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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떠나는 삶에 관하여
작성일
2022.12.13

일반산문 부문(체험수기) 가작



떠나는 삶에 관하여

(동포 5세가 기록하는 인정 투쟁 연대기)

박 동 찬 (중국)



기약 없는 약속(의 땅)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이 나는 낯설지 않다. 소싯적 교회 주일학교에서 자라다시피 한 모태신앙이어서도 그렇겠지만, 우리 목사님은 늘 『출애굽기』 속 이스라엘 민족의 이산의 일화들로 성도들을 위로했기 때문이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애굽(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장정만 6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에 신학자들이 과학적인 셈법을 동원해 추산해보니까요. 그러니까 남녀노소를 다 하면 대충 200에서 300만 정도의 인구라고 합니다. 이것은 조선에서 나와 중국에 정착한 우리 조선 민족 인구수와 맞먹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택함 받은 민족입니다.”
하도 어릴 때의 기억이라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노(老) 권사님들이 대표기도 때마다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울부짖었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국의 교회 통제는 꽤 살벌했다. 그런 가운데서 신앙을 해왔던 나는, 공안(중국의 경찰조직)이 교회로 들이닥칠 때마다 창고로 숨어 들어갔던 기억 또한 잊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인 나에게 있어서도 목사님의 출애굽 설교는 놓아서는 안 될 동아줄 같은 존재였다.

고조부: 디아스포라 가족의 탄생

고조부가 중국으로 떠난 지도 어언 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실 중국으로 갔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1920년은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근대국가가 세워지기 훨씬 전이었기 때문이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아시아 첫 공화정 국가인 중화민국이 이듬해 세워졌다지만 혼란스럽기는 여기나 식민지 조선이나 다를 바 없었다. 동북 지방은 아예 군벌들이 할거하고 있어 중국의 개념이 유통되었는지도 의문이다. 고조부 세대는 그곳을 만주나 간도 정도로 호명했을 것 같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식민지 조선인에게는 그런 지리적 개념조차 없었다. 그냥 땀 흘린 만큼 거둘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말을 자유롭게 쓰고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공간이다, 나라 잃은 비분강개를 뜨겁게 발설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들은 자유에 소속되고 싶었다.
3·1운동 이듬해 조국 찬탈자로부터 수배자로 지목받은 나의 고조부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하령리, 태어난 고향 땅을 등지고 만주로 탈주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겠지 생각했으련만 1942년 5월 이국땅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조부의 말로는 중국에 머무는 동안에도 항일운동에 힘썼다고 하는데, 입증자료 미비라는 사유로 그간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는 번번이 반려됐다. 그러던 중에 4년 전쯤, 조부는 발품을 팔아 수집한 얼마 안 되는 사료를 장손인 나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나이도 나이고, 기억이 오락가락한다면서 이제는 나의 일이라고 당부했다.
“내가 알기로는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주는 혜택은 직계 3대까지일 거다. 너가 찾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너한테 특별히 주어지는 건 없어. 그래도, 무조건 찾아야 한다. 그건 우리 할배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이라고. 국립묘지에 비석이라도 세워야지.”
사실 입증자료 미비에는 그럴 만한 사유가 있다. 1949년 사회주의 중국이 건국하면서 50년대 말부터 반우파투쟁, 민족정풍운동 등 ‘인민’과 ‘적’을 구분하는 정치공작이 진행됐다. 그리고 광기의 시대로 기억되고 있는 문화대혁명까지, 중국의 정세가 요동칠 때마다 가장 극심한 타격을 받은 지역은 단연 중국의 변방 소수민족 지구다. 조선족의 집단거주지인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문화대혁명 때 가장 심각한 피해를 본 곳 중 하나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친조카 마오위안신(毛遠新)이 연변에 내려와 문혁을 진두지휘했으니 그 파괴력은 가늠할 만하다. 그때 남조선(한국)이나 북조선에 친척이 있으면 조선 간첩, 소련에 갔다 왔으면 소련 간첩, 일본공장에 강제 징용되어 일했던 경험이 있으면 일본 간첩이라는 누명을 쓴 조선족이 부지기수였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공산당 입지 강화를 위해 조선족의 전통과 풍습, 조국관을 제거하는 방편으로 이용됐다.

올해 여든을 넘기신 동네 어르신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소학교에 다닐 때 시험에서 조국을 묻는 문제가 출제되었다고 한다. 두 개의 보기에서 하나를 고르는 식인데 중국과 조선이 나란히 적혀있었다는 것이다. 난감했을 거란 예상과 달리 당연히 중국을 골랐다는 어르신의 얘기가 이어지자 나는 호기심에 물었다.
“조선을 정답이라 적으면 어떻게 되나요?”
“허허, 민족분자라고 피떠우(批斗·조리돌림) 해버리지.”
아무튼 고조부의 선택 덕분에 나의 집안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중국에서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고조부의 선택권이 그 후손들에는 오랜 시간 동안 주어지지 않았던 관계로 우리는 중국에서만 살아야 했다. ‘조선족’이라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을 부여받고서. 히브리 민초들로부터 시작된 역사는 아쉽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 다윗 왕을 시작으로 일개 왕국사(왕정사)로 포섭되고 만다. 그렇게 재중 조선인들의 역사도 중국 조선족의 역사로 편입 당하는 수순을 밟는다.


조모: 사람이 불법일 수는 없다

조모의 고향은 요녕성 무순에 있는 장당(章黨)이라는 동네였다. 원래는 그냥 오지의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지만 큰 저수지(章黨水庫)가 들어선 후로 저수지와 더불어 유명해졌다. 물론 조모네가 살던 집은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정부의 권고에 따라 상백관이라는 아무 연고가 없는 마을로 이사 갔는데 사실 강제 이주나 다름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나마 보상금이 지금까지도 나온다고 한다. 솔직히 나도 돈 얘기만 나오면 귀가 쫑긋해진다. 조모의 기억에 따르면 1년에 200위안, 계산해보니 한화로 3만 원 조금 넘는 돈이었다. 그것도 50년 분할 지급으로 되어있고, 당사자가 부재할 시 지급도 자동 종료된다고 한다.
아무튼, 조모는 그때로부터 떠나는 삶을 시작한다. 지인의 중매로 조부가 (될 사람이) 있는 마을로 와서 살림을 차렸고, 인민공사 1958년 중국 정부가 농촌의 집단화를 위해 설치한 조직으로 농가의 99%가 가입함.
에서 일하면서 입에 풀칠이나 했다. 사실 조모는 10년 동안의 문화대혁명을 온전히 겪은 산증인이나 마찬가지여서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모의 문화대혁명은 평범해도 너무 평범했다. 누구를 피떠우(批鬪·조리돌림)한다면 무리에 휩쓸려 동조하고, 밭일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일손을 놓고 모 주석(마오쩌둥) 어록을 읽었다고 한다.
“할머니, 근데 중국말 잘 못 하시잖아요. 어록을 어떻게 읽으셨대.”
“혼자서 읽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끼어서 웅얼웅얼했지 뭐.”
립싱크를 한 거다. 강하고 독하고 실용적인 조선족이라고들 많이 얘기한다. 쉽게 말하면 조선족은 처세술에 능하다. 이것을 두고 조선족의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하기에는 무엇하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눈치와 처세였다. 자랑스러운 민족성이 아니다.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1992년 5월 2일,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조모는 한발 앞서 서울로 향한다. 한국에 외삼촌이 살아계셨는데 그분의 초청 덕분에 3개월 친척방문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사실 친척방문이라는 것은 허울 좋은 이름이다. 당장 내일 먹고 살 문제를 걱정해야만 했다. 중국에서는 개혁개방의 열기가 한창일 때였다. 모든 사람이 어떤 힘에 떠밀려 자본의 흐름을 쫓아가고 있었다. 조모도 아마 불안했던 모양이다. 좋게 말하면 앞서 언급한 실용성이고, 아니면 어떤 ‘국제감각’이 작동했을 수도 있다. 함께 부자가 되자는 사회주의 이상은 공허한 구호로만 남은 채 부익부 빈익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개혁개방이 중국 현대사의 분명한 전환점임은 수긍이 되지만 그 속에 국가의 또 다른 강제가 개입된 것은 아닐까.
조모는 계획대로 3개월 비자가 만료된 후로 ‘불법체류자’의 신분을 안고 음지에 숨어 지냈다. 단속반이 식당에, 다방에, 공사 현장에 몇 번이나 닥쳤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눈치가 재빠르다고 자평하는 조모는 화장실에 숨거나 뒷문으로 빠져나가 위기를 모면하였다. 지금 조모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웃으며 이야기한다지만 그렇게까지 버텨야 했던 삶은 여간 안쓰러운 게 아니었다.
그 후 조모는 다시 외삼촌의 도움으로 일시적 귀화 정책이 시행될 즈음에 오랜 ‘불법체류자’의 삶을 청산하고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아마도 처음으로 해보는 본인만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불법체류자’라는 조모에게 붙었던 낙인을, 떠남에서 강제되지 않으려는 필사적 몸부림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런데 말이다. 귀화의 길이 본인의 기꺼운 선택이었을 거라는 나의 기존의 판단이 무색해지고 있다. “할머니, 한국에 계속 사실 거죠?”라고 물으면 요즘은 머뭇머뭇하시다가 “사람 일이란 걸 어떻게 알겠소.”라고 답한다. 아, 조모에게 국적이란 것도 떠나는 것에 지쳐 어디든 정착해서 잠깐 쉬려 했던 방편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조모는 그 갈망만큼이나 떠도는 삶에 익숙해져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돌아다니고 싶어서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떠나게 된다. 한번 떠남을 경험한 사람에게 두 번째 떠남은 ‘퍽’이나 예사로운 일이다. 모든 조선족이 그런 것 같다. 뿌리 없는 공허함이 보이지 않는가.


아버지: 또 다른 월경의 기획자

나의 아버지는 중국 선양(瀋陽)에서 작은 사업, 여행사를 하신다. 그것도 무려 13년 동안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돈을 제법 벌었을 법도 한데 부자는 못 되고 여전히 중산층이다. 여행업을 잠시 떠나 전혀 상관없는 직종도 경험해보았고, 목돈을 모아 새로운 장사를 해보려는 시도도 여러 번 있었지만, 결과는 늘 좋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반백이 되더니 여행사 몇 년만 더하고 귀농이나 해야겠다는 말을 심심찮게 하신다. 아버지는 이제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아버지의 여행사는 희한하게도 여행상품을 취급하지 않는 여행사다. 하는 업무라고는 조선족 동포들을 위한 한국 방문 비자 대행이 유일하다. 항공권도 판매하시는데 매출의 99%가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항공편이다. 십여 년 동안 조선족 출입국정책은 한 달이 멀다 하고 수없이 바뀌고 또 바뀌었다. 변화하는 정책을 두고 일희일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자주 보았다. 90년대 한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불었던 친척방문 열풍, 방문 취업제 도입으로 조선족 사회를 강타한 출국 바람, 대대적인 ‘불법체류자’ 단속과 추방까지. 아버지는 늘 질풍노도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런 아버지 곁에서 나는 이런저런 사연을 안고 찾아오는 수많은 조선족을 만나기도 했다. ‘불법체류자’로 추방당해 다시는 한국으로 못 가게 되어 눈물 흘리는 중년 아저씨와 한국 비자를 받고도 두고 갈 자식 걱정에 그늘진 얼굴의 어머니들. 아버지의 여행사는 늘 그런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국행으로 잃은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이 스러지는 조선족을 다시 일으켜 세운 고마운 존재임은 틀림없다. 1920년, 나의 고조부는 식솔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셨고, 그 원한의 강을 다시 건너지 못하고 객지에서 운명했다. 그리고 100년이 흘렀다. 생각해보니 나의 아버지는 강 이편에서 다시 강 저편으로, 사람들의 월경(越境)을 돕고 있다. 그래, 어쩌면 여행사는 정말 운명인가 보다.
“아버지, 그동안 여행사 하면서 한국으로 보낸 사람이 얼추 몇 명 정도 되죠?”
“허, 내가 그거 세고 앉아 있을 정신 있냐. 그래도 뭐 한 2,000명은 되지 않겠어?”
나는 아버지가 얼마나 고상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일을 시작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버지도 본인이 장사꾼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적당한 장사꾼이다. 비자 값도 내기 어려운 짠한 사정 앞에서는 그냥 손해 보기를 선택한다. 나는 큰돈 못 버는 아버지가 새삼 존경스럽다. 하늘의 고조부도 분명 기뻐할 터다. 아버지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고조부의 꿈을 비행기로 실어 나르고 있으니 말이다.

나: 소수자의 삶과 고뇌

1996년 4월, 나는 중국 선양의 시립 제4 병원에서 태어났다. 내가 출생 병원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훗날 누누이 그 일을 언급한 아버지 덕분이다. 90년대의 중국은 아직도 발전의 새순이 한창 돋아나고 있을 때였다. 아이도 보통 집이나 위생소(보건소에 해당하는 작은 의료기관) 같은 데서 출산하였기에, 시립병원에 간다는 건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사치였다. 게다가 아버지는 수술실에 들어가는 의사며 간호사들에게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훙바오(紅包·뒷돈)까지 두둑이 챙겨주었다고 한다. 족히 몇백 위안, 몇 달 치 임금과 맞먹는 돈이었다. 돈은 당연히 조모가 한국에서 송금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한국의 은혜를 입었다.
‘떠남’은 나에게 태생적 속성이었나 보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나의 중국 신분증에는 주소가 하나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곳이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오래전 폐기된 호구 제도는 중국에서 아직도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호적(호구부)에 기록된 주소로, 조부와 아버지가 살았던 마을이 신분증에 찍히게 된다. 한국에 온 뒤로 이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전입신고를 안 했다는 이유로 벌금을 물을 뻔했으니, 주소가 평생 변하지 않고 따라붙는 중국의 신분증으로 인식했던 탓이다. 실로 호구 제도는 중국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농민공 문제이다. 먹고 살기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했지만, 호구가 농촌, 외지에 있는 관계로 아무런 도시의 혜택도 누릴 수가 없다. 자식이 현지 학교에 취학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사실상 차등적 시민권 제도나 다름없다. 떠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게 정부의 뜻인가 모르겠다. 그래도 사람들은 줄기차게 어디론가 떠나간다. 떠남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아닐까.

선양에서 초중고를 나오는 동안 내가 떠나는 일은 없었다. 대신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에 익숙해졌다. 나의 조모는 벌써 한국으로 떠나 없었고, 아버지도 내가 네 살 때 한국으로 떠났다. 그러다가 3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오나 싶더니 이내 어머니가 4학년 때 한국으로 향했다. 나는 성장기의 거의 모든 시간을 결손 속에서 보내야 했다.
“한국에 가는 것도 다 동찬이를 위해서야.”
한국은 어른들이 가는 곳, 한국은 행복해지기 위해 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버려진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다. 우리라고 함은 부모의 한국행이 2000년대 나의 학창 시절에 아주 보편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이 한 학기에 한 번씩 결손가정 조사를 진행했는데 오히려 부모 중 한국에 안 간 경우가 이상할 정도로 모두가 손을 번쩍 들었다. 현대판 이산가족이 조선족 공동체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너도나도 애늙은이가 되었다. 학교서 숙제로 내주는 일기 쓰기와 글짓기는 온통 덧없는 세상과 돈에 대한 염증(厭症)으로 가득했다. 백일장에서는 부모와의 생이별을 가장 절절하게 표현한 친구가 대상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웃으며 추억할 수 있다지만 그때는 사회 분위기 전체가 우울했다. 연변에서 불리는 애창곡 중에 <모두 다 갔다>라는 곡이 있다. “안해(아내)도 갔다, 남편도 갔다, 삼촌도 갔다, 모두 다 갔다. 한국에 갔다, 일본에 갔다, 미국에 갔다, 로씨아(러시아)로 갔다.” 노래 가사가 그렇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한국으로 떠난 모든 사람은 돈을 많이 벌면 돌아오겠다고 말한다. 떠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돌아오는 것이 목적이다. 돌아오려고 떠난다. 한국에 몸은 와있는데 마음은 떠나온 곳에, 처자식이 있는 곳에 머물러 있다. 한국 사회가 조선족에 거는 ‘기대’가 있다. 한국인으로 살아주었으면, 한국의 편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거다. “당신은 한국 사람이요, 중국 사람이요?”, “한국과 중국이 축구 하면 당신은 어디 응원할 거요?” 몸과 마음이 분열했듯이, 조선족의 정체성이란 것도 동전의 양면과 다름없다. 애초에 한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 없는 국제 유목민임을 인지한다면 그런 질문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건지 알 수 있다.

나: 국적은 있어도 조국은 없다

떠남은 꼭 어떤 확인 가능한 지리적 위치를 향해야 하는 건 아니다. 깨달음을 갈구하는 떠남도 있다. 나의 소년기는 ‘나는 누구인가?’를 밝히기 위한 긴긴 방황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나의 삶은 “너는 조선족이야”였다. 그런데 사춘기의 반항심은 이 명제로도 옮아갔다. “나는 조선족”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2002년 9월, 나는 집에서 별로 머지않은 조선족 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일곱 살 때를 가리켜 공부를 잘했다고 하기에는 민망함이 없지 않지만, 사상 각오가 투철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우등생인 이유로 소년선봉대원이 됐다고 정리하겠다. 소년선봉대는 공산당 산하 어린이조직이다. 나라님의 어록을 읽고 외우는 시대는 다행히 아니었지만, 붉은 넥타이를 매일같이 매고, 국기에 대한 거수경례도 배웠다. 물론 그 국기는 ‘오성홍기(五星紅旗)’다. 우리는 공산주의 계승자라는 주문도 달달 외워야 했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떠난 4학년 때를 제외하고 나의 성적은 늘 상위권에 들었다. 보통 5학년부터 소년선봉대의 임원으로 발탁되고는 하는데 가장 일찍 대원이 됐지만, 임원은 끝까지 안 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때는 몰랐고 나중의 추론인데 나의 기독교 신앙이 아무래도 ‘문제’였을 것 같다. 처녀 때부터 교회를 다닌 어머니 영향으로 나는 당시에 중국에서 보기 드문 모태신앙이었다. 학교에서 교회를 못 나가게 묶어두지는 않았지만, 엄포를 놓는 등 핍박은 늘 있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2008년의 기억은 단순하다. 여름방학에 처음으로 일주일 동안 한국에 놀러 간 일과 태어나서 12년 만에 한국으로 귀화한 조모를 만난 일, 그리고 베이징올림픽 양궁경기를 보면서 한국 대신 중국을 응원했다가 외조부에게 호되게 혼난 일, 그게 전부였다. 단순했지만 강력했다. 나는 한국이란 존재를 그때 비로소 의식하기 시작했고, 보이게 보이지 않게 작동하고 있는 ‘경계’의 실체를 체감했다. 그것은 각각 나라와 나라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각과 생각 사이에 놓인 금단(禁斷)이었다. 양쪽에서 간을 보고 있자니 그 유동성이 오히려 불확실성만 키웠던 것 같다. 나만의 흔들리지 않는 영토가 필요했다. 나는 민족 정체성이라고 하는 정박지를 찾아 떠났다.
역사 공부와 친숙해진 것도 이때부터다.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았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기에 정체성에 관한 탐구는 오롯이 내 개인의 몫이었다. 그리고 역사야말로 나의 실존을 가장 강력하게 어필해주는 도구임을 깨달았다. ‘고국 혹 모국은 한국이고, 조국은 중국이다’는 결론은 내가 납득하기 가장 편했던 결론이다. 마치 친어머니와 양어머니가 있는데 어느 한쪽도 쉽게 외면해서는 안 되고, 다 모시고 가야 한다는 주장과 흡사하다. 어떤 사람은 이를 다르게도 표현했는데 ‘시집온 각시가 친정과 시댁을 갖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세상은 꼭 우리의 해석대로 구성되지는 않는다. 친어머니와 양어머니는 심술들이 많았고, 시모는 친정 생각할 겨를을 허락하지 않는다. 더욱이 서러운 건 친정집에서조차 출가외인이라며 환대하지 않았다.

‘떠도는 땅’ 너머 ‘약속의 땅’

한반도의 근현대사는 ‘이산’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일제의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은 해외로의 망명을 불러왔고, 이와 별개로 강제로 이주당하고 징용당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동족상잔의 전쟁은 수많은 난민을 양산했고, 극심한 가난 때문에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됐다. 경제 개발기에는 보릿고개를 넘어보자고 광부나 간호사와 같은 노동력이 해외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산의 동기는 다양했고 이들이 오늘날 한반도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는 재외동포-코리안 디아스포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조선족의 정체성은 국가권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굴절 당했다. 그것은 고려인이 당한 강제 이주와 차별과 혐오 속 재일조선인의 자기부정과 비슷한 맥락 위에 있다. 일본의 천재 연출가 츠카 코우헤이(한국 이름 김봉웅) 역시 “내 조국을 경멸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가 없잖아. 한국이란 나라는 구제 불능이야. 하지만 난 아니라고!”라는 생각을 유소년기에 품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민족 정체성은 거세된 채 국가 정체성을 강요받아온 조선족의 수난사에 대해 한국 사회는 무지하다. 한국과 중국이 축구를 하면 어디를 응원할 것인지와 같은 질문을 여전히 검증의 잣대로 동원하면서 ‘조국’을 향한 그들의 애국심과 충정심을 테스트할 뿐이다. 조선족 공동체가 오로지 한국적 관점에서 편의대로, 경제주의적 논리로 해석되고 있음은 분명 성찰할 지점이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늘 소수자의 위치에 놓여있을 때 찾아온다. 중국에서 나는 늘 소수자였다. 성씨까지 중국인 중에는 없는 ‘박 씨’여서 수시로 이질성을 확인하며 살아야 했다. 이생에 다수자로 한번 떳떳하게 살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에 나는 조국이라고 여겼던 한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했다. 아무리 지리적으로 자신이 태어나서 자라난 익숙한 곳에 산다고 해도, 아무리 피부색과 언어가 동일한 사람들과 함께 산다고 해도 자신의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 삶은 망명자와 다를 바 없다. 귀환이라는 표현 대신 ‘망명’을 고집하는 이유이다.

고향이란 무엇인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라는 사전적 정의로는 쉽게 해갈이 되지 않는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가장 많이 마주했던 질문 중 하나가 “고향은 어디예요?”이다. 얼핏 들으면 질문자의 관심에서 출발한 지극히 일상적인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당신은 여기에 속해 있지 않다, 당신이 돌아가야 할 곳은 다른 데 있다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질문자는 이 땅의 ‘주인’이고 피질문자는 이 땅의 ‘손님’이 된다. 조선족은 만들어진 이방인이다.


이집트 아래서 노예살이하던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출애굽 한다. 그것은 어쩌면 일제 식민지라는 굴종이 강요받는 세상에서 뛰어나와 만주로, 연해주로,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과 그 후손들의 모습을 닮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장 그들에게 신이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허락됐던 것은 아니었다. ‘광야’라는 곳에서 40년을 방황한다. 재일조선인들도, 조선족들도, 고려인들도 방황하고 있다. 그 방황의 세월이 히브리 민족에 비해 많이 길어졌을 뿐이다.


바야흐로 이주의 시대이다. 조선족을 비롯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이주는 물리적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들은 기존의 배치 안에서 고정되거나 강제되는 것을 거부한 사람들이다. 새로운 가치나 방법을 창조하기 위해 벗어난 사람들이다. 이주라는 표현보다는 탈주라고 함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약속의 땅’을 더 이상 희구하지 않는다. 우리 손으로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고 소멸함으로써 얻어지는 탈영토적 삶의 양식. 아브라함을 불러 “너의 고향을 떠나라.” 했던 신의 명령은, 오늘날 우리 모두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