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광복절은 우리나라가 35년의 일제강점기 속에서 나라를 되찾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실제 일본이 물러간 것은 9월의 일이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함에 따라 이 날을 기념하고 있다. 독립을 위해 많은 애국지사들이 몸과 마음을 바쳤고, 이를 위해 만주와 연해주, 미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다. 만주와 미국 등지에서 벌어진 독립운동과 자금 모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록이 있지만, 벽초 홍명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동남아시아로 향한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동남아시아로 향한 독립군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벽초 홍명희 선생은 1912년 중국으로 떠나 상하이에서 정인보, 이광수, 문일평 등과 함께 생활했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인 1914년 11월 싱가포르로 떠나 3년간 머물다가 1917년 12월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만 3년 동안 싱가포르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원택 선생이 당시 기록을 일지형식으로 써놓은 「지산외유일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지산외유일지」 10월 3일(양력 11월 19일)자 기록에는 벽초(碧初) 홍명희 선생의 제안에 따라 지산(志山) 정원택, 단정(檀庭) 김진용, 동성(束國) 김덕진 선생 세 명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레이시아에 위치한 쑨원의 중국혁명동맹회 동남아시아 본부 – 출처 : 통신원 촬영>
독립운동가들이 동남아시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국의 혁명 배경에 동남아시아 화인(華人)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당시 상하이에서 체류했던 독립운동가들은 화인들이 중국혁명에 끼친 영향력을 실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쑨원(1866~1925)의 동맹회 동남아시아 본부는 싱가포르에 세워졌다가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옮겨졌을 정도로 당시 말라야(현 말레이시아의 일부 지역)와 해협식민지(현 말레이시아의 페낭, 믈라카 그리고 싱가포르)의 화인은 중국 혁명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중국 민주화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쑨원은 1905년 8월 20일 일본 도쿄에서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해 미국과 일본, 아시아 등 해외 화인과 화교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 가운데에서도 말레이시아 화인들은 쑨원의 혁명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페낭은 8,000 해협 달러를 지원하면서 신해혁명(1911.10.10~1912.2.12)을 이끈 황화강 봉기와 우창 봉기의 성공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또한 쑨원을 도와 혁명을 설파하는 일간지 광화일보를 함께 설립하며 경제적, 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동남아시아의 화인들을 중심으로 많은 혁명자금이 만들어진 것을 보고 독립운동가들은 광복을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시아 활동의 본거지가 된 싱가포르
홍명희 선생과 독립운동가들은 광복운동의 자금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싱가포르로 향했다. 1914년 11월 22일 홍명희 선생과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를 출발해 홍콩으로 향했고, 홍콩을 거쳐 산다칸에서 2개월 남짓 체류하다가 다시 현재 말레이시아 도시인 라부안을 거쳐 1915년 3월 4일 활동의 본거지가 된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서 싱가포르로 향한 여정 - 출처 : 구글어스>
1915년 3월 싱가포르에 도착한 직후 홍명희 선생과 일행들은 국민일보사 3층에 임시로 묵다가 같은 해 7월 싱가포르 서쪽 금방마로에 있는 양옥 한 채를 세 얻어 이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국민일보는 1914년부터 출간된 중국계 신문사로 홍명희 선생의 거처를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국민일보사 사장인 레이티에야(雷鐵崖)는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에 체류하는 신규식에게 서신 등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홍명희 선생과 일행들이 싱가포르에서 임시로 묵었던 국민일보사 – 출처 : 광복 TV 해외독립유적지 공식 유튜브(@광복TV해외독립유적지)>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말레이시아행
독립운동가들은 싱가포르에 거처를 정한 후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화교와 화인 혁명가들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한 방안을 고심했다. 자금 모금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말레이시아 믈라카 근처 고무농장을 구매한 후에 이를 경영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주석광산에도 투자하여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려고 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실행에는 옮기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외독립운동 사적지 실태조사 보고서-동남아지역 편’에 따르면 1916년 4월 고무농장을 매입했으며, 같은 해 7월 고무농장을 둘러본 후 근처에서 하룻밤을 지냈다는 구절이 「지산외유일지」에 등장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싱가포르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말라야의 화교, 화인 혁명가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맺었다. 국외독립운동사적지에 따르면 1916년 3월 25일(음력) 정원택 선생이 쿠알라룸푸르에 방문할 당시 중화기독청년회관(YMCA)에 머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원택 선생 등은 1916년 3월 29일 말레이시아 이포에 방문하고, 같은 해 12월 28일에도 이포 YMCA에 머무는 등 자주 이곳을 들려 중국 혁명가들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려고 했다.
<쿠알라룸푸르 YMCA 현재 모습(좌), 쿠알라룸푸르 YMCA 설립기념비(우) - 출처 : 통신원 촬영>
당시 말라야 중국계 혁명가들과 독립운동가 사이의 교류는 정원택 선생이 말레이시아에서 머물렀던 쿠알라룸푸르 YMCA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쿠알라룸푸르 YMCA는 1905년 조직되었지만 숙소를 마련한 것은 1931년부터로, 1930년대에 2층 객실을 만들어 숙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쿠알라룸푸르 YMCA 관계자 젠(Gen)과의 서면인터뷰에 따르면, 1940년 이전에 작성된 쿠알라룸푸르 YMCA 숙소 이용객 기록의 90%는 일제점령기 동안 소실되어 한국 독립운동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은 1931년 숙소가 조성되기까지 YMCA는 악기를 비롯해 일반 장비를 놓는 공간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사람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고 전했다. 따라서 젠 씨는 당시 쿠알라룸푸르 YMCA 관련자와의 친분으로 정원택 선생이 건물 내의 공간에서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또는 1910년대 당시 지도에 따르면 YMCA 건물 인근에 주택가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머물렀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쿠알라룸푸르 YMCA와 관계된 중국계 혁명가들은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거처를 마련해주었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쿠알라룸푸르 YMCA 설립 당시 – 출처 : 통신원 촬영>
3년간의 동남아시아 생활을 처분하다
「벽초 홍명희 연구」에 따르면 홍명희 선생과 일행은 1917년 12월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귀국 준비를 하던 1917년 10월 18일(양력 12월 2일)자 기록에는 “연전부터 재배하던 고무원을 방매하니 대금이 2,200원이었다”고 하는 구절이 있는데, 전문가들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떠나 고무농장 등을 경영하기는 했지만 큰 소득은 얻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수년 동안의 생활비와 농장 구입비 등의 자금을 지원받은 경로가 여전히 미지수다. 「벽초 홍명희 연구」의 저자는 상하이의 신규식, 신규식과 연결된 중국인들 또는 본국의 가족들로부터 지원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통신원은 말레이시아에서 지내며 교분을 맺은 화인과 화교 혁명가들이 크고 작은 도움을 제공했을 확률도 높다고 본다. 쿠알라룸푸르 YMCA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따로 거처를 마련해준 것처럼 말이다.
한국과 말레이시아 양국의 수교가 처음 이루어진 것은 1960년이다. 하지만 그보다 반세기 전인 일제점령기에도 지금의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싱가포르, 당시 남양이라고 불렸던 동남아시아 일대는 홍명희 선생과 독립운동가들을 도우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과 말레이시아 두 국가는 기간의 장단이 있기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라는 공통분모와 함께 타국의 식민지 생활을 오래 했다는 유사점이 있다. 또한 15일은 대한민국이 그리고 31일은 말레이시아가 독립한 날이어서 같은 8월에 두 나라가 자유를 되찾았다는 공통점도 존재한다. 2020년 올해는 한국과 말레이시아 수교 60주년으로 그동안의 우정처럼 앞으로도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관련 행사가 축소 또는 사실상 어려운 상태이지만 과거의 교분을 현재까지 이어나가는 지란지교(芝蘭之交)의 꿈은 계속될 것이다.
※ 참고자료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http://hwiki.eumstory.co.kr/index.php/%ED%99%8D%EB%AA%85%ED%9D%AC
《우리역사넷》 <지조를 꺾지 않은 조선의 ‘3대 천재’, 『임꺽정』을 연재하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5400&code=kc_age_40
《조선일보》 (2006.02.02), <안창호, 만주韓人 필리핀 대이주 시도>,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2/02/2006020270525.html
강영주(1999). 『벽초 홍명희 연구』 (파주: 창비)
- 성명 : 홍성아[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말레이시아/쿠알라룸푸르 통신원] - 약력 : 현) Universiti Sains Malaysia 박사과정(Strategic Human Resource Management) |