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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글짓기(초등)] 34번째 민족대표 스코필드
작성일
2020.07.22

[우수상 - 글짓기(초등) 부문]



34번째 민족대표 스코필드



박새미 / 캐나다

(컴머밸리 한글학교)



2019년은 3·1 운동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그래서 한글학교에서 많이 얘기를 하자 난 3·1 운동에 관심이 끌렸다. 3.1운동에는 독립선언서를 만들고 만세운동을 이끈 33인의 민족대표가 있다. 하지만 엄마께서  34번째 민족대표라 불리는 캐나다인 스코필드가 있다고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나는 스코필드와 관련된 다큐와 신문기사를 찾아보았고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코필드는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난 캐나다인이다. 가난했던 스코필드는 17살때 대학교를 가기위해 혼자 캐나다로 와서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토론토 대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힘든 생활과 영양부족으로 소아마비에 걸려 한쪽팔과 다리가 마비되었다. 그럼에도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까지 되고 그 다음에 토론토 대학의 교수까지 되었다. 그후 한국으로 와서 강의를 하면서 한국말과 문화를 배웠다. 그러다 어느날 아는 한국친구가 찾아와 부탁을 했다. “우리의 독립을 주장하는 독립만세 운동을 내일 하는데 와서 사진을 찍어달라.”는 것이었다. 스코필드는 부탁을 들어주었고, 만세운동하는 현장에서 불편한 몸인데도 자전거를 타면서 사진을 찍었다. 또한 더 사진을 잘 찍기 위해 2층집으로 몰래 올라 갔다가 일본인 주인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 독립만세운동하는 증거사진도 찍었지만 일본 경찰에게 맞고 있는 학생들도 구했다. 또 감옥에 갇혀 고문당하는 학생들을 면담하여 고문을 못하게 했는데 그때 유관순도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스코필드는 곧 한국을 도와줬다고 일본에 의해 강제추방 당했다. 스코필드는 캐나다로 돌아와 교수를 하면서도 받은 월급 일부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쓰라고 보냈다. 나중에 은퇴한 후에는 한국에 다시 와서 고아들을 도와주다가 1970년 한국에서 돌아가셨다. 


우리가 지금 보는 대부분의 3·1 만세운동의 사진은 스코필드가 찍은 것이라고 한다. 만약 스코필드의 사진이 없었다면 3·1 독립만세 운동에 대해 일본이 거짓말을 하더라도 아무도 우리 한국을 믿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스코필드 였다면 자기나라도 아닌데 왜 상관해야 되냐고 생각할 것 같다.  그래서 스코필드 박사님이 더 대단한 것 같다. 만약에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안했다면, ‘나는 박새미입니다’라는 말 대신에 ‘와따시와 박새미데쓰’ 이럴 것이다. 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아니라 ‘도쿄스타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지도에서는 우리땅에 ‘Korea’ 라는 이름대신 ‘Japan’ 이 써 있을 것이다.  스코필드는 이런말도 했다고 한다. ‘1919년에 만세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고마워 해라’ 나는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만난적도 없는 100년전 옛날 사람들에게 고마워 하라니. 하지만 엄마에게 여쭤보니 그때 독립만세 운동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희생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나라를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무서웠을텐데 그 많은 옛날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싸웠다는것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주신 스코필드 박사님이 고마웠다.  나는 외국에 살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공부를 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외국인인 스코필드 박사님도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이렇게 큰일을 했는데 난 한국인이다.  이제부턴 나도 더 열심히 공부해서 이 다음에 한국을 위해 좋은일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