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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stay hungry, stay foolish!
작성일
2022.12.13

일반산문 부문(체험수기) 가작


stay hungry, stay foolish!

김 순 희 (일본)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20대 후반에 접어들며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내게 주위의 동료들과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일본어 학원에서 만난 일본인 선생님의 말씀은 달랐다. “더 고민해!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한 번뿐인 인생인데!” 선생님의 그 말씀이 내겐 커다란 발상의 전환이었고, 그렇게 나는 혼다 선생님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일본유학을 꿈꾸게 되었다. 스물일곱의 어느 날, 비자신청 등 모든 절차를 일사천리로 끝내고 부모님께 일본행을 통보했다. 십여 년 전, 보수적인 부모님은 넉넉하지 않은 시골 살림에 아들 셋의 대학공부를 위해 인문계고등학교 진학을 원하는 내 고집을 꺾고 상업고등학교에 진학시켰다. 졸업 후 3년 동안 직장에서 사무직으로 일했던 나는 그 후 영업직으로 전환할 때도 무언가에 늘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사회생활 4년쯤 지났을 때 독학사라는 제도를 알고 도전해 봤지만, 바쁜 일정과 주말을 이용한 청강을 따라가지 못하고 몇 개월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27살에는 새로운 길을 찾고 싶어 야간대학 입학 창구를 두드려 봤지만, 당시만 해도 사회인에게 만학의 문은 넓지 않았고 현실의 벽은 높기만 했다. 부모님은 내가 적당히 직장생활을 하다 평범하게 결혼해 살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8년의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환경을 바꾸기 위해 스물여덟의 나이에 일본땅을 밟았다. 마음속으로 ‘30대 인생은 내가 개척한다!’를 외치며.

유학생활과 결혼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은 일본어 학교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의 내 목표는 일본어 학교 졸업 후 호텔 관련 분야의 전공을 밟아 호텔종사자가 되는 것이었다. 전문직에 대한 희망과 많은 사람을 접할 수 있는 호텔업의 일이 나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일본어 학원에 다녔지만, 내 일본어는 그리 쉽게 늘지 않았다. 살아있는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했다. 짧은 일본어로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섰고, 몇 군데 거절당한 끝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선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설거지, 칵테일 만들기, 홀 서비스, 청소 등을 했다. 외국인은 혼자뿐이었는데 듣기와 말하기가 좀처럼 익숙하지 않아 실수도 많이 했다. 그렇지만 나름 8년이란 직장생활에서 얻은 자신감도 있었고 열심히 하면 사람들 마음은 다 통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다. 급여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동참하고 싶은 마음에 아침 일찍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가게 선전용 전단을 돌리기도 했다. 2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오후에 저녁 아르바이트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리더에게 전화를 했을 때, 충격적인 말을 전해 듣게 되었다.


“김 상은 해고됐다”라고. 전날 밤 아르바이트를 했고, 아침에 전단지를 돌리고, 사장님께 인사까지 하고 왔는데 아무런 얘기를 듣지 못했었다. 결국, 일본어를 잘 못 하고 일을 제대로 못 한다는 이유로 나는 한 달여 일한 일본 가게에서 잘린 것이었다. 사장님은 나를 아르바이트생 리더에게 맡겼기 때문에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자리를 피해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언어소통이 잘되지 않는 외국인인데다 일본의 선술집 분위기도 잘 읽지 못한 내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고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당시는 그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납득하기 힘들었다. 언어와 문화의 벽을 실감한 쓰디쓴 경험이었다.


일본어 학교를 마칠 무렵, 유학 생활이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하던 차에 지인의 소개로 동갑내기 남성을 만났다. 둘 다 혼기가 꽉 찬 나이로 결혼 소식을 기다리시던 양가 부모님들은 무척 기뻐하셨고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미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호텔 관련 전문학교 진학도 결혼이라는 현실 앞에 멀어져갔고 호텔종사자의 꿈도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아르바이트로 일본어 학교에서 사무보조 일자리를 얻었고 2년 후에는 정직원이 되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태어났고, 두 달이 지나 친정엄마가 오시자마자 직장에 복귀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렵게 얻은 일자리를 잃게 될까 봐 필사적으로 분투했었던 것 같다. 생후 3개월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6년을 보육원(어린이집)에 다녔던 아들은 세 살까지 유독 병치레가 많아 병원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남편과 나를 단련시켰다. 그때마다 초보부모인 남편과 나는 멀리 있는 한국의 가족들보다 보육원 선생님들과 친구 엄마들, 인터넷 정보를 의지하며 힘든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되다

육아와 직장생활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야간대학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50대 이후 언젠가 아이가 성인이 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을 때 대학을 가고 싶다는 꿈만 꾸고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시작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남편의 말에 용기를 얻어 야간대학에 원서를 냈다. 당시 야간대학의 수요가 별로 없었고 원서를 낸 야간대학의 학과도 축소되어 지원 가능한 학과가 영문학과뿐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편의 협조와 회사의 배려에 힘입어 나는 그렇게 서른여덟의 나이에 대학생이 되었다.


“배움의 가장 큰 증거는 변화에 있다.” 첫 수업에서 한 교수님의 말씀은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다. 그렇게 시작된 야간대학 수업은 바쁘게 돌아갔다. 5시 45분에 회사를 마치고 6시 10분부터 시작하는 수업에 맞춰 자전거를 달려 대학에 도착했다. 9시 30분에 수업이 끝나면 10시가 넘어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고 과제와 집안일을 끝내고 12시가 넘어야 잠들 수 있는 생활을 4년간 계속했다. 토요일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다른 캠퍼스의 과목을 수강해야 했고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해야 했다. 영어라는 외국어를 20년 만에 다시 접하며 공부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늘 꿈꾸던 대학생활에 대한 설렘과 변화에 대한 기대는 힘든 공부조차도 즐겁고 가슴 뛰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대학이라는 시스템을 경험한 적 없던 나는 강의실에 앉아 교수님의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외국인으로서 접하게 되는 일본의 젊은 학생들과의 교류는 흥미진진했다. 가끔 내가 첫 수업의 강의실에 들어가면 떠들고 있던 학생들이 갑자기 ‘씽’ 하고 조용해지곤 했다. 내가 맨 앞자리에 앉으면 “뭐야!교수님이 아니고 학생이잖아” 라며 만학도에 속았다는 뒤통수가 간질거리는 수군거림이 들리곤 했다. 외국인이 거의 없는 사립대학에서 나는 일본 학생들과 나이만 다를 뿐 똑같은 학생으로, 어쩌면 더 열정적으로 대학생활을 이어갔다.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도, 정해진 시간 내에 서술시험을 치르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외국인 영어 교수님들만은 내 실력보다 적극적인 태도에 후한 점수를 주셨다. 나의 도전정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맘껏 대학 생활을 만끽하고 싶은 욕심에 야간 검도부 동아리에 들어갔다. 검도 실력이야 초보에서 시작해 초보로 끝나고 말았지만, 한국에서 드라마를 보며 동경했던 검도를 경험하고 다른 과의 학생들과도 교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도구로 무장을 해도 20대 초반의 젊은 남학생들과 대전을 치르고 나면 숨은 턱까지 차올랐고, 가격당한 머리는 눈물이 ‘핑’ 돌 만큼 얼얼했고, 어느새 팔뚝엔 보랏빛 멍이 들어 있곤 했다. 한국과 같은 장유유서의 유교적 문화가 뿌리 깊지 않은 탓인지 격의 없는 그들의 대우가 어떨 때는 참 편했다. 덕분에 대학생활의 큰 추억으로 남았다.

동일본대지진이 남긴 것


대학교 3학년이 끝날 무렵인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다. 동북지방, 그중에서도 내가 사는 미야기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와 피해가 발생했다. 그전까지 크고 작은 지진은 익숙했지만, 그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커다란 진동과 함께 찾아온 정전으로 엄청난 공포가 엄습했다. 회사에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학교로 달려가 머리에 보호모자를 뒤집어쓰고 기다리고 있는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4층인 집안은 쏟아져 내려 산란한 식기들과 쓰러진 가재도구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위층에서 물이 새는지 벽에는 물이 흘러내리고 전기, 물, 가스는 모두 끊긴 상태였다. 계속되는 여진에 아들은 책상 밑에 들어가 울음을 터트렸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센다이한국총영사관이 피난 대피소 역할을 하는 것도 모르고 지역 피난소로 지정된 초등학교로 가려고 하니, 역에서 발이 묶여 귀가할 수 없게 된 사람들로 이미 발 디딜 틈 없는 포화상태라 했다. 다행히 어린이회 학부형의 도움으로 근처 커뮤니티센터에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의 손을 부여잡고 눈발이 날리는 캄캄한 밤길을 걸어 피난소에 다다랐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담요며 주먹밥을 배급받고 자가발전도 있었지만, 휴대전화 충전은 엄두도 내지 못 하고 한국의 가족, 지인들 걱정에 지진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한 소식도 모른 채 계속되는 여진에 불안해하며 이틀 밤을 보냈다. 전기가 복구된 후 집에 돌아와 TV를 통해 접한 쓰나미 피해 영상은 충격 그 자체였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들의 엄청난 피해 영상에 그저 할 말을 잊은 채 눈물만 흘렸다. 부랴부랴 한국의 부모님께도 연락을 드렸더니, 우리와의 연락 두절로 심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셨단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방송된 쓰나미 영상을 보시고 큰 충격을 받으신 데다 이틀 동안 연락이 닿지 않자 형제들이 동경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행방불명 신고를 해놓고, 연락이 올 때까지 애간장을 태우셨다고 한다. 비상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편의점을 돌고 물을 길어 쓰며 불편한 생활을 하던 중, 이번엔 후쿠시마 원전 문제가 크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공포에 소문만 무성했고 가솔린 보급에 비상이 걸리며 센다이한국총영사관에서 자국민 보호를 위해 피난을 독려하는 연락이 왔다. 결국, 지진 발생 일주일 만에 남편을 남겨둔 채 아들과 센다이한국총영사관에서 준비한 버스를 타고 아키타로 이동했다. 집에서 가까운 센다이 공항은 쓰나미로 모두 침수되고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피난민 같은 참담한 기분으로 아키타에 도착해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무사히 한국에 귀국할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도 몸이 기억하는 지진의 공포는 한동안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시댁에서 배추 농사를 도우며 보낼 수 있었지만,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결국, 2주 만에 부모님의 걱정을 뒤로한 채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지진 발생 후, 한 달 만에 물과 가스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서글픔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한동안 지속되던 우울함도 일상을 회복하며 사람들과 만나 지진 극복기를 공유하면서 안정되어갔다. 당시 우리 가족을 위해 비상식량과 음식이 가득 든 가방을 메고 먼길을 달려와 준 일본의 지인, 한국어 통역 직원까지 동반해 호텔을 수배해주고 비행기 항공권 예매를 도와주던 아키타 국제협회 직원들, 충전기와 담요를 빌려주던 어린이회 학부형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동일본대지진은 일본에 사는 외국인으로서 ‛이웃’의 고마움과 동병상련의 아픔을 몸소 체험하게 된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그렇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재난을 경험하며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 4학년을 무사히 마쳤다. 졸업식에서는 기모노를 입은 많은 일본인 학생들 속에서 유일하게 한복을 입은 한국인 학생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대학원 진학과 새로운 도전

대학을 졸업했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동안 왠지 모를 허탈감에 ‘늦공부는 자기만족’이라는 깨달음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만학으로 얻은 배움에 대한 갈증과 새로운 일에 대한 열정은 나를 새로운 도전으로 이끌었다. 전공과목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했던 나는 고민 끝에 한일비교연구로 방향 전환을 모색했다. 몇몇 대학원 코스에 문을 두드리고 몇 번을 거절당한 끝에 어렵게 한 곳에서 청강생의 기회를 얻었다.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4월부터 연구생으로 입학 약속을 받고 조심스럽게 청강수업을 받으며 새로운 공부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2월 말이 되어 교수님과의 면담에서 최종적으로 입학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이미 회사에는 3월 말로 사직서를 낸 상태였다. 전공과목을 살리지 못한 전문성 부족과 열정만으로 부딪힌 결과였지만, 예상치 못한 최종 통보에 일주일 동안 위가 쓰린 경험을 해야 했다. 결국 1년 후, 졸업한 대학으로 돌아가 영어교육 관련 분야로 석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이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음을 직감하면서도 나는 그 기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지도교수님은 대학 2학년 때 나에게 많은 감명을 주신 분으로 한일 간 역사 문제에 사려와 조예가 깊은 분이셨다. 연구의 주제를 고민하던 나에게 교수님은 ‛한일간의 역사 인식’이라는 키워드를 던져주셨다. 처음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지만, 교수님은 “김 상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라”고 힘을 실어주셨다. 내용과 언어를 통합한 언어 교육법으로, 학생들이 실제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한일간의 역사문제를 테마로 수업을 구성해,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이 언어학습에 미치는 효과를 검증하는 연구과제였다. 실제로 연구수업에서는 한일 간에 얽힌 근대사의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고, 어렵게 섭외한 한국 유학생들을 게스트로 참가시켰다. 일본 학생들과의 토론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설문지 작성을 통해 전후 결과를 분석했다. 시내에서 ‘한일 프리허그 캠페인’을 주도한 한국유학생을 협력자로 섭외해 캠페인 과정을 소개하고 소그룹 토론에 참가시키면서 교수님 말씀대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살아있는 한일교류의 연구수업이 되었다고 느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논문 집필과정에서 엄격한 교수님 앞에 자존감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영어라는 언어 장벽에 부딪히며 온갖 자괴감과 포기하고 싶은 갈등의 연속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기어이 완성할 수 있었다.


대학원 2년 기간 중, 또 하나의 도전은 ‘영어 중・고 교원면허’ 취득이었다. 교원면허를 취득해 일본 학생들처럼 현역 선생님이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만, 교육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마지막 관문인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한 3주간의 교생실습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 철저한 준비와 사전교육을 받으며 시작했다. 때마침 아들이 같은 중2로 반항기의 정점을 찍고 있던 터라 세대차이라는 문제와 문화적 차이라는 두 과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도 고민해야 했다. 교생실습은 운 좋게도(?) 이지메 문제와 학생 간의 골절사고 등 사건 사고가 많은 반을 배정받았다. 3주 동안 4시 반에 일어나 9시가 넘어 귀가하며 수업 준비와 수업 진행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하지만 역시 어린 학생들과의 소통은 쉽지 않았다. 마지막 날 돌아온 설문지에서 “일본어도, 영어도 알아듣기 힘들다.” “직업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 낫겠다.” “목소리만 크고 시끄럽다.”는 코멘트에 가슴에 억눌렀던 무엇인가가 화산처럼 분출되면서 폭소와 눈물을 동시에 쏟아내고 말았다. 문화의 차이를 떠나 교육적 이상과 세대 간의 이해는 좀처럼 풀어내기 쉽지 않은 과제였다. 엄마뻘인 나를 어려워할까봐 걱정하며 친해지려 다가갔지만, 오히려 어린 학생들은 내가 생각한 만큼 진지하지 않았다. 소통을 원하지 않는 어린 학생들, 알아도 손을 들어 발표하려 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정열적이고 성실한 초보 선생님의 열성은 그저 귀찮기만 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만의 공통의 관심사나 화젯거리(게임, 오타쿠, K-pop 등)로 다가가지 않으면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해진 과정만을 성실하게 임했던 탓에 그것을 수업 외 시간에 실천하기란 3주의 시간은 짧기만 했다. 학생들의 그런 솔직한 표현이 오히려 ‘지금의 어린 학생들의 표현’이라는 깨달음과 ‘언젠가 이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왠지 모를 희망을 품게 되었다. 마지막 날, 나는 학생들이 귀가한 교실 칠판에 크게 ‘또 만나자’를 써놓고 돌아왔다.


그렇게 마흔여섯 살에 대학원을 마쳤고, 이번에는 한국의 사이버대학에 편입해 2년간 한국어교육 과정과 다문화 전문가 과정을 공부했다. 아들이 어렸을 때 한국인 엄마들과 시작한 한글학교 교사와 문화센터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막상 모국어인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한 전문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국을 떠난 지 20년이란 시간이 흘러 내가 한국어뿐만 아니라, 변화한 한국 사회에 대해 문외한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도 나를 부끄럽게 했다. 20년 동안 거의 1년에 한 번은 한국을 방문해왔지만, 한국 사회의 빠른 변화에 당황하면서도 정작 깊이 있는 공부를 하지 못한 채 지내왔다. 일본에서 생활하는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한국어를 비롯한 문화적 정체성을 잊지 않는 것이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 힘의 원천임을 먼길을 돌아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이다.

경험을 통해 얻은 것들


지난 십여 년 동안 공부 외에도 나의 부족함을 극복해 보려 많은 강연회와 한일 관련 이슈와 사회문제를 다룬 모임, 자원봉사활동 등을 쫓아다녔다. 또 7, 8년 전부터는 이(異)문화 이해프로그램에 참가해 한국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시내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방문해왔다. 결혼식 때 입었던 한복을 손질해 입고, 한국의 전통놀이와 가까운 이웃 한국에 대한 수업을 했다. 어린 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과 눈망울에 큰 보람을 느꼈고, 나 자신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이 아이들이 성장해 대학생이 되어 한국어와 한국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을 때 나를 기억해준다면 좋겠다.’


나는 아마도 지금 그 작은 씨앗들을 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9년에 일본에 와 2002년 한일월드컵과 한류붐의 파도를 타고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살면서 늘 자긍심을 느껴왔고 나도 언젠가 일본 사회의 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왔다. 동일본대지진을 경험하면서 이웃의 의미와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생과 상생을 위한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으며 일본에서의 생활이 20년이 넘으며 이제는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역할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2019년 11월, 그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매년 지진 외에도 태풍과 홍수 등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는 일본에 살며 자원봉사활동에 관심이 있었지만, 선뜻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SNS를 통해 자원봉사 모집 안내를 본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전화를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작업복과 장갑, 장화 등을 챙겨 집합장소로 나갔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 섞여 버스로 이동해 하천 범람으로 침수피해를 입은 지역에 투입되어 청소와 정리작업을 했다. 모두 진지하게 몇 시간을 진흙탕 속에서 삽질을 했고 나도 여자라고 예외 없이 열심히 삽질을 했다.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않아 몹시 피곤했을 것 같은데 신기하게 피곤함도 모른 채, 큰 후유증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이틀간의 자원봉사활동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코로나19와 함께 찾아온 기회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2020년 1월, 코로나19가 이슈화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와는 별개로 새로운 시도를 했다. 한국어교원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젊어서부터 공부로 단련된 연구자나 교육자처럼 네트워크도 없었고, 실력도, 경험도 턱없이 부족했다. 가르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던 나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연회나 포럼에서 인사를 나눈 몇 분의 한국어 교수님의 명함을 찾아 이력서를 보냈다. 밑져 봐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나만의 색깔을 내기 위해 성장과정을 담은 지난 10년간의 사진자료를 만들고, 자기소개서에는 나만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나는 훌륭한 연구자도, 우수한 인재도 아니지만, 내가 남과 다르게 걸어온 길에 대해 소개했다. 나와 같은 경험이 한국어교육과 한일교류사업에 활용되기를 바라며, 그런 이유로 ‘나 자신을 추천합니다’라고 마무리했다.


분명 일방적인 내 구직활동이었고 당장 기회가 오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랬다. 코로나19의 빠른 확산으로 팬데믹 상황이 되며 4월부터 긴급사태선언이 발표되고 대면으로 가르치던 몇몇 한국어 수업도 중단됐다. 자원봉사활동이며, 어린이 한글학교 수업이며, 자잘하게 이어졌던 활동이 모두 중단되며 심신이 혼란스러웠다. 많은 사람이 경험했을 코로나블루를 경험하며 나는 책과 유튜브 강연에 의지하며 우울할 땐 여기저기 산책을 하며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그렇게 여름이 끝나갈 무렵, 이력서를 보냈던 한 대학에서 메일이 도착했다. 내년 4월부터 안식년 휴가를 가는 교수님을 대신해 한국어 수업을 몇 개 맡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흐릿한 빛이 찾아 오가기를 반복하던 내게 새로운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작은 희망으로 한 해를 보내며 새해를 맞았을 때, 또 하나의 기회가 찾아왔다. 시내의 공립고등학교에서 새로운 한국어 선생님을 찾고 있었고, 나는 일본의 정식 교원면허 소지자 자격으로 정규 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면접에서 교장, 교감선생님은 다양한 배움을 실천하고 학습환경이 다른 학생들이 많은 학교 특성상 내 경력과 배경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셨다. 처음엔 한국어만 담당하려던 것이 우연히 한국어의 다음 시간인 영어수업 교원 자리가 비며 영어수업까지 맡게 되었다. 영어 중・고 교원 면허가 그 진가를 발휘한 순간이었다. 마치 퍼즐처럼 생각지도 못한 피스들이 맞아떨어지며 나는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비상근 초임으로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가르치게 된 것이다. 코로나는 이렇게 최악의 상황에서도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냈다. 한글학교에서 어린이 계승언어를 온라인수업으로 전환하며, 나는 유튜브를 활용한 어린이 한국어 학습 동영상을 제안해 만들었다. 필드워크 수업의 코디네이터로 대학생을 데리고 한국의 한일역사 관련 시설을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무산되었다. 대신 학생들과 함께 미야기현 내에 있는 ‘안중근 의사와 일본인 간수 치바 도시치’의 인연을 기리고 있는 대림사(大林寺)를 방문했다. 취재한 내용과 만든 자료를 한국의 대학교수와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토론할 수 있는 온라인 세미나로 전환해서 실시했다. ‘늘 부족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내게 시련과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희망이 함께 다가온 한 해였다.

앞으로도 새로운 점을 찍어갈 것이다

일본에서의 23년 동안 나는 유학생에서 사회인으로, 다시 학생에서 사회인을 반복하며 성장해왔다. 지금은 4살 어린이부터 60대 일반인까지 다양한 학습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전문직 종사자가 되었다. ‘한국어교사’ 라는 직업은 한국인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가르치는 일은 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한국에 갈 적마다 찾아뵙는 혼다 선생님은 지금도 나의 든든한 멘토가 되어주시는데, 선생님의 너무나 역동적이며 한국적인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곤 한다. 한국사회와 일본사회에서 나는 그 두 가지를 알게 모르게 몸에 익히고 때론 불끈 뜨거워지는 가슴을 신중함으로 식히며 수동적 자세에서 역동적인 코드로 바꿔가며 기회를 만들고 도전하며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일본에서 지낸 23년 동안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를 떠나보내며 남은 두 어머님께는 왠지 죄송스럽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나이가 들수록 깊어진다. 남편과 아들, 세 식구가 일본에 산 지 20년. 그리도 혹독하게 사춘기를 앓으며 방황하던 아들도 이제는 자신의 꿈을 향해 새로운 첫발을 내딛었다. 남편은 20여 년을 함께한 동지로 우리의 일본 생활은 앞으로도 많은 변화를 거듭할 것이다. 코로나19로 3년째 뵙지 못하고 있는 친정엄마는 어느덧 여든이 넘으셨고 요즘 부쩍 옛날이야기를 하시며 ‘내가 보고 싶다고, 내게 미안하다’고 하신다.


만약 내가 20여 년 전 일본행을 선택하지 않고 한국에 머물렀다면, 지금쯤 나는 현실에 순응하며 좀 더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의 삶은 내게 많은 도전과 실패, 갈등 속에 고민하면서도 묵묵하게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삶의 지표를 안고 살게 했다. 일본에 와서부터 분명 내 인생의 방향은 바뀌었고, 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나만의 스토리를 가지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많은 사람과의 인연을 통해 얻은 기회와 도전이 나를 이끌어 주는 큰 힘이었으며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이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일 수 있다. 본인의 선택이든, 가족 중에 누군가의 선택이든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자신의 삶에서 생각하지 못한, 보다 많은 외부적 요소들과 부딪히며 방향전환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언어를 비롯한 문화적 장벽에 부딪히며 소수집단이라는 사회적 한계 속에, 때론 예기치 못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고, 한정된 기회 속에서 성장과 갈등, 타협을 반복해 간다. 나는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30대 인생의 주인이 되기 위해 20대 후반에 일본땅을 밟았고, 40대 인생을 바꾸기 위해 30대 후반에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50대의 나이에 60대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도전은 실패를 통해 재성장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잡을 수 없다. 처음부터 어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늘 무엇인가에 목말라했고, 때로 바보처럼 무지하고 용감하게 도전했다. 뒤돌아보니 그렇게 내가 지나온 시간 속에 수많은 점들이 남겨졌다. 그리고 그 점들이 또 다른 점들과 더해져 그려낼 내 인생의 그림을 위해, 나는 앞으로도 계속 또 새로운 점들을 찍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