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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수기] 에메랄드섬의 옥돌 정착기
작성일
2020.07.29

[우수상 - 체험수기 부문]


에메랄드섬의 옥돌 정착기



임세진 / 아일랜드



비행기에서 처음 내려다 본, 바다 위의 섬 아일랜드는 신기한 녹색 에메랄드 빛깔을 자랑하며 불안했던 나의 마음을 기대반 설렘반으로 바꿔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렘도 잠시 더블린 공항에 처음 내린 나를 맞이한 것은 폭풍에 가까울 정도로 세찬 바람이었습니다. 바닷 바람이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로서는 머리카락을 흩뜨리며 눈을 못뜨게 불어대는 아일랜드의 세찬 바람에 익숙해지기까지 이후에도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던 듯 합니다. 한국도 아일랜드도 아닌 제 3국에서 아일랜드 사람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함께 정착하기로한 아일랜드에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아일랜드를 Hibernia라고 불렀다지요. 어원을 찾아보니 이 뜻은 ‘겨울의 땅 (Land of Winter)’이랍니다. 따뜻한 지중해의 날씨에 익숙한 로마인들이 아일랜드에 처음 도착해 매서운 바람에 놀라 그렇게 불렀을 법도 한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1년내내 비바람이 일상인 이곳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정착과 동시에 곧 차가운 바닷 바람의 향연 쯤은 아무것도 아닌 진짜 제 마음의 겨울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아일랜드인과의 결혼으로 이주한 외국인에게 아일랜드 정부는 당시 1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거주권만을 발급했습니다. 그래서 노동허가증이 없는 제가 아일랜드에서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작한 신혼 생활이라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것이 일상이 되었지만, 노동 허가증이 없는 사람을 써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수퍼마켓이든 편의점이든 나를 써주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성실하게 일하고 싶은데, “노동 허가증은 있나요?”의 첫번째 질문에서 막혀버리는 저는 매일 헛탕을 치면 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러 절박하게 다녔습니다. 지금도 더블린 곳곳을 다닐때마다 일 구하러 무작정 문을 두드리고 다녔던 많은 회사들이 종종 보이곤 해 새삼 감회가 새로울 때가 많습니다. 


노동 허가증도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그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절박하고 절실하게 일자리를 찾으러 다녔는지 가끔 생각해 봅니다.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 형제와 떨어져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 난생 처음 접해 보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을 때, 저에게 일의 의미는 곧 제대로 된 정착의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일을 통해 그 사회에 소속되는 안정감과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앞으로 그 사회에서 살아 나갈 수 있는 방법들을 배워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럴 길은 전혀 보이지 않으니 마음은 점점 더 갑갑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같은 케이스의 외국인에게는 일정 기간 (당시 3년)이 지나야만 노동 허가증을 발급하는 아일랜드 정부를 원망해 보기도 하고, 중요한 현지 규정 같은 것들을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지 않고 아일랜드에 정착을 결정한 저를 원망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낯설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불안감으로 어둡게 내려앉기 시작한 마음은 저를 점점 더 힘들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거나 그냥 웃어 넘길 일들도 당시의 저는 참으로 민감하고 무섭도록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수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고 나올 때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수퍼마켓에 개인의 장바구니를 가져가야 하지만, 간혹 장바구니를 잊고 간 손님이 계산대 점원에게 부탁하면 종이봉투를 내어 주던 것을 종종 보곤 했습니다. 그날은 제가 급히 시장에 가느라 장바구니를 미처 챙기지 못해 저도 처음으로 다른 아일랜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계산대 점원에게 종이봉투를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다른 아일랜드인들에게 종이봉투를 친절하게 내주었던 것과 달리 점원은 규정상 종이봉투는 생필품 이외의 특정한 품목을 구매한 고객에게만 제공 가능하기 때문에 저에게는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점원이 원래 칼같이 규정대로 따르는 사람인지 아니면 제가 뜨내기 외국인으로 보이기에 다른 아일랜드 고객들을 대하는 것과 달리 차별하며 딱 잘라 거절한 것이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사소한 일이 왜 그렇게 서러웠던 걸까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만 주던데 왜 나만 차별하느냐 차마 따지지도 못하고, 민망한 마음에 쇼핑한 물건들을 양손으로 주섬주섬 담아, 두 팔에 꾸역꾸역 겨우 끌어 안고 집으로 돌아와, 분한 마음에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그런가하면 이방인에 대한 아일랜드인의 친절도 곱게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으니 분명 그때는 제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여행객들에게 친절하기로 소문난 아일랜드인들은 길을 찾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외국인들을 보면, 묻지 않아도 어디를 찾고 있는지 먼저 물어보고 도움을 줍니다. 그날도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집에 가는 버스를 잘못 타서 어둑어둑해져 가는 시내에서 방황하고 있을 무렵 친절한 아일랜드인 부부가 먼저 다가와 도움을 주셨습니다. 길 안내를 받아 무사히 집에 돌아왔는데, 왜 감사한 마음보다는 ‘내가 그렇게 멍청하고 불쌍해 보이는 걸까’ 하는 자괴감이 먼저 들었던 걸까요. 나는 이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잉여 인간이라는 그런 마음이 저를 선한 도움에 대한 고마움 조차 순수하게 느끼지 못하는 자존감 낮은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겨울을 한동안 지내면서도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던 나날들이 결실을 맺었던지, 회사가 보증을 해주는 조건으로 노동 허가증을 받고 드디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일은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IT 계열 기업의 한국어 지원 콜센터 업무였습니다. 콜센터 일은 3D 업종 중에 하나라고 하지요. 감정 노동에 시달리는 참 힘든 직업이라고요. 그런데 저는 살면서 그때처럼 신나고 재미있게 일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도 일해서 드디어 월급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자체가 어찌나 그렇게 감격스럽고 감사했던지요. 매일 듣는 것은 고객의 불평이었지만, 그 불평조차도 외로운 이민 생활에서는 한국어로 같이 소통하는 즐거움으로 들렸으니 말이죠. 신기한 것은 그렇게 재미있게 일을 하다보니 참으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더군요. 회사의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콜센터를 찾는 고객분들은 사실 불평 자체 보다는 개선을 바라고, 그리고 개선을 통해 회사의 서비스를 계속 이용하고 싶은 고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고객들의 불평은 회사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공통적인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제점들을 정리하여 개선책을 마련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러한 저의 계획을 상사와 의논하고, 적극적인 제 열정을 높게 평가받았던 덕분인지 서비스 개선 특별 프로젝트에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당시 저는 프로젝트 일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 한국식으로 집에도 일을 싸들고 가서 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것이 소위 말하는 열정 페이에 기댄 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후 단기간에 서비스 개선이 눈에 띄게 이루어지고, 제가 담당하는 지역의 고객들의 불만 접수는 뚝 떨어지고, 실적은 올라가자 참으로 놀라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회사에서는 입사 6개월의 저를 아시아지역 담당 세일즈 부서장으로 파격 승진시키고, 그 해의 최고 공로상까지 부여했습니다. 제 열정 페이에 대한 실질적 보상은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이 되네요. 유럽 시장에 처음 들어가는 장벽은 참 높았는데, 한국인의 열혈 정신이 통했는지 장벽을 뚫고 들어간 이후 일하기는 오히려 수월했던 것 같습니다. 


일을 하는 것도 재미있고 보람되었지만, 지금도 제가 첫번째 직장에서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유엔 런치(UN-United Nation-Lunch)라 부르는 매 금요일의 점심시간입니다.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인지라 참으로 다양한 국적의 직원들이 있었습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끼리 금요일에는  자기 나라 음식으로 점심을 조금 넉넉하게 준비해 와서 뷔페식으로 나누는 점심이었습니다. 우리끼리는 유엔 런치라 부르며, 음식 문화를 통해 동료들과 자연스레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없는 솜씨에 김밥이나 잡채를 만들어가 신기하고 맛있는 한국 음식을 자랑하곤 했었지요. 일과 관련한 다른 어떤 성취보다도 그때의 그 기억은 지금도 저를 저절로 미소짓게 하는 따뜻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다양한 국가의 인종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가 깨달은 것은 어떤 특정 국가나 민족의 특징보다는 서로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모든 인간은 기쁘고 즐거워하고 때로는 화내고 질투하고 그러면서도 서로 협동하고 도와서 더 나은 것을 이룰 수 있는 공통된 인류라는 배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첫번째 회사에서 저는 대부분이 저보다 훨씬 어린 20대 초반의 젊고 파릇파릇한 동료들과 일했었는데요,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진 밀레니얼 세대의 직원들과 매일 소통하며, 고객의 불만을 접수하는 최전선에서부터 업무를 배웠던지라 이때의 경험과 인맥들이 이후 커리어에도 귀중한 자산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몇 년 후 회사가 아시아 비즈니스를 홍콩으로 옮길 결정을 했을 때, 또다시 길거리로 나와 막막해지기 전에 좀 더 큰 회사로 스카우트 될 수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고 생각했기에 항상 더 열심히 달리려고 노력했고, 힘들게 얻은 직장이었기에 일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함께 일했던 몇몇 동료들의 지혜를 모아 드디어 제 비즈니스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에서는 상대적으로 우선 순위가 밀리는 아시아 시장의 고객들만을 위한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해 보고 싶다는 제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회사의 CEO가 되어 구상해 온 비즈니스를 좀더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게 되면서, 모든 긍정 에너지를 쏟아내며 즐겁게 일하고 삶을 즐기는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네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후에도 문득 문득 이방인의 서러움이나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차별이라는 것을 인종이나 성별 등 본인의 능력 외적인 요인 때문에 같은 잣대로 공평하게 평가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길거리를 다닐 때,“Hey Chinese!” 혹은 “니하오!’ 라고 소리치는 식의 동양인을 비하하는 인종차별은 오히려 아주 애교(?)에 가까운 수준의 차별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경찰을 불러 혐오 범죄로 신고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동양인에게는 측은지심이 있고, 서양인에게는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있어서인지 말이지요. 그렇지만 본인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보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지거나 하는 경우가 되면 상황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부서장으로 회사에서 유례없는 단기간의 초고속 승진을 했을 때, 비즈니스를 키워 내실있는 사업체를 이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로 아일랜드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가장 큰 비즈니스 스쿨에서 객원 교수로 강의하게 되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준 동료들이 있었던가 하면, ‘저 아시아 여자가 할 정도면 정말 쉬운 일이거나 일할 사람이 없었나보군’ 이라며 비아냥거리던 사람들도 꽤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친하다고 생각했던 일부 동료들이 그런 속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좀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차별에서 비롯된 수군거림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요즘은 제가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러한 상황들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들이 좁은 세계에서 경험한 동양인에 대한 편협한 이미지를 제가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사람들이 수군댈 여지가 없을 정도로 더 월등한 실력으로 앞서 가야겠다 라고 나를 더 채찍질하는 계기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저 자신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동양인들에 대한 인식을 차츰 바꿀 수 있는 계기도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함께 하면서 말이죠. 


지난 10여년이 넘는 시간을 돌아보면 버티기 힘든 순간들도 많았고, 한 고비 한 고비가 아슬아슬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 저를 그럼에도 버틸 수 있게 해 준 가장 큰 힘은 생각해 보면 가족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변함없이 격려와 기도로 저를 위로해 준 가족과 친구들은 고국에 두고 온 저의 가장 귀중한 재산입니다. 비바람의 나라에 계획도 없이 정착하게 된 것은 아일랜드인인 남편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이곳에서 버텨낼 수 있었던 힘도 가족의 힘입니다. 남편은 무뚝뚝하고 살가운 표현도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저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현재까지 제 일과 생활을 묵묵히 도와주는 가장 큰 협조자입니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했을 때, 문득 내 앞에 가로막힌 장벽을 마주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 사회에서 딱 여기까지야’라는 생각과 함께요. 이곳 어느 조직이나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동양인에 대한 대나무 장벽(Bamboo Ceiling)과 제 성별에 따른 유리천장 (Glass Ceiling)의 이중 장벽에 어느 순간 가로막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때 무척 절망한 저에게 남편은 “You are a strong person with great talent. I do believe that you can break the bamboo ceiling to take the bamboo stick as a trophy. With the bamboo stick, you will break the glass ceiling!”이라고 진지한 눈빛으로 말하더군요. 그냥 저를 격려해 주려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나무 장벽을 부수어 얻은 장대를 가지고 유리 천장도 깨뜨릴 수 있을거란 남편의 말은 지금도 제가 이중장벽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더 당당하게 장대로 유리를 깨는 강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용기를 북돋워줍니다. 남편의 격려를 통해 장벽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저는 항상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동양인 여성이라는 저의 특징이 장벽이 아닌 나의 성장을 도와주는 특별한 디딤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어도 거의 못하고 한국 음식도 잘 먹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의 한글 학교나 한인 행사에 가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오랜 시간을 함께 해주는 남편은 아일랜드 생활에서 가장 고마운 친구입니다. 


그런가하면 귀여운 제 아들들에게서도 참 많은 힘을 얻습니다. 엄마에게 한국어를 하면 엄마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엄마, 김밥 만들어 주세요!” 하는 애교나 제가 힘들어 보일 때는 한국말로 “엄마, 힘내요!’”하는 첫째 아들은 한국에서 타 본 SRT와 높은 빌딩들을 기억하며 한국을 무척 자랑스러워합니다. 저는 알아듣지 못하는 아일랜드 고유어 게일말을 학교에서 배워 와서 “엄마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할 때가 있는가하면, 태극기와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자랑스레 제 반 친구들에게 알려주는 꼬마 한국 알리미이기도 합니다. 이런 형을 따라서 ‘엄마 뽀뽀’ 하면서 제 지친 하루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막내 아들 역시 저를 끊임없이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토요일 아침이면 GAA (Gaelic Athletic Association)에서 한바탕 게일 풋볼을 하고 돌아와 피곤해도, 오후에는 힘차게 한글 학교를 다니는 저의 든든한 지원군들입니다. 게일 풋볼을 좋아하고, 한국의 태권도도 신나게 배우는 이 아이들이 저는 한국인의 근면 성실, 아일랜드인의 유머와 감성, 그리고 양국 국민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끈기와 열정을 고루 가지고 글로벌 인재로 성장해 나갔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기 위해 제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가정과 일에서 항상 성실하고 따뜻한 사랑이 가득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이민 생활의 비바람속에서도 저를 계속 지탱하게 해주는 또다른 원천으로 작지만 강하고 따뜻한 교민 사회의 힘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아일랜드는 다른 유럽 국가나 북미 국가 대비 한국인 이민자가 많지는 않습니다. 한글 학교도 가장 최근에 세워진 곳 중에 하나이고요. 하지만 부족한 것들을 십시일반의 마음으로 함께 채워가며, 일궈가는 따뜻한 마음 하나만은 최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예전에 한인들이 모인 교민 사회는 좁은 테두리에서 갈등이 생기고, 각종 소문의 근거지란 부정적인 이야기들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경험은 한글 학교를 비롯하여 규모는 작지만 따뜻한 이곳 한인 사회가 우리 옛 공동체 두레나 품앗이 같이 서로서로 돕고 나누는 정신이 더 강한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에서 저는 외국에서 만나 함께한 우리 교민들과 동포들의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고, 한국과 아일랜드에 함께 기여할 수 있는 더 큰 공동체의 힘과 기운을 얻습니다. 


한국을 떠나 이민 생활에 정착하게 된지 어언 10여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때로는 나도 한국에 살면 서러움 없이 훨씬 더 잘 살 수 있을텐데 하는 막연한 생각들로 현지 사회에서 간혹 느끼게 되는 이런저런 불만을 애써 삭혀보려고 하던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렇게 생각하게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는 ‘내가 사는 곳이 어디이든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더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 주인이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한국인이 되려고 합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이 정체성을 통해 내가 속한 사회에서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기여를 하고 싶은 꿈을 꿉니다. 


아일랜드에 온 이후, 외국인들이 조금은 더 북적대는 시내 가까이에 살다가 2-3년전 동양인은 찾아보기 힘든 지금의 더블린 교외 주택가로 새로이 이사했을 때는 마치 아일랜드에 처음 왔던 기억이 떠올릴 만큼 다시 낯설어지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곳에서 주인이 되기로 한 이상 저는 더 이상 저만의 어두운 동굴과 겨울의 시간에 갇혀 지내지 않습니다. 우리의 옛 새마을 운동처럼 매 월 첫째 일요일 아침에 동네 주민들이 함께 마을을 청소하는 날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나가서 동네 청소하는 일에 동참합니다. 주민센터 기금 모금을 위한 케이크 세일즈를 하는 날에는 투박한 아일랜드 억양의 영어를 아직 잘 못 알아들어도 함께 가서 세일즈를 도와주기도 합니다. 우리의 음력설이 다가오면, 아일랜드에 모인 중국인들이 ‘Chinese New Year’라고 곳곳에 빨간 플랫카드를 도배하는 바람에 마치 모든 동양인들은 중국인일 줄 오해하게 만드는 상황이 계속 되기도 했습니다만, 이제는 그냥 혼자 기분 나빠하기보다는 한국의 약과를 들고가 나누면서 “Happy Lunar New Year!”라고 먼저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인을 비롯 많은 아시아인들이 음력설을 즐긴다고 “Lunar New Year!”를 강조해서 이야기해줍니다. 그래서 제가 사는 동네 사람들은 이제는 조금씩 “Chinese New Year” 대신 “Happy Lunar New Year!” 라고 인사를 하게 된 것 같네요!


제 소녀 시절 꿈이 한때는 외교관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한국을 알리고, 국가 간에 교류할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 참 멋있어 보였거든요. 제 직업 자체는 외교관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민간 외교관이나 다름없다 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아직은 생소한 이곳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한국인인데 참 멋있고, 성실한 믿음이 가는 사람이야. 한국인들은 그런 사람들인가보다.’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면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입니다. 제가 이곳 사람들에게 그런 인상을 주는 사람이 된다면 민간 외교관의 자격이 충분하겠지요? 오늘도 저는 이러한 민간 외교관이 되어 아이들의 학교와 유치원, 제 일터와 지역 사회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국인의 성실하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힘차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더블린 공항에 처음 내렸던 순간부터 이어진 이민 초창기의 시간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한동안 어둡고 캄캄한 동굴과도 같았던 이민 초기의 기억들을 되살려보는 계기가 되었네요. 흥겨운 아이리쉬 댄스와 친근한 아이리쉬펍 문화마저도 나 혼자만을 소외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그 시간들 말이죠. 그래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기에 별다른 후회는 남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정착 초기의 시간들을 조금은 덜 힘들게 보낼 수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태어나 20대 중반까지 살아왔던 저는 저라는 나무를 뿌리채 갑자기 뽑아와 이곳 아일랜드에 억지로 옮겨 심고 성급하게 뿌리를 내리려 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나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서, 새로운 곳에 적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었다면 같은 시간을 훨씬 덜 힘겹게 보낼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보니 매 순간 감사할 수 있는 크고 작은 도움들이 항상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더 애정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을씨년스러운 비바람의 나라로만 생각했던 아일랜드의 진정한 가치는 흥겨운 댄스나 흑맥주 기네스의 아이리쉬펍 문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때로는 차가운 바다 폭풍이 불기에 독특한 위스키향의 아이리쉬 커피와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이리쉬 밀크티의 위로가 간절해지는 낭만적인 곳입니다. 한국에는 아일랜드의 버스킹 음악이 유명하지만, 따뜻한 벽난로가 있는 아늑한 아이리쉬 티룸(Tea Room)에서는 독특한 음색의 클래식 악기 비올라 선율이 더 잘 어울리고, 그 안에서 상상력 넘치는 많은 이야기들이 밤새도록 오고 갑니다. 아일랜드는 이렇게 깊은 사색과 성찰이 풍부할 수 있는 곳이기에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사뮤엘 베케트, 세이머스 히니 등 일일이 손꼽기 힘든 세계적 대문호들을 길러내는 토양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그러면서 ‘그래도 나 요즘은 진짜 출세했네’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출세의 의미는 사회적인 지위가 올라가고, 남들이 우러러 보는 자리에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출세 (出世)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세상으로 나온다는 뜻이잖아요. 저에게는 새로운 나라에 도착해서 그 낯설음과 받아들여지지 못한 환경 속에서 웅크리고 나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꽁꽁 숨어 지내는 심경으로 살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으로 나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활력을 주려고 노력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눈빛 하나, 말 한마디에도 민감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출세’한 저는 조심스러운 배려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10여년 전 이곳 에메랄드 섬에 도착했을 때, 저는 그야말로 계획없이 굴러온 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에메랄드 섬보다도 더 빛나는 보석이 되기 위해 하루하루 나의 삶을 갈고 닦는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민자의 삶을 고유의 환경에서 자란 나무를 새로운 토양에 이식해 뿌리 내려 재생하는 과정에 비유하곤 합니다. 하지만 전 다른 토양에서 오랜 시간 자란 나무를 억지로 옮겨심어 낯선 곳에 뿌리 내리게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을 알기에 이 비유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이민자들 각자가 새로운 나라에서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빛나는 특별한 보석들이 될 수 있다면, 정착 과정은 새로운 나라에 자신의 다양성을 더하고, 서로 간의 이해와 조화를 통해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같은 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더 가깝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2의 고국에서 억지로 뿌리내린 나무보다는 모자이크 그림을 빛내는 하나의 보석으로 기여하고 싶습니다. 


경상북도 작은 산골 마을 청송에서 생장하시고 상경하여 서울에서 일가를 이루신 제 아버지께서, 당신의 딸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빛나는 존재가 되라고 저에게 지어주신 이름은 세진(世璡)입니다.  세상 세(世)의 옥돌 진(璡)입니다. 제 이름처럼 그래서 저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왔고, 이곳 에메랄드 섬에서 더욱 빛나는 옥돌이 되기 위해 오늘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매일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하루를 내달으니 한때는 제 마음까지 웅크리고 닫고 싶게 만들었던 더블린의 차가운 바람마저 싱그럽고 활기차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대로 분다고 하지요. 이 싱그럽고 활기찬 바람이 모든 재외 동포 여러분들의 마음에도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한민족 재외 동포 여러분 모두가 각자 살고 있는 곳에서, 가장 빛나는 특별한 보석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