보틀 정리 몇 개월을 거친 뒤 카운터를 맡았다. 나도 술병이 가득 든 플라스틱 통을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그것은 여린 손목이나 작은 체구와 무관한 일이었다. 어떤 열망이 에너지로 응축되어 온몸으로 발화되는 일이었다. 밤낮으로 등덜미가 쑤시고 허리와 옆구리가 결리고 손목과 손마디가 시큰거렸지만 타이레놀 몇 알로 잠재웠다.

그런 송 여사가 자식들에게 보틀디포를 넘겨주고 은퇴를 선언했을 때, 나는 부러우면서도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한국에서 여생을 마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경기도 고향 근처 전망 좋은 곳에 집까지 지었다고 했다. 거센 강풍에도 끄떡없을 것 같던 그녀의 뿌리가 왠지 허상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일군 건 어쩌구요.”
“뭘 어째. 자식들이 알아서 하겠지. 이제 보틀 소리만 들어도 신물 나.”
“한국 가서 뭐 하실 건데요.”
“친구도 만나고, 골프도 치고, 맛난 것도 먹으러 다니고. 평생 못 한 거, 원 없이 다 할 거야.”
그녀는 뒤늦게 골프를 배우느라 잠도 설친다고 했다.
“왜 진즉 못 했나 몰라. 등신처럼. 그 쪼그만 공이 얼마나 애간장을 녹이는지.”
그녀의 뺨은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처럼 발그스름했고 눈빛은 설렘으로 반짝거렸다.

어느 날, 송 여사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에 간 지 일 년쯤 지났을 때였다. 한국에서 수술을 받고 자식들이 교대로 한국에 다녀오는가 싶더니, 결국 그녀는 캐나다로 다시 돌아왔다.
“딱 일 년 좋았지. 부잣집 마나님 행세하면서. 아주 후딱 가버렸어.”
의료시설은 한국이 좋은데 왜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좋으면 뭐해. 자식들이 다 여기 있는 걸.”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송 여사의 집을 나왔을 때 거리에는 복숭아 빛 석양이 쓸쓸히 내리고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며 상념에 젖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무거운 보틀을 들어 올리고 있는 건가.

강풍에 또 나무가 쓰러졌다. 하필 전신주 위에 쓰러지는 바람에 이틀째 전기가 끊겼다. 난방과 취사를 전기에만 의존하는 주택에 살면 이럴 때 속수무책이다. 보틀디포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곳은 전기가 끊기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불린 쌀이 담긴 전기밥솥을 자동차 조수석에 태웠다. 집 근처 길가에 거대한 나무가 널브러져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크고 풍성한 가지마다 잎이 무성하게 달린 나무였다. 인부들이 나무를 대형트럭에 싣느라 애를 썼다. 나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겉으로 온화해 보인다 할지라도 자연이 그리 호락호락했을 리 만무지 않은가. 나무는 오랜 세월 묵묵히 최선을 다했을 것이었다. 힘껏 양분을 빨아들이고 가지를 뻗고 나뭇잎을 무성하게 키워냈을 것이었다. 감히 누가 얕은 뿌리를 타박할 수 있겠는가.
뿌리가 봉두난발인 채 트럭에 실린 나무에게 경의를 표한다. 천천히 그 옆을 지나 나는 오늘도 보틀을 들어올리기 위해 차를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