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통신원 소식

조선 신학생의 발자취가 남은 신학교 휴양지 마리오필(Mariophile)
구분
문화
출처
KOFICE
작성일
2024.03.27

조선 신학생의 발자취가 남은 신학교 휴양지 마리오필(Mariophile)


말레이시아 페낭은 성지 순례자들에게 특별한 곳이다. 그 이유는 이곳에 한국을 포함해 베트남, 미얀마,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각지의 신학생들이 사제 수업을 받은 신학교 컬리지 제너럴(The College General)이 있기 때문이다. 컬리지 제너럴은 1665년 파리외방전교회가 태국 아유타야 나라이(Narai) 국왕의 승인을 받아 아시아 사제 양성을 위해 세운 신학교다.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인도,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의 신학생이 입학해 그 이름도 컬리지 제너럴이라고 지어졌다.


< 컬리지 제너럴(The College General) 입구에 설치된 베트남 순교자 동상 - 출처: 통신원 촬영 >

< 컬리지 제너럴(The College General) 입구에 설치된 베트남 순교자 동상 - 출처: 통신원 촬영 >


아유타야에서 출발한 컬리지 제너럴은 미얀마의 침략, 종교 박해 등으로 1765년 태국 짠타부리(Chanthaburi)와 캄보디아 혼닷(Hondat), 1770년 인도 폰디체리(Pondicherry) 등지로 옮겼다. 그러나 폰디체리는 중국과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지역을 선교하기에 거리가 멀고 신학생도 줄어들면서 1782년 문을 닫았다. 이후 프랑스 신부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신학교는 1809년 페낭 풀라우티쿠스(Pulau Tikus)에 다시 자리 잡았다. 한국 교회에서는 1855년 이만돌(바울리노), 김요한, 임 빈첸시오 3명을 조선 신학생 1기로 보내 사제 수업을 받도록 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페낭으로 신학생을 보냈다. 그러나 풍토병과 댕기 등으로 7명이 병사하자 1885년부터 신학생을 보내지 않았고 1890년부터 1892년까지 모든 신학생을 귀국시켰다.


< 페낭교구박물관에 전시된 컬리지 제너럴 이전 경로 - 출처: 통신원 촬영 >

< 페낭교구박물관에 전시된 컬리지 제너럴 이전 경로 - 출처: 통신원 촬영 >


130여 년 전 이곳에서 조선 신학생들이 공부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2003년 최승룡 신부가 1880년대 촬영한 조선 신학생들의 사진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최승룡 신부는 컬리지 제너럴 자료실에서 조선 신학생의 흑백사진 2점을 찾았다. 그중 한 점은 1886년 컬리지 제너럴에서 촬영한 사진이며, 또 다른 한 점은 1888년에서 1890년 사이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도 신부와 조선 신학생들 사진이다. 그러나 컬리지 제너럴의 옛 모습을 찾아봐도 우도 신부와 조선 신학생들 사진에 등장하는 대포는 찾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컬리지 제너럴이 1989년 지금 위치인 탄중 붕아(Tanjung Bungah)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두 번째 사진의 배경이 컬리지 제너럴이 아니라 마리오필(Mariophile)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1886년 컬리지 제너럴에서 촬영한 신학생 단체사진 - 출처: 컬리지 제너럴 홈페이지 >

< 1886년 컬리지 제너럴에서 촬영한 신학생 단체사진 - 출처: 컬리지 제너럴 홈페이지 >


< (좌)우도 신부와 조선 신학생들, (우)마리오필 - 출처: (좌)'안성신문', (우)컬리지 제너럴 홈페이지 >

< (좌)우도 신부와 조선 신학생들, (우)마리오필 - 출처: (좌)'안성신문', (우)컬리지 제너럴 홈페이지 >


마리오필은 옛 컬리지 제너럴이 있는 풀라우 티쿠스에서 약 3km 떨어진 탄중 붕아에 있는 건물로 1848년 컬리지 제너럴이 신학생들이 휴가를 보내는 휴양지로 조성한 공간이다. '마리아의 사랑(Love of Mary)'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이름인 마리오필에서 신학생들은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했다. 통신원과의 인터뷰에서 말레이시아 작가 유진 콰(Eugene Quah)는 "컬리지 제너럴에서 철저하게 라틴어만 사용했던 신학생들은 마리오필에서 자국어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조선 신학생들도 이곳에서 마음 놓고 조선의 언어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화와 풍습이 다른 각 나라 신학생들과 공부하고 풍토병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생한 조선 신학생들에게 마리오필은 잠시 휴식을 취하며 영육을 충전할 수 있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 우도 신부와 조선 신학생들 사진 배경에 등장한 대포 - 출처: 통신원 촬영 >

< 우도 신부와 조선 신학생들 사진 배경에 등장한 대포 - 출처: 통신원 촬영 >


< 마리오필 내부와 예배당 - 출처: 통신원 촬영 >

< 마리오필 내부와 예배당 - 출처: 통신원 촬영 >

페낭교구박물관 기록에 따르면 1855년에서 1884년까지 24명의 조선 신학생이 컬리지 제너럴에서 공부했고 그중 12명은 귀국해 신부가 됐다고 한다. 페낭의 신학교에는 아직도 조사되지 않은 자료가 많고 국적을 알 수 없는 신학생들의 유해가 발굴되고 있다. 이렇게 발굴된 자료들은 한국 천주교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자료 수집과 연구를 지속해 숨은 교류 역사를 발굴한다면 한국과 말레이시아 양국의 우호 증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안성신문》 (2020. 9. 23). 35. 1929년, 미리내에서의 삶과 죽음, http://www.assm.co.kr/1693

-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In Singapore》 (2021. 12. 28). History of College General, https://history.catholic.sg/history-of-college-general/

- 컬리지 제너럴 홈페이지, https://www.collegeofmartyrs.com/

- 페낭헤리티지트러스트 뉴스레터 제75호, https://www.pht.org.my/newsletters/2002_04.pdf






홍성아

성명 : 홍성아[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말레이시아/쿠알라룸푸르 통신원]
약력 : 현) Universiti Sains Malaysia 박사과정(Strategic Human Resource Mana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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