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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한글학교에서
작성일
2022.12.12

일반산문 부문(체험수기) 가작


한글학교에서

박시드니 (덴마크)


“선생님! 선생님께서 발표하시는 동영상을 봤는데요, K-pop, K-movie도 언급하시고 안데르센 얘기도 하시는 것 같았어요. 무슨 말씀 하셨는지 궁금해요.”
평소에 말을 아끼는 찰리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 조금은 자랑스러운 듯한 긍정적인 톤이 스며있다. 내가 한국어로 말하는 것을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알리고 싶은 듯했다. 학생들이 조금은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선생님!” 하고 불러줄 때면, 내 마음은 감동에 감전된다. ‘선생님’이란 호칭 외에 나머지 말은 모두 덴마크어다.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은 아직 초보단계라서 온전하게 한 문장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빨리빨리”라는 조바심을 가지면 안 된다. 여긴 한국과 달리 느긋한 인내심이 잘 통하는 사회다.

“온라인 모임에 덴마크 대표로 참석했고요. 덴마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덴마크에 관해 간단히 설명한 후,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우수한 한국문학 작품의 외국어 번역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Man Booker Prize)을 수상한 이유는 영국사람이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했기 때문이라고요. 맨부커상은 작가 본인뿐 아니라 번역자까지도 작가와 같은 자격으로 공동 수상을 하거든요.”
나의 대답에 찰리는 또 자랑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그럼, 덴마크 소개하시는데 왜 아인슈타인을 언급하셨죠?”
찰리는 내가 하는 한국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동영상을 몇 번이고 되돌려 봤을 게 분명했다. 한국어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사이사이에 언급된 유명인의 이름들과 가까스로 알아들은 몇 개의 단어들을 가지고, 전체의 내용을 유추하기 위해 무던히도 머리를 짜냈을 게 눈에 선하다. 나는 학생들에게 한국어 듣기 이해력을 자극하고자 한국어로 된 유튜브 동영상을 듣기 숙제로 자주 내주는데, 얼마 전엔 내가 발표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나눠주었다.

“세계적인 천재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쌍벽을 이뤘던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를 소개하기 위해서였어요.”
나의 대답에 찰리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찰리 씨는 한국에 갈 계획 없어요?” 이번엔 내가 물었다.
“교환학생으로 한양대학교에 가고 싶어서 알아보는 중이에요.” 찰리의 대답에 내 귀가 쫑긋해졌다. 덴마크의 학생으로부터 한국에 있는 대학교 이름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더구나 내가 다녔던 학교 이름을 들으리라고는.

“나는 한양대학교에서 컴퓨터를 전공했어요. 찰리는 무슨 전공이죠?”
“Business Engineering을 공부하고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 Business Engineering을 한국어로 뭐라고 해요?”
나로선, 처음 들어보는 아주 생소한 전공 이름이다. ‘요즘엔, 그런 전공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재빨리 검색해 봤지만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글쎄….”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몇 초의 시간을 벌었다. 문득 그럴듯한 단어 조합이 떠올랐다. 하지만 100%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전공 이름이니 번역하는 데 확신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글쎄, 내 생각엔 ‘경영 공학’쯤 될 것 같은데. 하지만, 구글에 물어보는 게 더 확실할 것 같아요.”라고 솔직하게 대답한 후 재빨리 구글 번역기를 돌려봤다. 구글은 ‘비즈니스 엔지니어링’이라고 자랑스럽게 영어 발음의 한국어 버전을 내놓았다. 우린 모두 크게 한바탕 웃었다.

“선생님! 저도 한양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 공부한 적이 있어요.” 찰리와 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라도 신이 나서 대화에 참여했다.
“아, 그래요? 사라 씨는 전공이 뭔데요?” ‘이러다간 덴마크에서 한양대 동문회를 해도 되겠네’라는 즐거운 생각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내 질문에 사라는 “금융 경제”라고 대답했다. “한국에서 공부하면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나요? 아니면, 한국어로?” 나는 궁금해서 사라에게 물었다.
“영어로 강의되는 수업을 주로 챙겨 들었어요. 수학은 필수 과목이었는데 한국어로만 강의를 해서 저는 F학점으로 낙제를 받았어요.” 한국어 초보자가 수업을 한국어로 들은 후 낙제를 받은 건 당연한 얘기였다.
“선생님, 저는 한국에 가서 일하고 싶은데, 덴마크어나 영어를 사용하는 일자리가 있을까요? 한국에 진출해 있는 덴마크 회사 이름을 알려달라고 덴마크 주재 한국대사관과 한국주재 덴마크대사관에 연락해 봤는데, 아무 소득이 없었어요.”
사라가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지 나는 몰랐었다. ‘선생님’ 이란 호칭 외에 우리의 대화는 계속 덴마크어로 지속된다.
“로얄 코펜하겐이란 덴마크의 유명 도자기 회사가 한국에 진출해있고, 한국에서는 덴마크의 북유럽 디자인 상품이 인기가 있어요. 나도 똑같은 질문을 덴마크 주재 한국대사관에게 했지만 풍력 관련 덴마크 회사들이 한국과 연계되어있다는 답만을 받았을 뿐이예요.”
“한국에 가는 방법을 대사관에 물어봤더니 F4 비자를 만들어 가라고 하더라고요.”
사라는 한국인 엄마와 나이지리아인 아빠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로 아기 때 덴마크로 입양되어 왔기 때문에 한국인 입양자로 재외동포 F4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대사관의 설명이 있었다고 했다.
“사라 씨, 그럼 F4 비자 만들어서 한국에 가요. 나도 지난번에 F4 비자를 만들어서 한국에 갔었고, 외국인등록증도 만들었어요. 그러면, 한국에 2년 동안 거주할 수 있고, 직장도 구할 수 있어요. 내 생각에는 사라 씨 정도면 24시간 편의점에서 알바를 구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봐요. 식당에서 서빙을 할 수도 있고.”
나는 아주 적극적으로 사라의 한국행 꿈에 불을 지폈다. “뭐든 하고 싶은 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꼭 하세요!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나는 나이든 연장자로서 진정 어린 충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선생님, 저도 한국에 가서 일하고 싶어요.” 찰리도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한다. 찰리는 덴마크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은 베트남 출신이다. 태권도 검은 띠가 있는 찰리는 태권도를 통해 한국을 접하게 되었다고 했다.
“한국 회사 중 여러분이 알고 있는 유명한 회사는 어떤 게 있나요?” 내 물음에 사라가 대답했다. “삼성하고 엘지요.”
“어? 삼성하고 엘지가 한국 회사에요?” 찰리는 놀라서 작은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오래전 쇼핑센터에서 TV를 고르고 있었는데, 직원이 나름 아는 척을 하면서 삼성이 영국제품이라서 꽤 믿을 만하다고 내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직원이 TV 박스에 Made in UK로 쓰인 것을 본 탓이었다. 그래서 나는 삼성이 한국 브랜드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곳에 많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삼성은 별이 세 개라는 한자이고, 엘지는 원래 럭키라는 샴푸, 비누, 치약 등을 만드는 회사와 금성(Gold Star)이라는 가전제품 회사의 재벌 자녀들이 결혼한 후 병합된 합작회사로 두 회사의 첫 알파벳을 따서 LG라고 이름을 지은 거예요. 그 이후로 Life is Good으로 변경했고요.”
나는 이렇게 학생들에게 삼성과 엘지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해 주었다.
“선생님! 현대, 기아도 한국 브랜드예요.” 그 사이 찰리가 자랑스럽게 한국 회사 이름을 찾아냈다. “사실은 현대자동차가 기아자동차를 합병해서 두 회사는 한 회사가 되었어요. 기아라는 이름을 계속 쓰고 있을 뿐이지요.” 나는 이렇게 추가 설명을 해줬다. 오늘, 학생들은 이렇게 한국 상품과 한국의 기업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 크게 부상하고 있는 IT 관련 회사로는 네이버와 카카오가 있어요. 인터넷 선진국으로서 한국에서 전망이 아주 좋은 회사들이에요.”
나의 얘기에 사라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한국에는 카카오톡, 카카오택시, 카카오메트로, 카카오버스. 카카오가 안 들어간 게 없어요!” 한국에서 한 학기를 살아본 사라는 한국 실정에 대해 제법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래요, 카카오뱅크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 더 발전이 있을 거예요.” 내 말에 찰리의 얼굴색이 한 톤 밝아졌다. 찰리가 신이 나서 나의 말을 이었다. “졸업하기 전에 실습 과정으로 회사를 선택한 후 한 학기 동안 인턴십으로 일을 해야 하는데, 한국에 있는 네이버나 카카오에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찰리 씨,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꼭 네이버나 카카오에 인턴십을 지원해 보세요. 잘 될 거예요.” 나는 적극적으로 찰리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선생님이 추천서 써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찰리는 재치 있게 내게 추천서를 부탁했다. “물론이죠.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나는 찰리의 한국어와 한국에 대한 열정을 높이 평가하고 있고, 물론 기쁜 마음으로 추천서를 써줄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반은 한국어를 1년 정도 배운 초2급반이고, 등록 학생은 많지만, 항상 결석 인원이 있어서 보통 5~6명 정도가 출석을 한다. 이날은 찰리와 사라 두 명만 출석을 했다. 핵가족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평소 수업 때 하지 않는 개인적인 얘기를 통해 서로를 조금씩 알아갈 수 있어서 좋았다.
2022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다섯 명의 학생이 새로 등록을 했다. 우리 한글학교에서 33년 경력의 베테랑이신 Sook 선생님께서 새로 온 학생을 맡아 그들에게 한글 자모부터 가르쳐주시기로 했다. 그래서 작년부터 Sook 선생님께서 가르치던 학생 모두 내가 가르치는 반에 합류시켰다.
1월의 첫 수업. 좁은 교실이 학생들로 꽉 차서 시끌벅적해졌다. 합류한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익히기 위해서 나는 한 명씩 이름을 호명하면서 한국어를 배우는지 동기를 물어봤다. 나는 한국어로 물었고 학생들도 한국어로 대답하기를 요구했다.
“알베아트 씨는 한국어 왜 배워요?” 나의 한국말 물음에 알베아트는 당황해했고, 생각나지 않는 한국 단어 중 “친구, 같이, 한국”을 가까스로 더듬어 찾아낸 후, 옆자리에 앉은 절친 카트리느에게 간절한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나는 알베아트와 카트리느가 한국여행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카트리느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던 터라 알베아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짐작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더 절망하기 전에 구원의 한 마디를 던졌다.
“친구랑 한국에 가려고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지은 그녀는 “네.” 하고 대답을 했다. 이번엔 카트리느가 대답할 순서다. 카트리느는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 중에서 한국어 실력이 아주 뛰어난 학생 중 하나다. 카트리느의 꿈은 수의사다. 카트리느는 옆에 앉은 알베아트를 가리키며 “이 친구랑 같이요. 친구랑 같이 한국에 가요.” 카트리느의 대답에 나는 내심 뿌듯한 자부심을 느낀다. 내가 그녀에게 또 묻는다. “한국엔 언제 가요?” 카트리느는 손가락을 동원해서 숫자를 잠깐 머릿속으로 세어 보더니 대답했다. “3월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4월에 가요.” 학생들에게 한국 숫자는 어렵다. 언제 일, 이, 삼이라고 해야 하는지 언제 하나, 둘, 셋을 사용해야 하는지 항상 헷갈려 한다.

“마리 씨는 한국어를 왜 배워요?” 알베아트와 마찬가지로 마리도 오늘 합반한 학생 중 한 명이다. “저는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어요. 한국에 있는 대학교에 가요.” 베테랑 Sook 선생님께서 수업 시작 전 내게 귀띔으로 한국어를 잘하는 몇몇 학생 이름을 알려주셨는데, 마리도 그중 한 명이다. ”어느 학교?” 나는 최대한 간단하게 질문했다. 마리 또한 잘 알아듣고 간단히 ”경희대학교”라고 대답했다. “언제 가요?” ”가을에요.” 가을학기 동안 교환학생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프리다는 K-pop을 좋아해서 한국어를 배운다고 했고, 한국에 갈 계획은 아직 없다고 했다. 비야크는 엄마가 한국인이라 한국어를 배운다고 했다. “집에서 엄마랑 한국어로 대화해요?” 내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집에서는 한국말 안 해요.”
그는 한국에 8번을 다녀왔고, 한국에 가면 사촌들과 영어로 대화한다고 했다. 아틴은 “마리처럼 한국으로 대학교 가요.”라고 얘기한다. 무슨 대학이냐는 질문에 SNU(Seoul National University)란다. ‘흠, 서울대라…’ SKY를 아냐고 묻자 당연한 듯 안다고 대답한다. 비야크와 아틴도 Sook 선생님께서 한국어를 잘한다고 귀띔해주신 학생들이다. 비야크는 의대생이고 아틴은 공대생이다. 그 외에 사라 티, 아기르 등 나머지 학생들 또한 K-pop, K-drama 때문에 한국어를 배운다고 했다. 사브린은 영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인데, 한국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영어로 번역된 한강의 소설과 『82년생 김지영』을 재미있게 읽었고, K-pop 가사를 음미하며, 틈틈이 한국어로 시를 습작하고 있다.

나는 덴마크 율랜드지구 한글학교에서 교포자녀들과 입양아 그리고 덴마크 젊은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 한글학교의 원래 목적은 한국인 2세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이민 1세대인 Chang & Sook 선생님 부부께서 33년 전 세운 학교다. Sook 선생님께서 초1급반을, Chang 선생님께서 초2급반을 가르쳐 오셨는데, Chang 선생님께서 일선에서 한 발 물러나고 싶어 하셨기에, 내가 Chang 선생님이 맡았던 초2급반을 작년 9월부터 가르치고 있다.
실은 한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아주 오래 전 한인회를 통해 두 분을 알게 된 후, 한글학교에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가르친 적이 있었다. 당시는 대다수 학생들이 덴마크에 입양된 한국인들이었다. 나는 스웨덴 통신회사 에릭슨의 덴마크 지사에서 시스템 개발자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업무량이 늘고 새로 배워야 할 프로그램이 많아져 스트레스에 허덕이고 있었기에, 몇 분의 여유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매주 월요일 저녁 두 시간씩 자유시간을 할애해서 한글을 가르치던 일을 포기하고 회사에만 전념했다. 그 이후, 나는 2010년 장난감 블록으로 유명한 덴마크 회사 레고로 이직해 9년간 프로그램 개발을 지휘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을 했다. 컴퓨터를 전공한 후 계속 IT와 관련된 업무를 했지만, 한 번도 일을 즐긴 적은 없다. 밥벌이를 위해, 먹고 살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싫지만 억지로 해야 하는 일. 전공을 컴퓨터로 선택한 유일한 이유는 대학교 졸업 후 직장이 보장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필수 요소인 ‘의식주’ 조달이 어려웠던 비참하고 처절하게 가난한 집에서 자란 나로서는 가난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공부를 해서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는 것’이라는 굳은 신념뿐이었다. 기적처럼 대학에 입학했고, 전공으로 컴퓨터를 선택했다. 졸업 후에는 첫 직장으로 프랑스 회사인 미쉐린타이어 전산실에 근무하면서 드디어 안정적인 월급을 받아 처음으로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나의 전공은 당시 절체절명의 선택이었고, 덕분에 전공을 살려 한국뿐만 아니라 이곳 덴마크에서도 오랫동안 IT분야에서 전문직으로 일할 수 있었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은 덴마크에 언제 오셨어요? 덴마크에 왜 오셨어요? 무슨 일을 하셨어요?” 학생들은 어려운 한국어 공부는 잠시 구석에 던져두고, 이제 자유롭게 덴마크어로 전환을 한 후 호기심 가득 찬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 세례를 퍼붓는다.
“1996년 1월에 왔어요.”
학생들은 내 말에 다들 놀란 모습이다. 학생들에게 1996년은 그들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세상, 아주 먼 옛날이라고 느꼈을 게 분명하다. 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1994년, 미국통신회사인 AT&T 한국지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때 한국 여름이 너무 더웠어요. 그래서 시원한 나라로 여름휴가를 가겠다고 결정하고 북유럽을 택했죠. 북유럽 여행안내 책을 구입한 후 계획을 세우면서, 덴마크는 너무 평평하고 밋밋해 보여서 제외하고,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를 여행했어요. 스웨덴 스톡홀름에 도착해 진켄담이란 유스호스텔에서 3일을 묵었는데, 같은 숙소에서 지내던 덴마크에서 온 아줌마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친구가 되었고, 여행 후에도 계속 엽서로 안부를 주고받았어요. 그 덴마크 아줌마는 유럽에 오게 되면 꼭 덴마크에 놀러오라고 하셨죠. 다음 해 여름 저는 서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를 거쳐 덴마크로 갔어요. 오스트리아에서 잘츠부르크 여행을 끝낸 후 그곳에서 독일 함부르크를 거쳐 덴마크로 가는 기차로 갈아탄 후, 덴마크 내 최종 목적지까지 두어 번 더 기차를 갈아타고, 거의 24시간 동안의 긴 여행 끝에 덴마크 아줌마가 사는 어더(Odder) 라는 소도시에 도착했어요. 아줌마는 자신의 큰아들을 기차역으로 마중나가게 했고 저는 아줌마 집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어요. 그리고 근처에 사는 아줌마의 아들이 여행가이드가 되어 주었어요. 그 인연으로 한국과 덴마크를 오가며 장거리 연애를 했고 1996년 1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곧바로 덴마크로 오게 되었답니다.”
학생들은 입을 모아 “그 덴마크 아줌마가 선생님을 낙점하고 아들과 짝 지어주려고 미리 계획한 것 같아요.”하며 나를 놀려댔다.

“선생님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세요?” 학생들의 호기심은 끝이 없다. 나는 “아니요.”라는 짧은 대답 대신 나 자신을 변명이라도 하듯 긴 설명을 부가해서 말했다.
“한국에는 일 년에 한 번씩 꼭 갔고, 최근 몇 년은 아픈 엄마를 보러 일 년에 두 번씩 한국에 다녀왔어요. 하지만 한국에 가서 3주가 지나면 덴마크로 돌아오고 싶어졌어요. 한국 사회는 너무 경쟁이 치열하고, 돈이 최고라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요. 가난한 사람들은 끼니 걱정으로 시름하는데 부유한 사람들은 외모에만 신경을 쓰고, 신제품만 앞 다퉈 사들이고, 남보다 더 큰 차, 이왕이면 외국차, 명품 브랜드와 사치가 난무하고, 남보다 평수가 더 큰 아파트에 살아야 하고, 모두가 서로 더 좋은 대학에 가려고 경쟁하다 보니 학원 등 사교육비가 너무 비싸고, 학군이 좋은 강남의 부동산 값이 치솟고. 돈 많은 사람들에겐 천국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기엔 너무 각박한 사회죠….”
‘이런,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교사는 한국에 대해서 좋은 얘기만 하라고 한국어교원 양성교육에서 배웠는데….’
“아니, 내가 너무 한국의 나쁜 점만 얘기했네요. 하여튼, 요점만 다시 말하자면 나는 부정부패 없이 민주주의 정치를 선도하는 덴마크에서의 생활이 질적으로 따져볼 때 한국에 비해 훨씬 더 높다고 생각하고, 덴마크에서 사는 게 나랑 훨씬 더 잘 맞아요.”
내 말에 학생들은 동조하는 듯 이해가 간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한국에는 전 세계에서 성형외과가 가장 많다고 들었어요. 패션도 첨단이고, 남자도 화장을 한대요.”
학생들은 한국의 드라마, 각종 미디어, 유튜브, SNS를 통해 한국의 실정을 줄줄 꿰고 있었다. 이 넓은 세상은 스마트폰으로 축소되어 우리의 손바닥에 들어와 있다.

이곳의 한국 이민 1세대는 1970년대에 덴마크의 선진 농축업을 배우기 위해 한국에서 국비장학생으로 유학을 왔다 이곳에 남으신 분들, 태권도 사범, 병아리 감별사로 취업 이민을 오신 분들, 덴마크인과 국제결혼으로 이주하신 몇몇 한국인들로 시작했다. 초창기 한글학교의 학생들은 한국이민 2세들이었고, 그 이후에는 한국에서 덴마크로 입양 온 아이들이 한국어를 배우고자 했고, 최근에는 K-pop과 K-drama를 통해 한류를 접한 후,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려는 덴마크 현지 젊은 학생이 많아졌다. 덴마크 국적의 젊은이들이지만 실제로 그들의 출신은 덴마크 외에 이란, 이라크, 소말리아, 베트남, 동유럽 등 아주 다양하다. 한국의 덴마크 이민사에도 변화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덴마크로 이주해오는 한국 이민자들은 덴마크인과 결혼을 한 한국여성 외에도, 덴마크대학교에 석, 박사 과정의 유학생, Post Doc 자격의 대학교 연구직, 덴마크 회사에 취업이 되어 오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덴마크에서 살아온 지난 26년간, 덴마크에서 한국의 이미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초창기의 덴마크 내 한국의 인지도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나마 몇몇 ‘한국’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는 한국전쟁 후 거지가 득실거리는 배고프고 가난한 나라였다. 덴마크에서 한국이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가 된 건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 덕분이다. 당시 레고에서 근무하고 있던 내게, 직장 동료 중 한 명이 싸이의 ‘강남스타일’ 동영상을 보여주며 가사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왔다. 나는 한 번도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가사 중 ‘오빤 강남스타일’이라는 소절 외에는 전혀 가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잠시 멈칫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가사가 무슨 얘기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고. 동료는 웃는 얼굴로, 한국사람이 한국 유행가 가사도 모르면 되겠냐고 핀잔을 주었다.

“선생님은 어떤 취미가 있으세요?” 찰리가 묻는다.
“나는 강아지를 18년 동안 자식처럼 키웠었어요. 동물사랑 실천을 위해 비건이 된 지난 6년 동안 완전채식만 먹고 있고, 비건 전도사가 되었죠. 동물 권리 옹호자로도 활동하고 있어요. 덴마크 내 모피 산업을 법적으로 완전히 폐쇄하기 위해, 덴마크의 대형 슈퍼마켓에서 값싼 닭고기 생산과 판매를 금지시키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동물 보호 단체와 함께 팻말을 들고 열심히 동물을 위한 평화 시위에 참석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비건 정당에도 당원으로 가입했어요. 그리고 친환경적인 삶을 실천하기 위해 미니멀리스트가 되었고, 혼자 살기에는 너무 커 지난 15년 동안 소유했던 정원 넓은 집을 팔고, 지금은 30평방미터의 작은 다락방에 월세로 살고 있어요. 일상생활 중 쓰레기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고, 주말에는 시내와 바닷가에 나가 쓰레기 줍기 봉사도 하고 있답니다.”

대다수 한국인의 평생 소원인 ‘내 집 마련’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여전히 내 집 마련의 꿈을 불태우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나의 의식주 해결이 불가능했다면, 나는 여전히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 피라미드의 하단계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모든 과정을 삶에서 치러 내고 값진 체험을 쌓으면서 오늘의 나로 성장해 왔다.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좋아서 신이 나서 할 수 있는 일을. 오랫동안 나는 내가 정말로 무슨 일을 해야 행복과 보람을 느낄 수 있을지 수없이 고민해 왔다. 오랜 방황과 고뇌 끝에 드디어 나는 차츰 내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한국입양아, 교포 자녀, 덴마크 젊은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일은 내 마음을 즐겁게 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 덴마크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한국어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들이 한국문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각자의 모국어로 번역해 K-문학이 한류의 물결을 타고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가길 기대한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한국문학이 노벨문학상에 도전하는 날이 있으리라.

지금 나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숙명으로 삼고, 한국어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자 다짐한다. 얼마 전 10주간의 한국어 교원 양성과정을 끝냈고, 지금은 한국어교육을 전공하고 싶어 고려사이버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해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한다는 게 이렇게 재미있고 신나는 일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요즘은 만학의 기쁨으로 구름 위를 날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직도 한국의 교육은 암기 위주의 4지선다형 시험이 대수라는 것이지만….
가난하고, 부모 없고, 힘없고, 나이 들고, 몸과 마음이 불편한 사회의 약자들이 의식주 걱정 없이 사람답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가 진정한 복지국가라고 나는 믿고 있다. 덴마크의 투명한 정치와 부의 재분배, 인간적인 교육정책, 안정된 복지정책에서 한국이 배울 게 아주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이 앞으로 친환경적이며 인권뿐만 아니라 동물권과 모든 생명권이 보장되는 진정한 복지국가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나의 작은 힘을 보태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한국은 지금의 덴마크보다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