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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나는 이 땅의 식물이고 싶다
작성일
2020.09.09

[가작 - 단편소설 부문]


나는 이 땅의 식물이고 싶다


류일복 / 중국


와르릉와르릉, 나를 흔들어 깨우는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떴다. 어제그제 듣던 새소리 따위는 분명 아니었다. 창을 열었다. 네모나게 녹색바다가 꽉 찬 창으로 더 커진 그 소리는 곧장 내게 달려들었다. 나무숲사이로 한 사람이 논두렁을 타고 나오면서 예초기를 휘둘러대고 있는 것이 한눈에도 채색 빛깔처럼 선명하게 투영되어왔다. 머리에는 차양 넓은 누런 밀짚모를 쓰고 위에는 회색 반팔 티를 입었으며 무릎다리까지 차오르는 빨간 장화를 신은 왜소한 체구의 아저씨였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7시도 채 되지 않은 아침식전 시간대였다.


조용한 곳을 찾아오느라고 찾아왔는데 여기도 그렇고 그런 곳인가 보다고  곰투덜을 했다. 낮에는 새들이 간단없이 재깔이고 밤에는 개구리가 목쉬도록 극성스러운 건 생뚱맞게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일부였다. 그러나 인위적인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시끌시끌하고 사람 마음을 요상하게 하는 데가 있었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언제부터 내겐 부정적이었나 보다. 나는 사람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고 사람이 만들어낸 것 때문에 면역력이 뚫려버린 병충이가 되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양병원 앞개울을 건너면 바로 무논이 펼쳐졌다.


이내 논은 아침잠만 설쳐놓고 한낮엔 고요했다. 강렬한 낮볕을 피해 저녁나절에야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서 물 조절도 하고 농약도 분사하고 비료도 뿌리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보다 노출된 실외에서 일하는 그들은 정반대인 일본새였다.


햇살이 뒷산꼭대기에 올라가 커다란 그늘을 지울 무렵 나는 산책을 나섰다. 얼마 못가서 길에는 길을 잘못 들어선 지렁이의 사체가 이따금 나왔다. 개미들이 새까맣게 둘러싸고 영차영차 죽은 지렁이한테 매달려 길 밖으로 옮겨내려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기적처럼 지렁이가 움직이고 개미들이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수많은 발들로 자맥질하듯 발발 기었다. 자기 몸통보다 몇 곱절일 지렁이를 업고 한해농사를 치러낼 대단한 모험여행일 것이겠지만 그것은 영구차를 호송하는 듯 장엄해보여 나는 외면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길가에 무더기로 만개한 하얀 일당귀꽃이 보였다. 일당귀 꽃잎과 뿌리는 약용가치로 다양하게 쓰인다는 들은귀가 있는지라 나는 꽃잎을 채취해서 잘근잘근 씹어 보았다. 조금 달착지근하고 싱그러운 풋내가 입 안 가득 진동했다. 계속 앞쪽으로 직진하자 논 옆에는 그리 크지 않은 금실 좋은 부부나무라 일컫는 자귀나무가 가지를 요리조리 뻗은 사이로 꽃들이 제철을 맞아 활짝 피었다. 하얀 아래쪽으로부터 반쯤 위로 나누어진 분홍 색깔의 꽃잎은 그림을 그리려고 색을 먹인 화필의 털붓처럼 다보록이 모여 있다가도 바람이 불때마다 부챗살처럼 펼쳐져 한들한들 부채질해주는 듯 했다. 자귀나무도 약재로 다양하게 쓰인다고 하는데 나는 언제부터 뭔 눈에 뭐가 보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종작없이 입귀를 씰룩이고 말았다.


별로 높지 않은 산마루가 보이고 길은 s자형으로 에움길이 나오더니 거기까지 논벌의 행진은 끝났다. 꽤 먼 길을 왔고 몸에 무리다 싶어 돌아섰는데 딱 정면의 산비탈에서 누런 밀짚모에 회색 티의 아저씨가 엎드려 일하고 있는 밭이 보였다. 어디서 보던 분이라는 느낌에 다가가며 머리회전을 시켜보니 아저씨라고 하기에는 늙숙해 보이는 아침식전에 보았던 분이였다.


고개인사를 드렸다. 아저씨는 벙그레 웃으면서 들깨를 파종할 밭에 거름을 내는 중이라고 했다. 사람을 훈훈하게 다독이는 선한 미소였다.


 거시기에서 오셨어라? 그가 아리송한 물음을 던졌다.


 거시기? 그게 뭐죠? 나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는 논벌위로 산기슭에 덩그마니 앉아있는 요양병원 건물 쪽을 턱으로 가리켜보였다. 나는 바로 그 아랫마을인 방앗골에 살아라. 그제야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하얀 자외선 차단크림을 두텁게 바르고 앞차양이 긴 모자를 푹 눌러썼는데도 농사꾼의 눈치는 빨랐다.


워매, 젊은 사람이 어쩌당가라? 그는 망중한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강마르고 초췌해 보이는 내 얼굴이 아마도 맘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많이 좋아졌답니다. 나는 그런 표정들이 싫어서 잘 대답을 안 하는 편인데 오늘따라 무엇에 홀린 듯 깜빡 넘어가고 말았다. 그 얼굴 전체로 넘쳐흐르는 선한 미소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아리송한 문답을 주고받았고 그는 거기까지 더 이상 말을 주문하지 않고 일에 빠져들었다. 퇴비라고 쓴 비닐자루의 불룩한 중간부분을 삽으로 푹 찌르자 대뜸 터지면서 약간 구터분한 냄새가 퍼지고 남청빛 퇴비가루가 새어나왔다. 그는 삽으로 그것을 푹푹 떠서 휑뎅그렁한 검누런 밭에 여기저기 힘껏 흩뿌렸다.


아저씨가 하는 양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내가 말을 붙였다. 부지런 한 것 같습니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못살아. 그는 다시 웃음을 벙그레 입가에 머금었다. 할미꽃이 벙그는 것 같았다. 연세가 생각 밖으로 많았다. 77세, 강건했다.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정정한 모습이라고 말씀을 드리자 고럼, 여기는 공기도 좋제, 이 나이 먹도록 지금도 아픈데 없이 일도 꽝꽝 할 수가 있어 좋아라 고 신바람 나서 대답했다. 그는 말을 다 해놓고 저 혼자 좋아한 것이 맞는 상황이냐는 듯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또 뵙겠다고 인사를 드리고 총총히 물러났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자기 마을에 대한 낯선 손님의 방문에 튀김옷을 입혀주려는 본색임을 탁본해냈다. 그 풋풋한 날 것 같은 웃음 하나로 나는 그가 어제 본 이웃 같이 그림 그려졌다. 바로 그는 내 뒤통수에 대고 그림을 믿게 하는 인사치레를 덤으로 얹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잘 나왔어라. 몸조리 잘해서 꼭 자기 생활로 복귀했어라. 흙바람을 먹고 잘 숙성된 듯 털털한 탁성이었다.


도시는 진즉에 시작되었을 무더위가 이 초록색 숲정이에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신선한 공기를 찾아 열어놓은 창으로 많은 벌레가 기어들어왔다. 발이 여러 개 달린 놈도 있고 머리에 긴 촉수를 단 놈도 있었고 날개가 달린 녀석도 있었다. 밤에 자다가도 몸을 깨물거나 다리에서부터  팬티로 파고들어서 화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다리 긴 방아깨비는 모기장 작은 구멍을 어떻게 뚫고 들어왔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어릴 때 들이나 산길에서 자주 만나던 녀석으로 녀석의 긴 집게발을 활용해 손등에 붙인 채 뒤집어가며 그네를 태우거나 물구나무를 세워 장난쳤었다. 손가락으로 다리를 집어 녀석을 들어 올리자 방아 찧듯 머리를 까닥거리면서 다리와 함께 꽉 잡고 살을 물어뜯는 것이 전에 하던 귀여운 짓하고 똑 같았다. 하여간에 여러 불청객 때문에 다시 두벌잠에 들어도 내겐 성가시지 않고 하나도 징그럽지 않았다. 차라리 소중해지는 것이 별쭝맞았다. 전에처럼 종이나 장갑을 이용해 꾹 눌러죽이지 않고 그냥 사부랑 삽짝 밖으로 놓아주었다. 


조금 어두운 뭉게구름이 오전까지 푸르던 하늘을 말아버린 날씨였다. 비를 머금은 구름으로 때 아니게 시원했다. 이번엔 점심녘에 길을 나갔고 새로운 산책로를 선택했다. 이 시각 도시는 안 봐도 뻔했다. 올여름 따라 열대야가 장기화 된다는 보도가 텔레비전을 통해 장황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조금 가파른 양지쪽에 버려진지 얼마 안 되는 듯 쑥대가 나기 시작하고 황폐화된 손바닥만큼의 뙈기밭이 보였다. 인적이 드물기까지 해서 조금 쓸쓸했다. 이내 그 밭주인이 되고 싶은 듯 의연하게 빨강 개나리와 노랑 달맞이꽃이 밭머리에 떨기떨기 피어나 잠식시켜주는 것이 눈에 안겨와 마음이 새뜻해졌다. 치렁치렁 외태머리를 땋아 늘여 놓은 것처럼 밤에만 핀다는 달맞이꽃의 연초록빛 잎들이 열列을 지어 줄기 양옆으로 앙금앙금 노랑꽃 아래까지 뻗어 올라갔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밭 변두리였음직한 곳에서도 여기저기 빨간 유실수를 옹기종기 매단 딸기가 수두룩했다. 딸기밭에 가끔 뱀이 나온다는 소리를 들어 알고 있지만 조심히 다가가 한 개 따먹어보니 달디 달아서 계속해서 따먹었다. 이 딸기들이, 이 천연적인 것들을 그대로 품고 싶어 나는 아쉽지 않을 때까지 붙어 서서 오물거렸다.


그리 멀지 않은 실개천 너머에 다시 깔끔하게 정리된 논과 밭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곧 사람을 만날 것 같은 정서에 나는 흥그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을 만났지만 맹랑했다. 신출귀몰하듯 어제 아침나절에 만났던 곳 하고는 반대방향인 밭에서 하필이면 또 그 밀짚모 아저씨를 만난 것이 아닌가. 밭머리 길 어구지에 세워져있는 하늘색 소형 트럭을 보아서야 의문이 풀렸다. 그는 차로 움직이는 현대식 농부였다. 시골에 사람들이 적다는 건 세상에 기정사실화 되었지만 사람들이 쉬는 건지 그가 부지런한 건지 여하튼 피하고 싶지 않는 강렬함이 나를 이끌었다. 아저씨가 일하는 곳에는 도로 너머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 밑으로 흐르는 실개천은 물을 될수록 저장해서 논에 대주고 있어 흐름이 늦춰지면서 네가래 수초가 한가득 득세하고 있었다. 넓은  콘크리트 다리 한쪽 편에 밀려난 조선시대 돌다리가 고풍스럽게 놓여있어 나는 조심조심 그 위로 건너보았다. 푸르뎅뎅한 녹태를 뒤집어쓴 너비와 길이, 두께가 각 1, 2, 0.3미터 좌우 되는 커다랗고 너부죽한 자연 판석들을 비롯해 돌기둥으로 받쳐져있는 엄청난 바윗돌까지, 하나도 아니고 13개를, 장비도 마땅치 않았을 그때 상황에서 무슨 깜냥으로 운반해 돌다리를 조성했는지 옛 농부들의 슬기를 재어보는 대목이었다.


대안에 닿은 후 구면인 것처럼 나는 말을 걸었다. 비가 올 것 같은데요.  비가 오기 전에 할 일들을 언능 해놓고 들어 가야제. 곧장 돌아오는 말맛이 풋풋하게 느껴져 나는 역시 그냥 지나쳐가는 건 아니었구나 하는 마음이 다분했다. 밀짚모 아저씨는 옻나무 주위에 심어놓은 고사리가 다 쇠어서 못 먹으니 밭을 갈아엎고 2모작으로 고구마를 심어볼 요량이었다. 어제 방앗골에 산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던 차라 어떻게 다른 마을 쪽 밭까지 부칠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또 때 묻지 않은 미소를 벙글벙글 입가에 지어냈다.


사람들이 안 부치려고 해서 내가 임대해부렀어. 여그 말고도 저 짝도 밭이 많응께로. 이렇게 많은 논과 밭들을 부치느라고 힘이 안 드세요? 기양 에렵지 않응만치만 부치는 것이제. 그는 활짝 웃었다. 와,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은 부인하고 둘이서 2만 평에 달하는 밭과 약재 농장을 경영하고 논 9천 평 이상을 다루고 있는 알부자였다. 그 연세에, 체격에. 나는 다시금 그를 돌아보았다. 허리가 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눈총기가 좋고 얼굴색깔도 불그죽죽한 것이 건강미가 넘쳤다. 게다가  홀딱 넘어갈 것 같은 할미꽃 미소가 언제나 질줄 모르는 얼굴의 아저씨였다.


나는 인차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마치도 그의 건강비결을 캐물어볼 듯이. 그이도 금번에는 일에 쫓기지 않는지 여유롭게 돌다리위에 다리를 드리우고 앉아 한 쉼을 했다. 나도 그 옆에 퍼더버리고 앉노라니 실개천에서 판석을 뚫고 상서로운 기운이 엉덩이를 찌르고 차오르는 듯 했다.


그 가식 없고 살가운 웃음이 좋다고 나는 솔직히 말씀을 드렸다. 아뿔싸, 그는 오히려 그 넉넉한 웃음 때문에 몇 번 당해부렀어 하고 웃었다.  귀가 널러서 남의 말을 잘 믿는 것이 화가 되었다고 했다. 들을수록 이야기보따리를 귀맛 좋게 술술 풀어나가는 재주도 있는 아저씨였다. 나는 원체 고향을 일찍 떠나갖고 25여 년 전잉가 광주에서 과자공장도 해보고 철공소도 해보았어라. 과자공장은 잘 되는 듯 헌께 외상놀음에, 철공소는 공부도 퇴깽이 꼬랑지만큼 한께로 현대사회에서 대충 주먹구구식으로 써감써하다 보니께 남들한테 싸목싸목 다 떼어부렀어라. 사업을 징허게 이끌어 갈수 없도록 말아먹응게로 내삐러둬불고, 고나마 고향에 땅을 임대만 하고 팔지 않았던 것이 있었제. 긍까 고향에 다시 행차할 수 있었던 게라. 처음에는 농사일을 별반 해보지 않아서 고생을 쌔가 빠지도록 겁나게 했어라. 그때 여그 시골도 예전 같지 않응게로 고도시 다 도시로 들어가불고 우리 네 외에 2가구만 이곳에 남았어라. 그것도 지금 나이맨치로 두 노인 내외가 사셨는디 그분들한테 가서 품앗이를 하면서 농사일을 배웠어라. 후제  밭과 논을 쪼까 사들임스롱 오늘에 이르렀어라.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도 가득할 원망이나 증오 대신 너무 담담한 혹은 간주곡처럼 살짝 웃음도 곁들인 모습이여서 그의 됨됨이가 아니라면 차라리 남의 이야기처럼 들릴 정도였다. 그래도 운이 좋았고 그렇다고 노력을 안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사람이 착하게 살고 부지런하면 꼭 그만큼 따라오게 되어있다고 했다. 자기를 버리지 않은 귀향만이 살길이었다는 것을 깨도한 듯한 귀감에서는 결국 미련조차 둘 것 없다는 듯 속 한번 후련하게 선들바람 같은 웃음을 내뿜었다.


나는 오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웃음주머니가 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만 보니 눈도, 코도, 입도, 볼에도 미소가 출렁이는 것이 그는 태어나서부터 웃는 부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이 동원돼서 저도 몰래 감염되어 킥킥거리고 말았다. 어제오늘 세 번씩이나 만난 저 타오르는 황혼의 어르신. 우여곡절 많은 인생고를 겪고서도 초연하게 웃음꽃을 피우면서 살아갈 수 있다니. 이야기 나누는 동안 그는 기어이 내게로 와서 웃음이 되었다. 나도 오랜만에 얼굴을 펴고 따라 웃음을 지어볼 수 있었던 것임에 느꺼웠다. 웃으면 있던 병도 떨어진다는 사실을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었다. 나의 현실은 웃음 같은 긍정적인 것들을 깡그리 도난당한지도 한참 되어서 메마르다 못해 짱짱 갈라터지는 가슴 속에 어떻게 웃음샘이 졸졸 흘러나와 적시고 있는지에 스스로도 쩌릿했다. 온통 흙 때 묻은 작업복 차림인데도 때를 타지 않는 건 그의 웃음이었다. 나는 더 그의 일손에 방애되지 않으려고 헤어졌지만 맘은 어느덧 그의 웃음을 통째로 소장하고 있었다. 이까짓 것이 뭐라고......,


포장도로가 된 마을 입구까지 왔을 때 국지성 호우가 한바탕 콘크리트바닥을 들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침 마을 통나무정자가 보여서 그리로 비를 피했다. 비가 끊기를 기다려 앉아서 우썩우썩 자라는 연두색 논들을 이윽고 바라보고 있으려니 힘든 모내기를 하고나서 정자에 앉아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미를 얻었을 마을 농사꾼들이 따사로운 한줌 햇살처럼 뇌리에 비쳐졌다. 드디어 허공은 비거스렁이로 개어갔고 비가 오지 않을 땐 모르겠던 길바닥이 후끈후끈한 지열이 쑥쑥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얀 시루떡을 찌고 있는 가마솥뚜껑을 열자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김처럼 신비롭게도 안개가 만들어져서 길바닥을 이리저리 굼닐었다. 나는 그 하얀 물안개들을 헤쳐 나가면서 걷는 신선이 된 기분으로 몸이 가뜬해졌다


통통통 통통통 가락 맞은 경운기 소리가 귓전으로 맴돌아 아침잠을 설쳐주었다. 또 그 아저씨인가 싶어 나는 신을 찾아 신고 논틀길로 나갔다. 다른 두 사람이었다. 누런 벙거지를 쓴, 이쪽 사람들치고는 좀 젊어 보이는 사람 옆에서 얼룩덜룩한 긴 수건을 머리에 덮어쓴 아내인 듯한, 한국 여자로 보이지 않는 여성이 수걱수걱 일을 거들고 있었다. 나는 내친걸음에 맑은 아침공기도 마실 겸 그쪽으로 슬슬 다가갔다. 마침 동력분무기를 등에 메고 한차례 분사를 마쳤는지 그가 논두렁으로 올라섰다. 농사꾼답게 얼굴이 거멓게 그을렸고 서글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나보다 서넛 이상인 이순미만으로 보이는 농부였다. 여성이 그를 도와서 배합된 알갱이 비료를 하얀 분무기통 덮개를 따고 쏟아 부었다. 그 짬을 빌어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제가 아는 분인가 했더니 아니네요. 누구를 그러지요? 내 귓가에는 이명처럼 때 묻지 않은 너털웃음이 껄껄 금방이라도 쏟아지는 듯 했다. 웃음이 멋진 아저씨지요. 나는 저도 몰래 중얼거리듯 말했다. 밀짚모자도 쓰고 다녀요. 아, 우리 윗마을 방앗골 김이장님을 그러시는 것 같군요. 이장님? 네, 이장님이세요. 가장 나이 드신 이장님이지만 정말 나이대접을 받을만한 분이세요. 나는 귀가 솔깃해 맞장구를 쳤다. 네, 맞네요, 너무 좋은 분이더군요. 그는 할 이야기가 많다는 듯 논두렁에 아예 눌러 앉았다. 나는 예의 삼아 말을 건넸다. 일하는데 제가 눈치 없지요? 아, 괜찮습니다. 저도 좀 쉬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그리곤 계속 말을 이어갔다.


김이장님 같은 분은 정말 농촌서 드물지요. 한 마을에 사는 것이 아니어도 논이 아래위에 대인 이웃이고 저의 아버지와 생전에 가깝게 지내서 많이 도움을 받아요. 제가 초보농사꾼이라. 그러세요? 네, 저는 워낙 도시에서 직장생활 했는데요. 아버지가 2년 전에 돌아가다 보니 홀로인 어머니를 모시고 가업을 이어나가야 해서 고향으로 부득불 내려왔어요. 베트남 농사꾼출신인 아내도 동의해서 농사일을 시작하긴 했는데 워낙 서투르다보니 이장님께서 여러모로 걱정이 많아요. 그러시군요.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이는 지도자 자격 있는 사람이다 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을 들여다보듯 벙거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뿐만 아니에요. 혼자서는 못사는 법이라고 하면서 이장님이 귀농할 때는 다 떠나가고 2가구뿐이던 마을에 사유지를 싼 가격으로 되팔아가면서 다른 집들도 소개해 들여서 현재 13호로 불렸고 다시 예전처럼 살기 좋은 마을 숲으로 돌려놓는 게 꿈이래요. 지난해도 이장선거에서 연세가 많은 것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다시 김이장님이 이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지요.


이곳 사람들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하고도 반기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꺼내주는 게 특징이었다. 구질구질하게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가가 굳이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한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어디까지고 친절할 것 같았다. 그러면 세상은 모든 것이 치륜이 맞물려 평화롭게 돌아간다는 것을 이 곳 농부들이 먼저 알아버린 듯싶었다. 자연친화적인 환경과 대치되면서도 대치되지 않는 건 그리운 사람과의 대화 하나뿐이 아닐까 하는 절실함이 들었다. 그만큼 상호 이웃마을의 사정도 손금 보듯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이 인근 여러 동네에서 50 안팎인 사람마저 안 많다고 들었는데요?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요, 제가 제일 젊은 축이죠. 형씨는 도시에서 온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는데 다시 도시로 들어갈 생각은 없나요? 글쎄요, 영원한 것은 없나 봐요. 직장보다 자유롭긴 하지만 워낙 농사일이란 것이 고되고 돈이 안돼서 실패할 수도 있잖아요. 그때 다시 결정할거에요. 그러나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노라면 무리는 없다는 것을 김이장님의 내력에서 축적하고 있으니 일단 해보는 데까지 덤벼보는 거지요. 논은 얼마 안 되고 해서 올해부터 고기소도 사육을 시작했어요. 나는 벙거지가 귀농한 것이 어떤 자부심처럼 들렸다. 성공을 미리 축원하듯 벼이삭이 곧 팰 것 같은 그가 일하던 논벌을 바라보았다.


오늘 무슨 약을 치는가요? 그는 낮은 톤으로 설명하듯 말했다. 아, 이건 약이 아니구요. 벼의 밥을 주는 거에요. 벼도 벼의 밥을 먹고 우리는 또 쌀을 먹고 살죠. 벼를 잘 자라게 하는 복합비료인거죠.


범이 자기 흉을 보면 온다더니만 그때 먼발치에서밖에 트럭이 달려오는 것이 보이더니 길옆에서 멈춰서고 밀짚모가 내려섰다. 나와 벙거지, 그의 베트남 아내도 거의 동시에 밀짚모에게 인사를 드렸다. 어째 쓰까이, 오늘은 솔찮게 덥다구 하덩마. 밀짚모 아저씨가 금시라도 가을무를 한 입 가득 베문 웃음을 쾌청한 공기에 걸걸하게 실어 보낼 듯 인사를 대체했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당께로. 그가 환히 웃으면서 나를 보고 하는 소리였다. 덕분입니다. 나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웃을수록  엔도르핀이 팍팍 솟고 무색해진 검은 독소가 피부의 땀구멍에서 비죽비죽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젊은 농사꾼도 틈에 끼어들었다. 제가 그동안 이장님의 도움이 많았다고 자랑하던 중이에요. 자랑은 무슨? 밀짚모 이장은 외려  벙거지를 칭찬했다. 이씨는 영판 오진 효자잉게라. 그제야 나는 벙거지가 성이 이씨인 줄을 알았다. 해마다 마을 효자비도 돌보는가 하면 길에서 마을 어른들을 보문 척척 차에 태워서 면소재지나 시내까지 모셔다드린 당께로. 그약꼬 이씨는 허벌나게 우리 농촌마을의 미래인데 잘 안착하도록 어찌 안 돕것능가? 우리 자식들도 다 시골서 안 산다꼬 멀리 떠났응께, 이씨가 낫제.  


분위기는 자랑잔치처럼 무르익었다. 한마디도 설익은 공치사로 느껴지지 않았다. 한분은 가장 나이 드신 이장이었고 한분은 가장 젊은 농사꾼이라 그들 둘로서도 농촌은 얼마든지 이끌어가도록 사기 탱천해보였다. 또 이들이 함께 서있게 한 논벌이야말로 될성부른 농촌의 미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오늘도 논은 영원한 농촌의 주제였고 올해의 밭농사로는 아로니아가 새로운 효자작물로 떠오르고 있었다.


나이든 농사꾼이 나이 젊은 농사꾼에게 말해주었다. 쪼까 있으면 이삭이 팰 긴데 도열병 약과 볏잎을 갉아먹고 사는 멸구류 따위의 해충을 방제하는 살초제를 분사할 때는 비례를 잘 맞춰야 쓰겄으니 신중해야 할 것이랑께. 그때 나도 약을 칠거이니 같이 해야 쓰것어라. 네. 젊은 농사꾼이 고맙다면서 머리를 주억거렸다.


논벌에는 안개가 잠포록하니 내려앉았고 민들레 하얀 홀씨가 내려앉은 듯 거미줄이 군데군데 쳐져있었다. 거미줄이 깔따구, 멸구 같은 곤충들을 잡아준다고 하면서 이장님은 병충해하고는 관련 없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곧바로 동산으로 일출이 발갛게 드러나고 하늘의 은총처럼 돋을볕이 포근하게 무논까지 내려오자 논벌 위 거미줄도 하나둘 철수해 어부의 그물처럼 걷어졌다.


젊은 농사꾼이 다시 무거운 동력분무기를 어깨에 메고 논에 나갔다. 우르릉  굉음을 내면서 토색 검은색 알갱이들이 앞다투어 힘차게 분무기에서 튀어나갔다. 저만치 무논에서 긴 부리 백로 두 마리가 놀란 듯 짝 지어 푸드득 논을 박차고 하늘을 날아올랐다.


나는 밀짚모 이장님과 작별을 고하고 흐뭇이 다시 산책로에 올라섰다. 어쩐지 그이가 퇴비를 내던 깨밭이 궁금해져서 그리로 발길을 옮겼다. 엊그제 본 것 같은데 싯누렇게 땅만 훤하던 밭이 푸른 들깻잎들로 일제히 무릎을 넘어서 꽉 찼다. 밤새에 달맞이꽃이 피던 것처럼 논도 몰라보게 푸른 빛깔이 짙어갔다가 다시 연해지기 시작했으니 곧 농부들의 기쁨도 누렇게 익어갈 기분 좋은 예감이었다. 경기장 관객들이 즐거운 파도타기를 하듯 층층이 바람에 누웠다 일어설 때마다 우썩우썩 키가 크는 듯한 잎줄기의 곡선이었다.


하늘은 청청 높아지는 반면에 알락달락한 잠자리들이 헬리콥터처럼 낮게 비행해 내 어깨에 내려앉기도 했다. 어디선가 가을 냄새가 났다. 아니 산에도 논에도 밭에도 숲에도 사람에도 가을 냄새가 당도하고 있었다. 벌써 논두렁 풀을 베던 소리들도 두 번 들려온 것 같다. 이제 한 번만 더 매주면 해걷이바람 밑에서 한해 농사의 수확을 점쳐볼 수 있다고 하던 이장님의 고단함을 녹여내는, 막걸리 한잔 한 듯 걸판진 목소리가 내달려오는 상 싶었다. 그만큼 예초기로 한해 여러 번을 베도록 풀의 생장도 그악스러웠다. 아스팔트길의 갈라진 틈새로도 풀들이 살겠다고 파랗게 밀고 오르는 생명력은 더욱 기막혔다. 그럴수록 내 걸음은 기운이 차곡해 갔고 나는 듯이 더 빨라졌다. 천연의 자연과 대화할수록 곧 그것들은 나의 온몸과의 대화가 되었다. 끈끈한 왕버들나무 수액처럼 말라비틀어지던 피부에 촉촉이 윤택을 낼수록 자신심의 결이 악을 쓰고 완만하게 돋아났다.


벙거지 이씨가 추석이면 아버지 묘소와 함께 돌본다던 마을입구에 세워져있는 “효자전주이공기적비”에서 잠간 머물렀다. 기적비에는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부친이 득병하여 위독하자 대소변을 찍어 맛을 봄으로써 약을 지어드렸고 엄동설한에는 잉어 먹기를 원하여 큰 강에 나가 얼음을 깨고 잉어잡기를 계속했더니 잉어가 감동되어 스스로 뛰어나와 잡히더라는 기록이 돋을새김 되었다. 마침맞게 머리를 쳐들어보니 이공이 부친상을 치르고 6년간이나 시묘를 했다는 잉어등산이 어렴풋이 동녘 하늘아래 메이고 있었다.


일매진 논벌은 족히 6~7키로는 꾀꼬리봉을 중심으로 산맥 아래 아늑한 분지처럼 차도와 같이 나란히 기다랗게 드러누웠다. 그 시내로 소통시키는 유일한 포장도로는 갈래갈래 뻗어나간 가지 같은 갓길로 골짜기들에 진을 치고 있는 4개 마을들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었다. 실개천이 흐르는 마을 주위마다 논 몇 마지기가 둘러싸였고 논이 없는 펑퍼짐한 산언덕에는 밭들이 고랑을 차고 나갔다. 밭을 일굴 수 없는 완만한 산자락에는 매실이나 밤, 감 같은 과원이 줄레줄레 산허리까지 쫓아 올라갔다. 연득없이 왕조시대 죽이고 싶지만 죽일 수 없는 죄인들을 마지못해 귀양을 보내는 험한 이 땅에서 숨어 다니면서도 척박한 유배지를 기름진 옥토로 만들었을 선조들의 숨결이 홧홧하게 느껴지는 접점이었다. 좋은 땅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는 옛 조상들의 격언들이 반추되었다.


나는 이번엔 마을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애초엔 내 계산속에는 사람들을  만날 타산이 없었는데 그 부지런하고 때 묻지 않은 미소가 눈부신 아저씨를 만나면서 사람에 대한 경계가 암 덩어리처럼 줄어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죄랴 하는 철두철미한 나의 자의식이 흔들린 꼴이었다. 마을 모두 어르신들을 만났다. 여기서는 가물에 콩 나듯 만나던 사람만 반복해서 만나 만사시름 털고 그들과 이말 저말 마주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도시에서 직장생활이 주이야기라면 이들께는 주업인 논과 밭 이야기가 전부였다. 했지만 오래된 고향의 잔영처럼 전혀 낯선 감이 없이 푸근했고 정겨웠으며 내 가슴에 내내 꽂혀서는 언제나 뾰주리감처럼 뾰족한 의미로 오롯했다.


첫 번째 조금 비탈진 언덕에서 애호박을 따는 얼굴이 거무튀튀한 예순 훌쩍 넘는 아저씨를 만났다. 호박들은 왜 간짓대를 세워주지 않을까요 하고 인사치레 삼아 건네자 호박은 심어놓으면 지그들이 알아서 킁께. 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해주었다. 호박은 저래 보여도 그 어떤 폭우나 풍랑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자기 나름대로 사는 방식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손을 끄잡아 당겼다. 그가 커다란 부채같이 넙적한 호박잎을 들쳐 보이고 세 갈래로 뻗기 시작한 줄기마디를 살짝 드텨보이자 그 밑에서 땅에 박은 하얀 뿌리가 보였다. 가장 끝머리 쪽에 있는 호박잎도 들쳐보이자 요람 속에 숨을 쌕쌕 고르면서 자고 있는 아기처럼 싱싱한 털북숭이 애호박이 나타났다. 그 밑에서도 갓 난 뿌리 하나가 땅을 박아나가고 있었다. 호박 하나에서도 대물림하듯 원줄기에서 넝쿨이 갈래갈래 뻗어나가면서 수많은 뿌리를 새로 박고 땅에서 영양분을 섭취하며 자자손손을 낳아 키우듯 의기양양하게 열매를 맺으면서 영역을 거방지게 넓혀가는 것이었다. 그런 호박도 강적을 만날 때가 있다고 했다. 바로 새삼 같은 풀이었다. 새삼은 호박과 반대로 뿌리가 없이 그물망처럼 넝쿨손을 닥치는 대로 뻗는다는 것이었다. 톱날 같이 생긴 줄기로 마구 뱀처럼 칭칭 감아서는 흡혈귀마냥 피를 빨아먹듯 영양분을 흡입하고 살아 남의 불행으로 자기 행복을 바꿔오는 아주 영악한 독종이었다. 사람에 유익한 호박이든 해로운 새삼이든 나에겐 다 부질없는 식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질기게 살아남는 자기만의 방식 때문에 나는 한없이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 같아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두 번 번째 마을에서는 한창 잎이 큰 뽕나무에서 오디를 따는 이모님을 만났다. 어디서 오셨어라? 하고 묻기에 엉겁결에 경상북도에서 왔다고 대답하니 먼 곳에서 오셨는데 어여, 맛 좀 보시라. 겁나게 맛있당께. 하며 내 손을 다짜고짜 잡아끈다. 아기 어르듯 조심스레 따먹으면서 이모님과 한담을 두런두런 주거니 받거니 했다. 오돌토돌하게 돌기된 오디는 검고 토실토실한 애벌레처럼 손바닥을 간질였다. 5년산 오디나무였는데 당도 높아 맛이 일품이다. 맛깔나게 실컷 입질했다 싶어 손바닥 같은 오디나무 잎을 들치고 나오는데 내 입가가  먹물에 뽀뽀한 듯 하다며 주름진 이모님은 홀쭉한 입을 호호거렸다. 그이의 안내에 따라 마을구경을 하는데 울타리도 없는 새빨간 빛깔의 탐스러운 보리수 열매가 나 봐주시오 하듯 내 팔소매를 건드렸다. 군침이 꿀꺽 올라와서 손을 내밀다 그만 움츠리고 말았다. 쨔는 우리 꺼 아니제라. 이모님의 한마디가 뒤통수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동네의 많은 집들마다 울타리가 없었다. 혹 울타리가 있는 자두, 감, 석류, 사과 같은 녀석이라야 가지 휘게 돌담을 건너왔다. 거의 울타리가 없이 사는 마을에서 나는 금시 내가 가엾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배불렀는데도 속보이게 게걸거리는 건 영락없이 손님인 나뿐이었다.


산모롱이에 가로막혀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용케도 길은 나타났고 그 곳에서도 어김없이 세 번째 농부를 만났다. 밭에서 2모작을 내신다며 비닐을 걷는 고희의 이모님은 허리가 많이 굽은 데다 머리도 호호백발이었다. 이 한적한 시골에 가끔 고시생들도 찾아든다는 정보도 입수했던 터라 고시 공부하러 왔다고 나를 짜깁기했더니 목청도 카랑카랑한 밀양 김씨 이모님은 다짜고짜 청승맞게 질렀다. 거시기 뭐더라. 사법 고시오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다 하등마는, 큰 사람 되실랑가 하는 것은 좋은디, 나이도 묵었을 만큼 묵었을 긴데 처자식들은 어쩌구, 이 먼 곳까지 징헌 공부고라? 철부지 자식에게 무작위로 내지르는 이모님의 잠언이듯 나는 대답이 궁색해졌다. 괜히 내 몸의 이상 때문에 생말을 지어냈다가 혼쭐만 났다. 내게 가족은 어떤 것이던가.


이모님은 내 상처 따위는 살필 요량 없이 생급스레 자기 이야기부터 늘여놓았다. 우리 애기 셋이 다 대학 나왔는디 거시기 뭐더라, 둘째는 미국 하, 하, 무슨 댄지 잘 생각 안나는디 어쨌든 질 높은 대학 나왔다요. 그래서 내가 거들었다. 하버드대학일걸요. 맞다요. 그이는 내리사랑에 대한 긍지감이 만면에 가득했다. 이모님은 일찍 너울도 못쓰고 시집 와서 시부모님 모시고 술고래인 남편을 만나 온갖 고생을 했단다. 뒷간의 똥물도 통으로 퍼담아 지고 4~5리 길을 걸어 밭머리에 썩혔다가 거름으로 내주는 일도 혼자 하셨다고 했다. 고진감래라고 딸들을 공부시킨 보람이 있는데도 일안하면 몸이 쑤셔 한시라도 가만있지 못한다고 했다. 그제야 이모님의 쓴소리의 근원이 내 마음에 얌전하게 자리잡아갔다. 마침 처자식 귀한 줄 알고 어여 귀가하라고 또 재촉해서 나는 귀찮아서라도 얼른 그 자리를 떠야 했다. 그러나 마음은 이모님께 동조하고 있었다. 그래요, 저도 그러고 싶당게요. 건강한 육신도, 평범한 가족에로도 안둔하고 싶었던 소망을 행색이 볼품없는 안노인이 시큼털털하게 절여주어서 언젠가 맛이 들것만 같은 내실 있는 결과물에 나는 담백하게 사로잡혔다.  


네 번째 마을 안쪽에는 외딴집이 한 채 있었다. 패널건축으로 된 새로 지은 집같이 뜰에는 잔디가 깔끔하게 깔려져 있는 가운데 창고 옆 대나무로 만든 평상에는 두 내외분이 애기배추를 다듬고 앉아서 바람을 쏘였다.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인사를 건넸더니 커피도 얻어먹고 6.25전쟁 때의 마을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두 분 다 60년여 전의 기억이 생생한 그 당시의 목격자들이었다. 아홉 살 때 아랫마을에서 살았던 아내 분은 인민군 차림을 한 군인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마을사람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고 했다. 눈치 빠른 이장님이 맨 앞장에 서서 태극기를 쳐들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동네사람들도 따라 불러서 겨우 참상을 모면했다. 그러나 남편 분이 살던 마을에서는 군인들이 풀잎 모자를 쓴 인민군 차림을 한 줄 모르고 인민군 만세 한마디를 외쳤다가 그 자리에서 3~40여명이 전부 총알받이가 되었다고 했다. 당시 12살 난 그는 뒷간에 들어갔다가 겁나서 나오지도 못하고 문틈으로 내다보는 것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4개 마을사람들이 빨치산을 따라 더러 입산하면서 서로를 의심하고 울타리를 높이는 등 흉흉한 세월이 되었다. 결국 주변마을까지 빨치산들의 활동무대로 삼는다는 미명하에 모두 불을 질러 집들이 전소되고 초토화되어 누구라 할 것 없이 근 2~3년 동안 방랑생활을 해야 했다. 집과 가족을 잃은 남편 분은 이웃의 중매로 그때의 상흔에 공감하는 동정심 많은 아내 분을 만나서 새 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생과 사의 나들목에서 피땀으로 빚은 행복은 부부애가 해냈다. 그 후 두 분은 아들딸 넷을 낳아 시집장가 보내는 한편 광주에 가서 건축업에 매진했으며 만년을 고향에서 보내려고 지난해 새 집을 짓고 들어왔다고 했다.


6.25때는 서로를 경계하고 더 높은 담장을 세웠을 그들의 마당 너른 집도 울타리가 없었다. 마당가에는 파란 잎 가장자리가 하얀, 잎이 꽃처럼 보이는 고결한 설악초 외에 조림수목들이 울긋불긋 앙증맞게 길러져있었고 텃밭에는 수줍은 듯 짙은 남색의 도라지꽃 같은  약초들을 재배하고 있었다. 현대식 가전제품이 알맞게 배열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안팎살림 모든 게  없는 것이 없는 통 털어 내가 꿈꾸던 도화원생활을 자귀나무꽃 같은 그들 부부가 현재 누리고 있었다. 4개 마을에서 만나본 평균 연령대는 70세 이상이었고 남의나이를 사는 분도 적지 않았다. 저마다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두꺼운 책으로 쓸 분량이라고 말씀들 하면서도 똑같이 지난한 세월에 대해 자조적이거나 한탄과 후회가 없었고 지금은 많이 살기 좋아졌다고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가오는 내일에 대해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그들 앞에서 감히 하찮은 숨통이라고 꼴값 떤 나 스스로가 얼마나 하릴없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인가를 절감하게 되는 시점이었다.


가구 수라야 총망라해서 80호에도 못 미치는 마을들은 이미 전원생활을 하고 있거나 연세가 많아 논과 밭을 다룰 수 없어 내놓은 집들이 태반이었다. 어지간한 도시 직장인의 한 달 월급이면 논 10마지기 다루는 1년 수입과 맞먹는다고 하니 안타까운 계산속이 아닐 수 없었다. 전에는 학교도 있고 식당과 슈퍼도 있었지만 명징하던 애 옹알이가 사라지고 시끌벅적하던 젊은이들이 다 떠나가면서 부득불 문을 닫아건 쌉싸래해진 진풍경이었다. 그것도 오래전 일이 되었다고 했다. 오래되는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은 어찌 그뿐이겠는가. 마을들에 빈 집터와 폐가들도 가끔 보여 우리 연변 고향 농촌과 다를 바 없었다. 어떤 공터에는 국가 소유지라는 팻말이 언감생심 범접하지 말라는 듯 말뚝 깊숙이 박아져 있었다. 이 곳 몇 십리 인근이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이사 가는 가구들의 집과 터전을 개인 매매가보다 비싼 가격으로 국가가 매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나는 마을을 걸칠 때마다 뒷산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살을 걸러주었을 바람벽같이 촘촘히 도열해있는 억센 대나무군락들과 마을과 연륜을 대대손손 공조해왔을, 울뚝불뚝 옹이가 상처처럼 박힌 노거수 느티나무들에서 시원하게 땀을 들였다. 나를 위한 피톤치드가 시골 곳곳에 누적되어서 아름드리로 껴안아가기만을 기다리는 듯 은혜로운 것에 내가 갚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내 몸은 나무숲에서 자유자재로 뛰어노는 앙증맞은 청설모처럼 토실토실 살이 오르고 조금씩 바깥으로 몸 깊이 달라붙었던 병균들이 끄잡아 걸러 나가는 느낌에 살맛나는데 어쩐지 마음은 차츰 돌팔이 원예사로서의 막중한 설계를 떠안은 듯 그리 짐스럽고 새침해졌다.


나는 303호 버스를 타려고 요양병원 정류장에 나와 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아들 녀석이 여름방학을 빌어 오늘 아빠 보러 인천공항으로 입국한단다. 짜아식, 그래도 다 컸다고 혼자 비행기를 타고. 그것보담 당당하게 아들 녀석을 맞을 수 있는 내 체면과 빨리도 회복된 몸에 대한 기쁨이었다. 서울보다 먼저 지금까지 있어본 적 없는 경이의 생명력을 체화한 이 땅을 아들과 여행하는 대로 곧 제 생활권에로 복귀할 타산이었다.  


간이 나를 괴롭게 했던 시간은 그리 오라지 않았다. 한때 간이 콩알만 하게 했던 나는 간암 2기였다. 큰 병원에 가서 재검사해보니 간 기능이 정상수치를 회복하고 있었고 이대로 쭉 나간다면 다시 재발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는 교수의 설명도 가뿐하게 듣고 왔다.


나는 중국에서 제 노릇 못하는 백수로 살다가 아내와 이혼하고 난후 한국으로 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식으로 험한 일을 견디면서 닥치는 대로 해나갔다. 일보다 더 힘든 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기시와 차별이었다.  일을 마치고 귀가하면 열패감에 술을 마셨다. 어중이떠중이들과 어우렁더우렁 먹고 마시고 나서 간 빼먹고 등 쳐먹는 사람들이라는데 실망한건 나중의 일이었다. 그걸 또 혼자 삭이려고 마실 때도 적지 않았고 아비 없는 불쌍한 아들 녀석과 막연한 집 생각에 쓸쓸해져서 이래저래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 아주 고질이 되었다. 취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세상이었다. 술이 술을 청해 매일 미친 듯이 술을 마셨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와 한국소주는 술이 아닌 듯 아예 중국 슈퍼에 가서 독한 배갈을 사다가 마셨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그 누가 들여다보아주지도 않는 곳에서 신세타령을 하다가 결국 간이 나를 불쌍하게 할 줄은 몰랐다. 술이 이젠 간을 마셨고 내가 나를 파괴했다. 결국 나는 간이 처절히 곪아갔고 남산만한 배를 끌고 큰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배에 찬 밑도 끝도 없는 물을 뽑아내고 간 절제술을 받았다. 담당교수는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지만 몸조리도 아주 중요하다고 신신당부했다. 충분한 휴식과 피로회복 운동, 간 재생에 좋은 맑은 공기 씌우기 등을 예로 들었다. 그럼에도 절대 금물인 술 생각이 또 다른 재발의 제목처럼 식겁하게 다가왔다. 간에 기별도 없이 매일 마시던 냄새를 못 맡으니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입술을 피나게 깨물고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을 때뿐 간이 타기만 했다. 다시 물이 새듯 술 생각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엔 차라리 술을 왕창 마시고 자살할까도 생각해봤다. 그러면 간이 통곡할 것 같았다. 더 이상 술을 끊지 않으면 다시 벼랑 끝으로 몰릴 절박한 상황이었다. 나는 내 고향이 아닌 이 땅에서 지지리도 궁상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나는 50도 안 되는 황금기였다. 강산도 바뀐다는 10여년 세월동안 한국에서 죽을 둥 살 둥 일하고 나서 이렇게 허황되게 죽을 거면 돈을 벌어서 뭐하나 하는 처절한 생각이 들었다. 돈을 다 써버리고 죽든지 살든지 그래야만 결과는 원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가장 좋다는 요양병원을 찾아보았고 술을 완전히 끊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러다 전라남도 화순과 담양 어귀에 끼어있는 깊고 한적한 시골 요양병원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자연친화적인 치유요법 결부로 간암 환자가 호전되었다는 기사가 마음에 끌렸다. 도시에 없는 쭉쭉빵빵한 대나무 숲과 시골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요양병원 배경사진을 컴퓨터 홈페이지로 들여다보면서 연락을 취했다. 술을 마셔서 좋을 것이 없는 줄 알면서도 마시게 되는 알콜중독의 마법을 제거하는 과정자체가 혹독한 형벌을 내리는 의지의 실험이니, 그 버틸 수 있는 최후의 방선인 의지에 도움 주는 회복에로부터 시도될 것이라는 보호사의 보태지 않는 넉넉한 상담을 통해 나는 이튿날로 길을 조였다.


요양병원에 짐을 부려놓자마자 나는 의지의 동요를 불허하는 실험에 득달같이 참여했고 발만발만 걷기운동부터 시작했다. 새삼 같은 독소를 악착같이 싸워 뿌리 뽑아볼 작심이었다. 이 하찮은 풀도 자기 삶을 지키는 질긴 길이 있는데 나라고 못 살아보겠나 하는 요령이 필연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었다. 술이 생각날 때마다 숲길이자 마을길을 걷고 또 걷고 무진장 걸었다. 모든 것이 다 짜맞춰져있는 듯 안성맞춤하게도 시골길에는 나의 술기를 유혹하고 촉발하는 식당과 슈퍼마저 없었다. 요양보호사의 지도에 따라 약재를 깃들인 식이요법에 새알꼽재기만큼의 희망을 얹고 술에 대한 간절한 잔재를 깜냥깜냥 발효시켜나갔다. 꼭 이겨야겠다는 단심가가 드디어 나를 이 땅의 일초일목과 사람에까지도 악착스레 융화되게 했다. 어쩌다보니 경북사람 티를 내었지만 나는 이 곳에 와서 협동이란 권리를 덤으로 얻었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도 권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시와 다른 사람들에게서 싱그러운 향기가 풀 자라듯이 났다.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은 끈끈한 식물처럼 짱짱하고 장수하나 보다. 김이장님부터 봐도 그랬다. 사람이 웃고 사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내 몸이 대뜸 알고 반응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을수록 간이 좋아죽겠다는 듯 묽어지는 신선함이었다. 눅눅하고 기름진 땅에서 뿜겨지는 공기를 한입 또 한입 가득 삼킬수록 나의 딱딱하고 굳어버린 간은 말랑말랑하고도 부드럽게 마사지를 받는 듯한 감격의 씨앗에 부풀었다. 나는 그 정벌의 노정을 알기 위하여 5개월 동안 정해진 한 정점에서 어느 정점까지 걸어 나가던 데로부터 호박잎처럼 영역을 넓혀 해남 땅 끝 농촌마을까지 발품을 들였다. 그 길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다. 도시에서  짜증났던 사람들이 시골이 서서히 좋아지게 만드는, 술 세계와 판이한 살맛나게 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강력한 주술에 나는 걸려 있었다.


요양병원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손을 위로 뻗어 벚꽃나무의 버찌를 따먹었는데 벌써 열매는 다 떨어지고 그 아래로는 꼬리를 젓는 듯 허벅지를 간질이는 강아지풀과 겨끔내기로 키 견주는 코스모스 꽃들이 산들바람에 하늘거리는 시야가 풍요로웠다. 지는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씩 다를 뿐 모든 철다툼의 꽃도 화려함의 한철, 그해의 것은 그해에 지게 되어있다. 그 계절에 순응하고 융화를 받아들이면 내년에 또 더 예쁘고 더 많은 꽃으로 피는,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었다. 더 욕심을 내고 많이 가지려고 질서를 가로지르고 궤도를 이탈하는 그때부터 육탈이 다가오는 불가항력적인 원리를 물리칠 수 없음임을.


내가 도시를 탈선할수록 시골로의 길을 단축시켜내는 소통버스에 오불꼬불 들척대면서 들어서던 때가 엊그제 같이 아쉽다. 전라도는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은 땅이었다.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한국 전역을 안가본데가 없었다. 그 와중 전라도만은 적당한 직장도 없고 인연이 닿지 않아 시종 갈 기회가 없었다. 내가 아는 전라도는 백제가 신라에 통합되고 그 결정판의 싸움에서 유명한 연개소문 장군의 아까운 최후를 읽은 역사의 정도에서부터 대통령 직선제로도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지율에서 빚는 각진 차이로 메우기 어려운 갈등의 골을 가늠해보는 정도까지였다.


버스가 정류장에 와 멈추었으므로 나는 오르면서 순간적으로 꾀꼬리봉을 쳐다보았다. 소소리 높은 산봉에는 6.25 암야의 밤이면 “빨치산”들이 지핀 모닥불이 빤히 쳐다보였다는 그 험악한 곳에 아직도 어릴 적 두만강 건너에서 보았던 군인들이 숨어있는 듯 착각되었다. 내 배꼽 떨어진 벽지마을에서 강 하나를 건너면 바로 닿는 저 대안은 어떨까, 그 땅에서 뭔 놀 것이 있을까 궁금한 나머지 한번은 아이들과 헤엄쳐 건너갔다. 어디선가 난데없이 아래위 연녹색 복장을 한 군인이 긴 장총을 둘러메고 나타나서 호령했다. 야야, 돌아가, 아새끼들이 겁도 없이. 그냥 한번 어떤 땅인가 와봤슴다. 땅이야 다 똑같은 땅이지비 다를 게 있겄냐. 그러나 섬기는 조국이 다르지 않느냐. 맘대로 건너오면 안 된다카이. 얼씨덩 돌아가라. 죽어 자빠지는 수도 있으니. 그가 근엄한 얼굴로 쫓았기에 우리는 다시 두만강 물살을 헤가르며 돌아왔다. 그때 우리는 나라가 다르지만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그 군인아저씨에 하나도 간이 서늘해나지 않았다. 그런데 6.25 전쟁 때 내가 서있는 이 땅에 내가 먹고 자는 이 땅에서 좌우익의 다툼에 많은 무고하고 선량한 주민들만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고장이라고 듣는 순간에 간이 쓰려났다. 이 땅도 똑같은 땅, 한나라 분단의 비극도 서러운데 아직도 수시로 위협을 받고 있는 동족상잔은 더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나를 실은 버스가 다른 세계로 향하듯 정든 마을을 등지기 시작했다. 범죄가 없는 마을로 물갈이해내기까지, 살기 좋은 오늘만 화제 삼는 어르신들을 위해서라도, 필마단창 마을 숲으로 되살리려고 애쓰고 있는 건 밀짚모 이장님이었다. 청년 일자리를 향한 젊은 부부귀농을 장려하고 그들 속에서 보시시 나비잠에서 웃는, 깨물어주고 싶은 새 생명의 표정이 이 땅에서 행복한 기적이 일어남은 한낮의 꿈일까? 밀짚모 이장님의 말마따나 이씨가 마지막 농사를 짓는 잔여세대가 아니라 이 농촌마을의 재구성의 미래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 적어도 그 먼 훗날에도 저 아름다운 효자비를 기리고 조상들의 산소의 풀을 베어줄 이가 걱정되는 땅이 고심되지 않을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나는 식물이 되어 이 땅에 남겨지고 싶다. 논에 가서 찰랑찰랑 벼가 되고 싶고 밭에 가서 알콩달콩 콩이 되고 싶고 뜰에 가서 송이송이 꽃이 되고 싶다. 풀이든 나무든 식물이라면 뭐든지 천년만년 질기게 살아남아서 아름다운 이 강산의 표식이 되고 싶다. 사노라면 그 언젠가는 똑같은 사람들이 하나의 땅의 주인으로 회귀하는 원점의 그날을 맞아 실질적으로 이 땅이 번영하는, 다시없는 복락을 누리는 그때 나는 현대판 산증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