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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제니를 찾아서
작성일
2022.12.12

일반산문 부문(체험수기) 가작


제니를 찾아서

이 단 비 (캐나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드르르륵
휴대폰 진동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어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았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진동소리가 마치 지표면에 닿는 앰뷸런스의 바퀴 소리처럼 긴박하게 느껴졌다. 이건 필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이었다. 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화면을 터치하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그 짧디 짧은 순간에도 오만 가지 무서운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헬로우?”
“미세스 리, 이 시간에 연락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제니가 방에 없어요. CCTV까지 돌려보았는데 기숙사 안에서 아이 행방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떡하죠?”


당직 중인 기숙사 사감 선생님 미즈 벨이었다. 다급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불안을 넘어서 공포에 가깝게 들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제니를 떠올렸다. 캐나다에 온 지 삼 년이 된 제니는, 내가 캐나다 고등학교의 카운셀러로 막 일을 시작하면서 만난 학생 중에 가장 마음이 쓰이는 아이였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미즈 벨에게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죠?”
“취침 점호 때였으니까 한 시간쯤 지난 거 같아요.”
곧 있으면 학교 건물의 문이 모두 닫히는 통행금지 시간이었다. 만약 아이가 건물 밖에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우선 아이가 갈만한 곳을 제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제니와 나누었던 무수한 대화들을 더듬고 또 더듬어 보았다. 설득, 공감, 격려, 조언, 칭찬, 훈계. 모든 말들이 강제로 풀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꼬이는 전선줄처럼 뒤죽박죽 엉켰다. 침착해야 한다. 침착해야 한다. 머리가 아플 때마다 바람 쐬러 간다는 바다 근처 공원일까? 삼 년 유학 생활 동안 딱 한 번 식사했다던 고모네 집일까? 그것도 아니면, 기숙사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자주 찾아간다는 학교 근처 24시간 맥도날드일까? 나는 일단 공원부터 가보기로 했다.


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정말이지 무서울 만큼 고요했다. 개미 새끼 하나 없는 캐나다의 밤거리는 나를 2003년으로 데려갔다. 그때 나는 고작 13살의 나이에 혼자 낯선 땅 캐나다를 밟았다. 이질적인 환경과 사람들 속에서 무엇보다 나를 당황시켰던 것은 해가 진 후의 거리 풍경이었다. 마치 흑사병이 도는 중세 유럽의 거리를 연상시켰다. 내가 아는 밤거리의 전부는 어디를 가도 넘치는 차와 사람들, 밤늦게까지 운동하는 이들로 북적대는 아파트 단지, 절대 꺼지지 않는 현란한 네온사인이었다. 그런 나에게 불빛 한 점 없는 캐나다의 밤은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도시 같았다. 모두 집안에서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그런 것임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첫해, 나는 지인의 소개로 한국인 홈스테이 가정에서 지냈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던 시간이었다. 홈스테이 할머니는 새까맣게 탄 식빵 사이에 바르는 둥 마는 둥 딸기잼을 넣어 도시락을 싸주었다. 엄마였다면 쓰레기통에 버렸을 음식이었다. 사실 그냥 버리고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무언가 더 나은 것을 사 먹을 수도 있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한국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 생각이 나서였다. 하지만 도시락뿐 아니라 매 끼니가 부실한 탓에 나는 늘 허기가 졌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병원을 자주 들락거릴 때마다 이때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씀하셨다.


한창 클 때라서 그런지 나는 결국 마트를 찾아 동네를 헤매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호수 공원을 발견했다. 그 압도적인 거대함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중에 그것이 오대호 중 하나인 온타리오호라는 것을 알았다. 호숫가를 따라 놓여 있는 오크나무 벤치에는 가족들이 무리 지어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무리와 조금 떨어진 회색 바위에 덩그러니 앉아 수평선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바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대로 쭉 가면 한국에 가 닿을 텐데.’


하지만 수평선 너머 아무리 끝까지 간다 해도 한국에서 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캐나다 땅일 뿐이었다. 상상마저도 좌절되는 현실이 서러워 많이도 울었다. 나는 종종 땅거미가 길게 내릴 때까지 바위에 홀로 앉아 있곤 했다.


당시 나는 홈스테이 집도 학교도 불편했다. 하지만 학교의 불편함은 영어가 향상되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기에 하루에 이삼백 개씩 영어 단어를 외우고, 영어 소설을 읽고, 영어로 일기를 쓰면서 버텼다. 때론 이런 나날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과 좌절에 휩싸였다.


제니가 너무 힘들다며 처음으로 내게 상담을 받으러 찾아왔을 때, 아이는 학교를 벗어나 가장 자주 가는 곳이 공원이라고 했다. 나는 깊게 되묻지 않아도 제니의 마음을 이해했다. 운전조차 할 수 없는 미성년자가 캐나다 소도시에서 유일하게 갈 곳이라곤 공원뿐이었다. 내가 홈스테이와 학교의 무한반복적인 일상에서 탈출구가 필요했듯이 제니 또한 그럴 것이었다. 기숙학교에 다니는 제니는 학교 자체가 곧 집이니, 그 숨막힘이 몇 배는 더 했을 것이다.


십 분 남짓 걸려 도착한 공원은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무한한 어둠에 잠식되듯, 검은 바다는 나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짧은 산책로를 따라 곳곳에 놓인 벤치들, 뷰포인트에 작은 정자, 화장실 근처 쉼터 등 띄엄띄엄 놓인 가로등 불빛을 따라 확인 가능한 모든 장소를 돌아보았다. 그 어디에도 제니는 없었다. 문득, 기억 저편에 도사리고 있던 무언가가 용수철처럼 솟아올랐다.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공포가 엄습했다.


몇 년 전, 학업 부담감에 지독한 향수병까지 겹쳐서 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학생이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 담당 카운셀러와 경찰이 밤낮으로 아이를 찾아다녔다. 그들이 이틀 만에 아이를 발견한 장소는 학교에서 십여 킬로 떨어진 골든이어스 다리 위였다. 아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염두에 두었고, 카운셀러와 경찰의 설득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다리 난간에서 내려오도록 한 것은 다름 아닌 부모의 목소리였다. 카운셀러는 태평양 건너에 있는 아이의 부모와 전화 통화를 시도했고, 아이에게 부모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아이는 극적으로 난간에서 내려왔지만, 학교 관계자와 카운셀러들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불안한 마음에 순간적으로 다리의 힘이 풀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카운셀러의 본분을 침착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다리의 힘을 지탱해주었다. 나는 뜀박질을 하듯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넣고 시동을 걸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매일 다니는 길인데도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주차장을 빠져나와 맥도날드로 숨가쁘게 차를 몰았다. 적막만이 가득한 거리를 내달리며 길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었다. 극도의 불안감이 물러간 자리에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비집고 들어왔다. 내가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건 아닐까.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한 건 아닐까.


“영어 선생님이 저만 미워하는 거 같아요.”


얼마 전, 제니는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었다. 아이는 세상 의욕 없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영어 선생님이 자꾸 자기만 면박을 준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영어가 늘지 않아 답답한데, 선생님의 그런 태도 때문에 입 밖으로 나오려던 짧은 단어조차 목구멍으로 도로 들어간다고 했다. 괜한 설움이 복받치는지 제니의 동그란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까지 돌았다.


나는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즉시 담당 선생님과 면담을 요청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어 선생님의 의도는 제니를 좀 더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려는 것이었다.


제니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한국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이런 성격이 발표와 참여 위주의 능동적인 캐나다의 수업방식에서는 종종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영어 선생님은 제니의 영어를 향상시키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유독 제니에게 더 많은 발표를 권유했고, 제니의 의견을 반복적으로 물으며 대답을 종용했다. 제니는 반 학생들이 모두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 과중한 부담을 느껴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문장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조차 몇 개의 단어로 내뱉거나 단답형으로 발표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영어 선생님은 제니의 의욕 없음과 불성실로 판단했다. 이것은 비단 제니뿐 아니라, 참여보다는 경청과 암기 위주의 수업 방식에 익숙한 한국 학생들이 자주 맞닥뜨리는 문제이기도 했다.


영어 선생님의 의도와 달리, 제니는 점점 더 의욕을 잃어 갔다. 영어 수업을 하기 몇 시간 전부터 머리가 아프다며 양호실을 들락거리더니, 급기야 세 차례 무단결석으로 교감선생님께 호출되었다. 영어는 필수과목이다. 학점을 이수하지 못하면 졸업을 못 한다. 이런 제니의 행동은 자칫 아이의 미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제니를 위해서라도 이런 무책임한 행동은 반드시 바로 잡아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만 미워한다고 느껴지는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처음 캐나다에 왔던 7학년 과학 시간이 내게는 그랬었다.


당시, 나는 수업을 겨우 따라갈 정도의 간단한 의사소통만 되었을 뿐, 문장의 미묘한 뉘앙스와 예의를 갖춘 문장, 간접적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방법 등에는 무지한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불시에 과학 쪽지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시험 도중 샤프심을 다 써서 답안지를 계속 작성할 수가 없었다. 옆자리 친구에게 연필을 빌리려고 말을 걸었다간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요의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 손에 들린 연필 두 자루가 내 눈에 띄었다. 나는 문장 따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뜸 선생님께 말했다.


“I need your pencil.”


그때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토론토에서 두어 시간 떨어진 백인 위주의 소도시였다. 영어가 제2 외국어인 학생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었던 과학 선생님은 나의 ‘돌직구’ 표현에 귀까지 빨갛게 열이 올랐다. ‘도대체 이 근본 없고 미개한 말투는 뭐니’ 라는 표정으로 매몰차게 나의 시험지를 가져갔다.


“지금 너에게는 시험이 중요한 게 아니다. 따라 해봐.”


나는 ‘May I borrow your pencil please?’를 반 아이들 앞에서 100번 반복해야 했다. 어찌 보면 나의 ‘돌직구’ 표현에 선생님 또한 ‘돌직구’로 응수했던 것이다.
그 사건은 어린 마음에 꽤나 큰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모든 일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듯이, 이후 나는 아무리 다급한 순간에도 예의를 갖춘 부탁 형의 문장을 거의 자동적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이었다면 오락실의 펀치기계 앞에서 울분을 토해냈을 테지만, 그런 것조차 없는 낯선 땅에서 영어를 향한 분노와 오기만큼 효율적인 무기도 없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영어 공부에 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제니처럼 소심했던 내가 12학년 문학 수업에서 그 어렵다는 A를 받고, 법학 수업의 모의 법정에서 검사 역할을 맡아 승소하는 쾌거를 이루고, Double Honor로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말이다. 7학년 과학 선생님의 ‘돌직구’에 홈런까지는 아니어도 3루타 정도는 날린 것이라고 가끔 나는 스스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제니도 스스로의 머리를 쓰다듬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나는 영어 선생님에게 아이의 성격과 성향에 관해 설명했다. 제니처럼 소극적인 아이가 매 수업마다 몇 번씩이고 반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지 납득시키려고 했다.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향의 학생이라 할지라도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교사와 학생의 수직상하 관계가 뚜렷한 한국의 학교 시스템에서 제니의 수동적인 자세는 오히려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수업 태도를 문제 삼는 선생님이 그녀에게는 선생님이 자기만 싫어한다는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로 다가왔을 것이었다. 나는 영어 선생님에게 이와 같은 캐나다와 한국의 학교 문화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말했다.


동시에, 제니에게는 자유로운 참여를 유도하는 수업 방식과 선생님이 발표를 권유하는 의도에 대해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영어 선생님이 기대하는 바를 인지시켜 주고 제니의 자신감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다행히도, 제니는 영어 수업이 조금은 편해지고 있다며 배시시 웃는 여유를 보여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실종이라니. 나는 제니와의 상담에서 혹시 놓친 것은 없는지 되새겨 보았다. 아이의 말에 그저 안도한 나머지 무언가를 놓쳤다면, 나는 카운셀러로서의 자질에 스스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제발, 제니가 맥도날드에서 천연덕스럽게 햄버거를 먹으며 웃고 있기를.
급하게 들어선 맥도날드에서 나의 바람은 산산조각났다. 아이는 없었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학교로 방향을 틀었다. 어쩌면 그 사이 제니가 돌아왔을지 모른다. 차 안에서 제니 고모의 연락처를 확인하고 있는데, 미즈 벨에게서 연락이 왔다. 기숙사 건물에 상주하는 직원과 순찰 중인 학교 지정 경찰관들 역시 제니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미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각이었다.


나는 기숙사 계단을 두서너 개씩 뛰어 올라갔다. 제니의 1인실 방을 시작으로 친한 친구들의 방과 기숙사 동 전체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3층 여자 기숙사 서관의 모퉁이를 돌아 제니의 방이 있는 동관으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서는데,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실루엣은 점차 덩치 큰 한 마리의 분홍색 토끼가 되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잠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토끼를 보았다. 새로 ‘직구’했다며 수줍게 자랑하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니는 분홍색 일체형 잠옷을 입고 토끼 후드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졸린 듯 반쯤 감긴 눈으로 내게 태연하게 인사까지 했다. 제니의 걸음에 맞춰 팔랑팔랑 흔들리는 토끼의 양쪽 귀를 보고 있자니, 어이없게도 온몸을 조이던 긴박함과 불안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감격의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제니는 친구 방에서 몰래 자려고 했는데 친구 룸메이트가 쫓아냈다며 투덜거렸다.


“치사하게, 사감 선생님한테 이른다고 빨리 꺼지라는 거예요.”
제니는 저녁 자습시간이 끝나고 사감 선생님 몰래 서관 아이들 틈에 끼어 친구 방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한껏 고조되었던 안도감이 진정되자, 부글부글 화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열을 가라앉히고 제니의 무책임한 행동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을 초래했는지 알려주었다.
“선생님들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너 찾느라고 학교가 발칵 뒤집혔었어.”
그제야 제니는 사태 파악을 하는 눈치였다.
“죄송해요 선생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어요.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그랬어요. 방에 혼자 있으면 자꾸 무기력해져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서요.”


제니는 유독 이번 학기를 힘들어했다. 졸업은 코앞으로 다가오는데, 부모님의 기대와 점점 멀어지는 자신의 현실이 버겁기만 한 모양이었다. 상위권 대학을 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가위눌림처럼 아이의 가슴을 옥죄고 있었고, 공인 영어시험 점수도, 학교 성적도, 무엇 하나 기대만큼 따라주는 게 없었던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공기 좋고 경치 좋은 데서 영어로 공부한다고 다들 부러워하는데, 저는 한국 갈 생각만 하면서 겨우겨우 버티고 있어요. 그렇다고 엄마한테 속속들이 말할 수도 없고요. 얼마나 실망하실지 알거든요. 그동안 저한테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요. 그 생각만 하면 부담돼서 미치겠어요.”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그렇겠지만, 특히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의 성적과 입시에 거는 기대가 지나치게 커서, 이에 따른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아이의 역량과 관심사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면 대단한 시너지 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이런 부모의 기대와 지원은 오히려 독이 되어 아이를 정신적으로 핍박한다. 제니 같은 유학생뿐 아니라 이민 2세들도 자신들의 교육 때문에 한국에서의 익숙한 삶을 버리고 이민 와 고생하는 부모님에 대한 심적 부채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실종 해프닝 이후,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제니와 미팅을 갖고 아이의 심리 상태와 입시 공부의 진전 상태를 체크했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 심화 상담은 학기 말까지 진행되었다. 이미 중간고사가 지난 시점이기는 했지만, 개인 및 조별과제를 포함해 대학 입시 원서 준비까지, 제니는 육지에 닿기 위해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헤엄을 쳐야 하는 사람처럼 쉬지 않고 팔을 저었다. 그렇게 고비의 순간을 넘고 있는 제니를 지켜보며 나는 두 달 뒤 아이의 머리 위에 당당하게 얹혀 있을 학사모를 그려보았다.


제니의 일을 겪으면서 나는 카운셀러로서 학생과의 심리적 교류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다국적, 다문화 사회인 캐나다에서 학교 카운셀러들은 인종과 문화가 다른 다양한 학생들을 담당한다. 그러나 한국 학생들은 유독 한국인 카운셀러 선생님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다. 같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한다는 동질감이 자신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해 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 것이리라. 이것은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한 이유와 같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한국인 카운셀러는 말할 것도 없고, 다양한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카운셀러조차 드물었다. 고심 끝에 찾아갔던 카운셀러 선생님과는 종종 거대한 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것은 깊은 절망감과 좌절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주류 사회의 일원으로 평생을 살아온 원어민 카운셀러 선생님은 어린 이방인의 고충과 설움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대화하는 내내 보여주었던 카운셀러 선생님의 상냥한 눈빛과 온화한 미소마저 어색한 괴리감을 더할 뿐이었고, 영원한 아웃사이더라는 느낌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결국 나는 학기 초에 과목을 선택할 때 말고는 거의 카운셀러 오피스에 가지 않게 되었다.


제2의 탄생기, 질풍노도의 시기, 중2병 등의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소년기는 심리적 불안과 혼돈이 극단에 달하는 시기이다. 요동치는 감정을 풀어놓을 사람, 좌절과 불만을 들어주고 공감해줄 사람, 따뜻한 위로와 이해의 말을 건네줄 사람이,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러나 제니처럼 부모 곁을 떠나 혼자 유학생활을 하는 아이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때로는 이민 2세 아이들조차도 이 격동의 시기를 이질적인 언어와 문화의 사각지대에서 마음 둘 데 없이 보내고 있는 것이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나는 2학년 때 신입생 멘토링 봉사활동을 하면서 카운셀러로서 나의 길을 예감했는지 모른다. 새내기 한국 학생들의 멘토를 하면서 나는 깡그리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외롭고 힘들었던 나의 경험들이 그들에게 귀중한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인 유학생이자, 1.5세대 이민자로서 캐나다 학교와 사회에서 겪었던 모든 것들, 심지어 한 치의 의심 없이 불행이었다고 믿었던 경험까지도 누군가에게 위로와 위안과 교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
드디어 졸업식이다. 나는 강당 뒤에서 감동에 젖어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졸업 가운을 입은 제니의 모습은 나의 깨달음의 화룡점정이었다. 나의 외로웠던 혼돈의 10대와 치열하게 고군분투했던 이십 대의 시간을 보상해주는 듯했다.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제니는 졸업가운을 휘날리며 총총히 내게 걸어왔다.


“선생님, 선물이에요.”


아이는 수줍게 종이 가방을 내게 건넸다. 그 안에는 요즘 한국에서 유행한다는 H사의 장인라면, O사의 치킨팝, 수제 김부각 등이 들어있었다.


“쌤, 이거 진짜 맛있어요. 캐나다엔 아직 없는 거예요. 드실 때마다 제 생각해주세용. 헤헤.”


나는 제니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얼굴 크기에 민감한 아이를 위해 나는 과장되게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활짝 웃는 제니와 나의 모습이 휴대폰 화면을 가득 메웠다. 내 얼굴의 삼분의 일 정도인 자신의 얼굴을 본 제니는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카운셀러 오피스 벽에 붙은 사진들과 감사 편지들을 본다. 창문 앞에 걸린 하늘색 깃털 드림캐쳐가 바람에 기분 좋게 흔들린다. 세 평 남짓한 공간에 또 다른 제니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종이 가방에서 수제 김부각 하나를 꺼내어 입에 넣는다. 고소하게 바삭거리는 한국의 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의 얼굴을 마음에 담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